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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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간 괜찮나? 하고 물었을 때, '천산산맥의 야크 방목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양 때 방목 사이의 유사점과 지구온난화에 따른 대비책 및 생산성 증대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해서' 안된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 남자 '행운동'은 누군가 시간이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성질 꽤나 까탈스럽겠다는 느낌이 팍 온다. 하지만 의외로 '행운동'은 정의파다. 나보다 못한 이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없는 시간 쪼개서 남의 이야기도 들어준다. 물론 그럴 필요성이 있을 때뿐이지만.

'행운동'의 직업은 택배기사다. 집도 없이 택배사 옆의 컨테이너에서 산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붙여준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별로 말도 없고 주변상황에 전혀 개의치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살아갈 뿐이다. 그의 이름이 '행운동'인 것은 그가 택배를 하는 지역이 행운동인 까닭이다. 택배라는 직업을 낱낱이 해부한 것처럼 보이는 책속의 세상은 왠지 쓸쓸하다. 택배를 하고 있는 '행운동'도, 그가 배달하는 물건을 받는 행운동 주민들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문득 문득 다가오던 주민들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가 않다. 모두가 삶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멍한 눈길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시간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고도 없이.

“내 경우에는 바닥을 두 번 느꼈어. ‘이러다가 죽겠다’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하나 더 있더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너도 다 큰 어른이니까 눈물 따위는 흘리지는 않을 거야.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몸이 울어. 정말이지 몸이 울어. 하지만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저 놈의 택배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걸 느낄 사이가 없다는 거야. 시간이 꽤 지나서 일에 익숙해지면 아, 그때 내 몸이 울고 있었구나 싶지. 그러니까 별로 걱정할 건 없어.”(-151쪽) 신기한것은 그 남자 '행운동'의 이력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를 가늠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갑'과 '을'의 갑질이 아니라 '병'이 '정'에게 하는 갑질을 못견뎌하는 그를 보면서, 때로는 부조리함에 맞서는 그를 보면서 알 수 없는 통쾌감이 이는 것은 또 왜일까? 뉴스를 통해 신종노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상당히 기분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대항하는 '행운동'의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기시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만큼 현실감이 있다는 말일터이고, 그만큼 몰입감이 크다는 말일 터다. 재미있기는 한데 왠지 서글퍼지고, 웃음이 나긴 하는데 왠지 슬픈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세계문학상 최종심까지 올라갔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은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에게 혹은 사회에게 할퀴고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금 껄끄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이 꽤나 많았다. 작가가 꽤 많은 책과 음악을 접했었다는 걸, 지금까지 힘든 삶의 여정을 걸어왔을거라는 걸 책을 통해 짐작하게 된다. 마치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실감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어서. 피식거리며 웃다가 문득 가슴 한켠에 바람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 이 책이 그렇다. /아이비생각

사회는 집념, 포기하지 않는 노력, 뭐 그런 걸 강요하지만 글쎄요, 제 생각엔 희망이란 게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뿐인 것 같아요. 그럴 땐 포기하면 편하죠. 정말 그래야 할 일은 살면서 한두 가지정도인 것 같아요. 대개의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니까요.(-189쪽)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날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않겠습니까?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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