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있었다 - 경제학이 외면한 인류 번영의 중대 변수, 페미니즘
빅토리아 베이트먼 지음, 전혜란 옮김 / 선순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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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휘둘리는 것 같다. 어쩌면 남보다는 나를 먼저 내세우고 싶은 심리가 깔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작금의 사회가 자꾸만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개성을 이야기하면서 몰개성의 시대를 살게 하고, 각자의 그림을 그리라고 말하면서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서글픈 일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식의 사고는 위험하다. 신냉전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들하는 요즘 이 책을 보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의 정의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느끼던 참인 까닭이다. 관심도 없던 단어가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페미니즘의 정의가 너무 좁게 해석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혹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줄을 긋는 일이 그 목적은 아닐 것이기에. 궁금했던 주제였다.

학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틀어박혀 글을 쓴다는 저자는 영국 출신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이며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경제학 연구원이자 교수다. 일상에서 여성의 신체를 금기시하는 현상에 저항하기 위해 여러 차례 나체 시위를 벌였다는 말도 보인다. 그녀가 원한 것은 성에 대한 경제학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씁쓸하다. 지구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과학자, 학자들이 모여 만든 프로젝트에서 80가지 지구온난화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가족계획과 여성 교육이 10위를 차지했다는 말은 놀랍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경제의 내면에 여성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일 터다. 이미 186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 억압이 인류 발전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발언에 귀 기울이는 경제학자는 없었다는 점이다. 근래에 우리도 여성의 가사노동이 무급노동에서 유급노동으로 바뀌었다.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무려 68년만의 쾌거라고 한다. 진즉에 그랬어야 했다. 일상생활 자체가 경제인데 그 경제의 밑바탕에는 항상 여성이 있었다. 힘든 시절에 가정과 가족을 책임졌던 엄마가 있었고 누나가 있었다. 여성이 돌봄을 도맡는 불평등한 현실은 19세기에 생겨난 '가정성 이념' 때문이다. 가정이 평등하지 않은 한 시장도 평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시장이 평등하지 않은 한 가정도 평등할 수 없다. 가정과 시장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여성의 신체 자율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불평등의 해결책도 보일 것이다.(-130쪽) 그러면서 저자는 성과 여성의 신체를 향한 기존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몸으로 일을 하는 여성과 두뇌로 일을 하는 여성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도 어쩌면 고정관념에서 온 것일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정의 혹은 규칙이나 규범에 대해 세뇌 당하며 자란다. 그것을 교육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은 단지 여성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역사와 함께 했던 여성의 존재감을 말하고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목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에게 불리한 법, 규정 및 제도에 녹아 있는 사회규범과 싸울 수 밖에 없다고. 또한 집단 간의 이익 상충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갈등도 생각해야 한다고.(-186쪽) 기나긴 역사와 학문에서 여성은 소외당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정치가 억압하고 사회가 차별했다는 말에도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때, 그곳에 항상 우리가 있었다. 결핍과 폭력, 차별과 모멸을 끝내 견디고 우리가 있었다...고.

'방 안의 코끼리'...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크고 무거운 문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머리속에 그림을 그려보라, 방 안에 그 커다란 코끼리가 있는 것을! 페미니즘도 그렇겠지만 플라스틱 문제도 그렇고, 미래의 먹거리 문제도 그렇고 작금의 우리가 방 안에서 키우고 있는 코끼리는 한두마리가 아닐 것이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눈치만 살피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인정했을 때 감내해야 할 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모른 척 할 수 만은 없는 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참 꼼꼼히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이란 말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줄을 긋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라고.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남긴 말이라 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회는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낀다. 사회는 자신을 대변하고,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를 통틀어 전염병이 돌아도, 지진이 발생해도, 전쟁이 벌어져도, 기근이 들어도 이는 모두 여성들의 탓으로 돌렸다. 여성을 '통제하에 두려는'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가부장제를 이용해 여성의 독립을 막고, 목소리를 제한하고,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건 바로 여성들이 강하기 때문이다.(-26쪽) 이렇게 자신있게 한 말들에 대한 근거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또다른 역사의 뒷면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책 표지의 말이 시선을 끈다. 경제학이 외면한 인류 번영의 중대 변수, 페미니즘...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경제학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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