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요란한 광고문구가 많은 책에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왠지 별스럽지 않은 내용물을 너무 이쁜 포장지로 감싸 감춰주는 것 같은 느낌이 앞서는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몇만부가 팔렸다느니, 베스트셀러라느니, 유명인사 누구누구가 추천했다느니 하는 식의 사탕발림에는 그다지 유혹을 느끼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번역자가 내게 신화의 달콤함을 알게 해 주었던 이윤기씨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대한 나의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쩌면 그로인한 나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책을 읽는 내내 함께 했을 것이다. 책을 받아보고 책표지의 그림을 먼저 바라보았다. 왠지 꺼림직한 느낌을 주는 한사람,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처럼 어떤 비밀의 문이 열려질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신화적인 장면들이 요소요소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햄든대학 그리스어과.. 줄리언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수는 헨리와 버니, 프랜시스, 쌍둥이인 찰스와 커밀러 고작해야 다섯명이다. 거기에 주인공인 '나'가 끼어들어 여섯명의 스터디그룹이 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인하여 전공을 바꾸게 되는 주인공은 사실 주변인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장치들로 인하여 주인공인 '나'는 어느새 사건의 중심부에 놓여지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그들 여섯명의 그룹으로부터 물위에 떠있는 기름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책장을 넘겨가면서 줄리언 교수와 그들만의 수업장면속에서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런 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책속의 화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신과의 소통을  실제적으로 느껴보고 싶어하던  접신의 과정은 실로 놀라웠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보았던 디오니소스를 위한 그 광란의 밤 장면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몰아의 경지였을까? 무의식의 세계속에서 그들에게는 진정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려주었던 것일까?  그리고 살인... 그 무의식의 세계속에서 그들이 만나야 했던 것은 하나의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만의 비밀이 된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이건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이건 너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거야... 뭐 이런 식의 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비밀이라는 것은 때로 황홀하게 그러나 때로 고통으로 우리곁에 다가온다. 더구나 그 비밀을 같이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심각한 사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하나의 심리극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야금야금 남의 사소한 약점을 들춰내며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는 사람이 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하게 되면 정말이지 죽고싶을만큼 처절해질 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면 그야말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두번째 살인대상인 버니가 그랬다. 함께 하고자 했던 접신의 과정에서 밀려난 버니는 어떻게해서라도 그들의 의식속에 들어가고 싶었을 게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였던 친구들에게 그야말로 좀벌레처럼 야금야금 그들의 이성과 감정을 자극해가는 그를, 역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말을 빌려 버니를 유추해보자면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악마적인 존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그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보자니 왠지 가슴 한쪽이 서먹서먹해져 온다. 왜일까?

결국 두번째 비밀을 갖게 되는 우리의 친구들은 이미 그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다. 인간으로써 살아가야 할 세월동안 느껴야 하는 모든 이성과 감정이 바람빠지는 풍선처럼 그들을 쪼그라들게 만들기 시작하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그들 각자에게 찾아오는 공포와 불신의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미 계획되어진 살인의식이 수포로 돌아가려고 할 즈음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찾아들어와 버린 살인의 순간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더욱 더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통에 찬 나날속에서 서로에게 아무런 위안조차도 찾아내지 못하는 그들은 절망속에서 허우적댄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그 순간순간들이 너무도 처절하게 잘 그려져 있다. 함께였기에 그들에게는 고통도 함께 찾아왔다. 함께였기에 더 크고 무거웠을 그들의 고통..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문득 이런 의문점이 생겼다. 이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과 함께 하면서 느껴지는 것의 차이는 과연 얼만큼이나 될까?

무슨 방호벽처럼 가끔씩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던 신화적인 요소들이 내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불러내고 싶고 만나고 싶어하는 신의 존재 역시 우리안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왠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을 간직했던 그들이 가장 힘겨워했던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믿음이 깨지면서부터 서로를 위하는 마음, 즉 사랑이란 놈도 저만치로 멀어져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믿음과 사랑의 부재로 인하여 친구에게 총구를 들이댔던 찰스,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결국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알을 박아넣어야 했던 헨리가 커밀러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었던 속삭임은 바로 '사랑'이었다.  흘러간 시간속에서 다시 만난 커밀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주인공과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이었음에도 아직도..라고 말하는 커밀러의 대화속에도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는 걸 보니 우리 가슴속에는 아직도 사랑이 더 많이 남아 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 다 보여주고 시작하는 전개방식에 약간의 긴장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었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심리적인 묘사들이 내게는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저리도 깊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두번째 살인, 즉 두번째 비밀이 생겨나고 부터는 왠지 긴장감을 잃고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을 다잡아야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분량의 숙제를 받아들었던 느낌처럼 난감하기도 했었다. 일종의 심리극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다. 그것도 처절하리만치 깊게 까발려진 심리극을... 그들이 앓고 지나간 비밀의 계절속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들만의 비밀이 남아 있다. 누구나 가슴속에 저마다의 비밀 하나씩은 안고 살아가듯이...

책장을 덮으며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던 곳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수수께끼 같았다고 주인공이 기억하는 대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줄리언은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다 골라먹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만 상자에 남겨두는,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던 버니와, 꿈같은 기분으로 그들 스터디그룹에 머물던 주인공에게 라포르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 줄리언은 영원히 일급 학자는 되지 못할거야. 왜냐? 사물을 보되 자기가 선택하는 측면에서만 보거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었다. 아름다운 것에 사랑을 쏟는 게 잘못된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의미있는 것과 맺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란 것 또한 피상적인 것이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측면에만 선택적으로 관심을 쏟을 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측면을 무시하지는 않아야 하는거라고... 잠시 생각. 그리고 잠시의 공백. 그들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그들 모두의 사랑을 버린채 떠나가 버렸던 줄리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여기에 줄리언 모로 교수의 한마디를 그를 위한 변명처럼 남겨놓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들만의 비밀로 인하여 더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비생각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은 우리같이 이성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문명화한 모든 사람들(우리뿐 아니라 고대인들까지도)은 생래적인 동물적 자신의 일방적인 억압을 통하여 문명화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 방 안에 있는 우리는 그런 그리스인, 그런 로마인들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우리는 의무, 신심, 충성, 희생, 이러한 것들을 강박증처럼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것들이 우리 현대인들의 입맛에는 끔찍한 것들이 아니겠는가" (82쪽 줄리언 모로 교수의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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