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기행 1 -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개정증보판 삼국지 기행 1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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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영화관에서 홍콩 영화나 대만 영화가 많이 상영되었다. 그 배우들이 광고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때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부류의 영화였지만 오빠를 따라 읽었던 <영웅문>과 <삼국지>로 인해 영화의 재미를 알게 되었었다. 그 때는 故고우영의 만화도 꽤 인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수호지나 초한지도 그의 만화를 통해 읽게 되었던 책 중의 하나다.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라는 부제에서 보이듯 이 책은 답사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의미한다. 연의는 1800여 년을 이어오며 많은 부분이 역사적 상황과 다르게 각색되었다. 이를 일러 七實三虛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三實七虛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동안 민중에게 사랑받고 국가적으로 장려한 까닭은 무엇인가.(-19쪽)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이나 생각해 봤을까?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명확한 이분법적 세계관, 즉 '선과 악'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역사책이 아닌 소설책, 그러나 소설책이되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삼국지>라 한다. 이야기는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권은 부패했고 백성이 감당해야 할 조세는 너무 많았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삶을 살았던 농민들. 폭정에 시달리던 민심은 폭발했고 그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이었다. 주력군이 1년만에 괴멸하였음에도 흩어진 잔당들이 10여 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농민들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농민들을 도적으로 몰아 토벌하고자 내달렸던 자들이 바로 삼국지의 주인공들이었던 것이다. 조조가 그랬고, 유비가 그랬고, 손견이 그랬다. 백성을 위하고 세상을 편하게 하겠다는 정치인들의 말은 정권 유지를 위한 말에 불과할 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고 싶어진다.

중국어 중에 '인민'이라는 말이 있다. '인'은 성 안의 사람을 말함이고, '민'은 성 밖의 사람을 말한다. 성 안과 성 밖의 세계는 너무나도 달랐다. 관우가 살았던 곳도 성 밖이었다. 백성들을 학대하던 현관을 죽이고 도망자가 된 아들에게 걸림돌이 될까봐 그의 부모는 우물에 투신했다. 그렇게 몇 년을 강호를 떠돌았다. 중국에서 관우는 신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 최고의 주인공은 역시 관우일까? 중국 전역에 퍼져 있다는 사당 '관제묘'는 우리나라에도 많았다. 서울풍물시장 입구의 동묘가 바로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忠義의 화신이라는 별명이 새삼스럽게 눈길을 끈다. 소설에서 관우의 얼굴빛을 붉은 색으로 표현한 것은 색으로 사람의 성격을 구별하는 관습때문이었다. 붉은 색으로 충성스런 인품을 표현했던 까닭이다. 그와는 반대로 조조의 얼굴빛이 흰색인 것은 사악함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다분히 소설적인 묘사다. 유비, 관우, 장비 세사람이 도원결의를 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단지 소설적인 표현일 뿐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장면에 열광하는 걸 보면 알 수 없는 기운이라도 있는 것일까? 황권이 미약해지고 외척과 환관이 득세를 했다. 조정은 문란해지고 그 틈을 파고 들어 자신의 입지를 굳힌 인물이 동탁과 원소였다.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초선이라는 여인이 허구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유비도, 조조도 공부를 싫어했다는 말에 실소했다.

『삼국지』에 가미된,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이야기들을 철저히 살피고 정사(正史)와 연의를 비교해 실어 독자들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운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한다.(-책 소개글에서)

이 책에서는 '촉한정통'이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사실 유비보다 훨씬 뛰어난 지략과 정책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조조는 냉철한 현실주의였다. 그럼에도 악인으로 평가를 낮췄던 것은 중국인의 내면에 '촉한정통'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던 '성리학'이었다. 그 성리학의 중심점에 유비가 있었던 것이다. 명분을 중시했던 '성리학'이 우리의 조선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제갈량은 출사 이후 적벽대전까지 줄곧 철수와 후퇴만을 반복했다는 것을, 그 어떤 전투에서도 이긴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제갈량의 이미지는 소설가 나관중이 만들어낸 이미지였을 뿐이었다는 말에 왠지 모를 허탈감이 인다. 기행에서 만나는 유적들은 역사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그리고 허구적인 것들로 나뉜다. 이를 잘 가려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게다가 복원되어진 유적마져도 옛 풍취를 느낄 수 없다면 그 답사길의 여운은 고스란히 기행자의 몫이 된다. 관광이 돈과 직결되는 세상으로 변하면서 유물과 유적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옷을 입기도 한다.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부풀어 오른 풍선과 같은 스토리텔링은 가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러니 찾아가는 이의 '앎'이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도 누누이 말하고 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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