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홍도는 신윤복을 사랑했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서로 사랑했다?
김홍도가 사랑했던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책장을 펼치니 가는 붓대 하나조차 들 수 없는 늙은 육신의 남자가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고 있었다.
그가 회상하는 시대의 연정은 과연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영웅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고 했었는가?
아니면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는가?
많은 조선시대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도 유독 우리의 역사속에서 과연 시대를 잘 만난 영웅이 있었는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있었을까?  있었다면 과연 얼만큼의 시간속에서 그들은 머물다 간 것이었을까?  팩션이란 말의 정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실제 있었던 사실이나 실제적인 인물을 구도로 잡아 배경을 채워가며 하나씩 하나씩 설명을 늘어놓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과연 무엇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놀라웠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속에 나의 혼을 들여보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숨막히는 긴장감속에서 감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었는지 읽던 도중에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정명이란 작가의 이력을 보고 또 보았다.  문득 <진주귀고리 소녀>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을 읽으면서도 이토록 긴장을 했었는가?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에게도 이런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던것 같다. 한장 한장 그림을 따라가면서 엮여지는 이야기들이 마치 환상처럼 보였던 까닭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에 대한 나의 지식은 참으로 짧다. 그림에 문외한일 뿐더러 아무리 기억속을 헤집어 보아도 나의 기억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었던 때는 가방 들고 학교 다닐적의 시험시간이었을 뿐이다. 단원 김홍도, 그가 그린 그림은 무엇인가?  그는 어떤 식으로 그림을 그렸는가? 이런 종류의 객관식 문항에 넷중 하나를 골라 답을 가려내야 하는 그런 정도의 수준밖에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속에 숨겨져 있는 단원과 혜원의 그림은 정말 색다른 감흥을 불러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림을 펼쳐 준 후에 벌어지는 그 그림에 대한 논리적인 이야기 한마당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림 한장이 나올 때마다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림 한장으로도 말을 대신 할 수 있다던 단순한 진리를 이 책속 끝없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림 한장속에 세상사의 모든 것들을 담아 낼 수 있었던 그들은 책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늘이 내린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와 스승으로 만났던 두사람.. 그들은 진정 사랑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나를 정말로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뒷부분의 놀라운 반전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어야 했다. 그 놀라운 반전으로 인하여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더욱더 견고한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제자 신윤복을 마음속에 가두어 두었던 김홍도와 기생 정향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신윤복의 말없는 사랑 앞에서 책을 읽는 내가 오히려 안타까웠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어쩌면 그토록이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향이 타던 가야금의 곡조와 윤복이 그리던 그림속의 그리움은 마치 하나된 듯이 그렇게 어우러졌다. 그림 하나 하나가 어쩌면 그리도 정갈하게 다가오던지... 그들은 진정 그들이 가진 서로의 재능만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의 마음이 오로지 출세와 탐욕으로 삐뚤어진 세상의 입으로 인하여 한숨을 내쉴 때의 막막함이라니... 변화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은 지금의 세상속에서나 통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이 그랬다. 복지부동,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결코 변화를 바라지 않는 썩은 무리들의 악취속에서 꽃은 피어날 수 없는 것이 그 시대의 현실감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화가를 통해 세상을 알고 싶어했고 백성을 알고 싶어했던 왕의 마음, 그것이 차마 볼 수 없는 그림이라 할지라도 왕은 그들의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거침없는 그 마음을 왕은 사랑해 주었다. 그 마음때문에 하늘이 낸 천재를 곁에 두지 못했던 왕의 상실감... "그렇다. 조선은 대대로 일하는 자를 업신여기고, 사대부라 하여 몸 움직이기를 게을리하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다. 삶의 기쁨이란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오는 것임을 말이다." ... 늘 그렇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화원은 본 것으로 그릴 뿐이옵니다. 보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은 문인들이지요"... 정조의 힐책에 대답하는 윤복의 대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내심 통쾌하기도 했다. 탁상공론뿐인 세상사의 법칙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아무것도 겪어보지 못했으면서 그저 읽은 책에서 혹은 주워들은 정보와 통계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사의 법칙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상반적인 구도로 그려지는 반상제도와 마주치는 나는 언제나처럼 또다시 쉽게 흥분하고 말았다. 

책속에 풀어 놓은 신명나는 이야기 한마당속에서 만나지는 모든 것들을 단순히 허구라고만 보고 싶지 않았다. 김홍도의 선굵은 남성적인 화풍과 신윤복의 섬세한 여성적인 화풍이 너무도 잘 어울어진 한편의 마당극처럼 보여졌다. 마지막 그림 대결에서 보여주는 두장의 그림..  서민들의 풍속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중 으뜸이라는 <씨름>과, 넓은 마당 한가운데서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두 여인의 그림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쌍검대무>라는 두장의 그림을 앞에 두고서 그림속 세상을 헤집어 낱낱이 까발려 놓고 싶어하는 도화서 계원들과 심사관들의 칼날같은 논쟁이 나는 더욱더 놀라웠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각에서 자신들의 느낌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마치도 내가 실제로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찾아내지 못했던 것은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속깊은 마음이었다. 그 그림속에 숨겨두었던 그들의 속내를 어찌 찾을까?

<뿌리 깊은 나무>라는 책은 작가의 글을 다시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을 불러왔었다. 그의 세상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있지 않은 것 같아 읽으면서도 참으로 편안했다. 살아있는 듯한 책속 세상을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또다른 행운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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