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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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만 보면 무슨 소설제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림을 소개한다.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이라는 부제처럼 여러 작품을 통해 힘겨운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한다. 어쩌면 그래서 끝낼 수 없는 대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장의 그림이나 한 곡의 노래, 한 편의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크게 위안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위안이나 공감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모든 것을 가둬버린 팬데믹의 시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원할 것처럼 누렸던 것들로부터 더 멀어질까 두려움에 떨게 한다. 책을 열면 들어가는 말에서 이런 문장이 보인다. 편집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세속화를 선택한 나의 고집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공의회의 고백처럼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실로 거룩한 것이라면, 예술작품이 무릇 인간에 대한 저마다의 깊이대로의 고뇌와 질문이라면, 성속의 경계를 걷어내고 그렇게 한참 내려가다 보면 결국 인간이라는 궁극의 질문에서 함께 맞닿아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는. 저자는 지금 천주교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다.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 역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등에서 일하며 노동자, 빈민등 사회적 약자들을 벗으로 만나왔다는 말도 보인다. 업으로 삼고 싶을 만큼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는 소개글처럼 그림사에 대한 박식함이 묻어난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 뭔가에 꽂힌다는 것이 그만큼 무섭다는 말이다. 관심을 두다보면 그 주변 역시 궁금해지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그 분야에 대해 깊이있는 지식이 쌓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저자의 말처럼 그림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할거라는. 세속화를 선택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세속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관념에서 바라본 세속이 아닐까 싶다. 가난과 종교라는 두 개의 주제로 구분되어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 두 개의 주제가 서로 맞닿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마음이 아닌 눈으로 읽혀졌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라고 하면 더 맞는 말일까?


지금까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명화가 있는가 하면 전혀 보지 못했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문득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인상주의니 전체적인 구도가 어떠니 자연의 빛을 통한 느낌이 어쩌니 하는 말들은 늘 이 작품을 따라다니는 말이었지만 그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저 여인은 왜 옷을 벗고 있는 것일까? 화가는 왜 저 여인의 옷을 벗기고 그림을 그렸을까? 단순히 풀밭 위에서의 식사를 그리고 싶었다면 함께 있는 남자들처럼 잘 차려진 옷을 입고 있는게 오히려 훨씬 더 자연스러운 장면이 아니었을까? 뜬금없는 생각이 훅, 치고 들어왔던 그 때의 기억... 그처럼 하나의 작품은 보는 사람마다 느낌을 달리 한다. 제 아무리 멋진 말로 소개를 하고 제 아무리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해도 마음으로까지 공감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터다. 가난한 사람을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그저 서민들의 삶을 담은 그림이라해서 세속화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종교가 대중을 구원해주지 못하고 대중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림들이 저자가 의도한 바를 담고 있을까? 잘은 모르겠다. 학창시절의 미술시간이 생각난다. ㅇㅇ주의, △△주의, ㅁㅁ주의, XX파, ++파... △△주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성행했으며 ㅁㅁ파에는 어떠 어떠한 화가가 있었다... 미술선생님의 열정적인 강의가 그저 열심히 외워야 할 시험범위에 불과했었던 것처럼 이 책속에도 그런 미술사의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되어진 그림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 하나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역시 딱딱하기는 매 한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몰입은 힘겨워진다. 개인적으로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해야한다는 말에 공감하는 까닭인지 모르겠으나 그 와중에 정의평화위원회라는 말이 자꾸만 겹쳐진다. 종교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간혹 '무제'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그림을 보게 된다. 그렇게 어떤 틀에 갇히지 않은 그림이 보기 수월할 때도 있다. 오롯이 나만의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했던 저자의 말이 한동안 시선을 끌었다. 가늠할 수 없는 내일 앞에 꼼짝없이 갇힌 지금의 모두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형태와 이름의 초안을 포기할 용기, 그리고 늘 새롭고도 가장 오래된 궁극의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의 모든 형태와 이름의 초안을 포기할 용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찌되었든, 장황한 미술사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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