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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그림 찾기 -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들
박천기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9월
평점 :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들'이란 부제가 눈에 띈다. 경계... 정말 경계에 서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어쩌면 그 경계를 이미 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쉽게 '다름'과 '틀림'이라는 말을 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이렇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말처럼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나와 다르다면 그것은 곧 틀린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회가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생각들이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걸까?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진실은 생각보다 많다. 도처에 깔려 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쩌면 문명의 혜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의해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이 책에서도 그런 점을 꼬집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견해를 인정하며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일 경우 승리감에 도취하기 쉽다고. 하지만 그런 도취감은 금방 사라져 그런 경험을 더 많이 갈구하게 된다고. 그러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벽을 쌓고 서로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 안주하면서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배척하게 된다고.(-76쪽) 요즘 한창 세간에 이슈가 되었던 카카오톡 사태를 보면서 작금의 현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너무나 가볍게 연결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끊어질 때도 그렇게 가볍게 끊어진다. 그리고 원하는 것만 보고자 하는 편협함과 듣기보다는 들어주기 만을 원하는 사고의 일면을 보게 된다. 수많은 SNS의 글들은 제발 나 좀 봐 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역전된 시선의 세상에 익숙해졌다는 저자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이유다. 물론 편향적 연상이 있다는 것이 곧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차별은 의도 없이,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어떤 문화 혹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된 집단(부족)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부족주의를 추구한다.(-75쪽)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만 요시미치는 결국 차별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최대의 적은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원래 그렇다' 거나 '당연하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미 만들어진 사고의 틀에 맞춰 생각을 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왠지 핑계처럼 들리기도 한다. 앞의 말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삶이 있는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건 너무 피곤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같은 흐름을 타는 것은 엉덩이에 뿔 난 소가 되기 싫은 까닭일 것이다.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잠깐의 만족은 더 많은 일탈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처럼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준 책이다. '차별'과 '차이' 라는 말에 대해 깊숙히 생각할 수 있는 문장들이 빼곡하다. 책 표지의 그림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아이비생각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규율, 교묘하게 정신과 일상을 조직하는 고도화되고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는 이러한 파시즘을 '일상적 파시즘'이라 명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상적 파시즘은 '잡식성'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제정치이든 무엇과도 손쉽게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짝을 이뤄 찰떡궁합이 된 규범은 (혹은 그 규칙은)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타자화하고 배제한다. -중략- 벽을 만드는 시선, 우리 안의 파시즘을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하다.(-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