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이후의 삶 - 지속가능한 삶과 환경을 위한 '대안적 소비'에 관하여
케이트 소퍼 지음, 안종희 옮김 / 한문화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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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를 보다가 '수륙양용차'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다. 길이 막혀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배를 띄워 수상교통수단과 병행하겠다는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가만히 놔둬도 오염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리는 또다른 한강의 기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번에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어두운 한강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문제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파악하여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노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근원적인 문제해결보다 당장 그것을 덮어두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런 행태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니 또 시작이군, 하면서 혀를 차게 된다. 모든 것을 서울에만 치중시키는 각종 행정편의적인 행태부터 뜯어고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절하게 나누어 행정을 본다면 지방도 살고 주택문제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일이다. 겉모습만 그럴싸한 도시보다는 살아 숨쉬는,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도시가 서울이라면 정말 좋겠다.


이 책은 지속가능한 삶과 환경을 위한 '대안적 소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시장중심의 산업주의와 소비주의의 늪에 빠진 현대인들은 좀 더 빠르게, 좀 더 편리하게만을 외치며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이익에 눈이 먼 선진국이나 거대기업이 그 시장의 중심에 있는 까닭이다. 소비문화 측면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대상은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하며 많고 화려하다.(-39쪽) 모든 것이 너무나도 흔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물질적 부의 생산은 삶의 풍요한 목적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고, 간주해서도 안된다.(-23쪽) '위장 친환경'이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 얼마전 뉴스를 통해 알게 된 '보온병'의 가면은 아마도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었기를 바란다. 적게는 서너개에서 많게는 열댓개까지 소유하고 있다는 보온병이나 텀블러는 하나를 15년 정도를 써야만 친환경 제품이 된다는 그 기사는 정말 놀라웠다. 더불어 친환경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끝도 없이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기업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했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비자가 더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소비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진정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이 진정으로 필요해서라기보다 새로 나왔다거나 혹은 어떤 이슈와 접목시켜 특별하다고 부각시키는 기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소비자의 마음이 문제라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소비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많아지고 흔해진 세상에서 과연 내가 지금 취하고자하는 즐거움이 얼만큼의 무게와 크기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진정으로 지구환경과 기후변화를 염려한다면 이제는 과도한 소비를 멈출 때다.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소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과도한 소비는 경제대국과 거대기업만을 배부르게 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척, 우리의 패션을 책임져 주는 척, 우리의 만족감을 채워주기 위해 그렇다고 말하면서 소비패턴을 빠르게 바꿔 나가는 건 기업이다. 왜냐하면 소비를 부추킬수록 자신들에게 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노동자의 값싼 노동력과 환경파괴라는 무서운 과정을 숨기고 있다. 그것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자본가가 주도하는 과학기술과 산업화의 관점에서 제시된 진보 개념을 아무런 이의 제기없이 더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또한 지속 불가능한 환경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게 좋은 삶의 모델로 간주되어서도 안된다. 이제는 덜 기술 중심적이고 덜 성장 지향적인 조직이 더 발전된 복지 기준과 복지 제공 방법을 제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45쪽) "결론적으로 우리의 문명을 지구가 감당할 수 있게 하려면 부유한 국가들부터 먼저 경제 성장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58쪽) 낙관주의자들은 "기술이 환경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143쪽) 이 모든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대안적 쾌락주의'라는 말은 덜 쫓기고, 덜 탐욕적인 생활 방식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사회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좋은 삶은 어떤 것인가. 과연 그런 모든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은 만족감에 뿌듯해할까? 그렇다면 그 만족감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질까? 만약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다. 아마 상상도 하기 싫을 것이다. 쓰레기 수거장에 가보면 한번도 입지 않은 옷이나 봉지도 뜯지 않은 식품가공류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주제를 다룬 다큐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쌓이고 쌓여 불태워지거나 매립된다. 그것은 곧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주 원인으로 자리잡는다. 문득 코로나로 중국의 공장들이 멈추었을 때 우리가 볼 수 있었던 파란 하늘이 떠오른다. 그렇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조만간 마스크를 일상화하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할 운명이었다. 멍때리기 대회를 일부러 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사회적인 기준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또는 노골적인 비민주적 태도와 행동에 대해 비판하듯이, 낭비와 오염을 유발하는 방식의 개인적 소비를 비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238쪽), 던 저자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최악의 환경 남용을 바로잡고, 고삐 풀린 지구온난화를 통제하고, 착취와 불평등(각 국가와 세계적 차원 모두에서)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더 부유한 사회는 덜 팽창적이고 더 재생 가능한 물질적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유한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질 (식품, 가전제품, 가구, 의류, 장난감, 스포츠 및 여가 용품등)을 공급하는데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소비재 물품을 덜 혁신하거나 계속 바꾸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더 많은 여가시간과 문화와 오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재생 가능한 물질문화는 화려한 상품을 더 적게 공급하겠지만 상품의 내구성은 더 증가되고 구조적인 노후화는 감소시켜 폐기물을 줄이는 혜택을 누릴 것이다.(-12쪽) 그렇게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5일제 근무를 하고, 주4일제 근무를 한다고해서 사람들에게 여가시간과 문화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탄소중립을 선언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선진국들의 뻔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은 자신들이 싸놓은 똥을 개발도상국에게 치우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소비자인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환경파괴와 기온변화는 점점 빨라질 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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