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황교익 지음 / 지식너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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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전체 먹을거리로 보면 100% 자급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에너지 기준으로 보면 현재의 자급률은 40%대이다. 외국에서 먹을거리를 안 가져오면 60%의 한국인은 굵어 죽어야 한다. 농업 빈국이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는 유기농은 생산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한반도에서 유기농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하며 비윤리적일 수 있다.(-58쪽) 비타민이니 미네랄을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이 떠든다. 대중이 원하는 딱 그 수준의 말을 해야 지위와 명예, 돈을 얻는다는 것을 '배웠다는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1쪽)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나게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40%대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외국에서 먹을거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열명중 여섯명이 굶어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나라의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버려지는 식생활의 형태는 계속될 것이다. 게다가 작금의 현대인들은 왜 그리도 건강식품에 연연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TV만 켜면 나오는 수많은 홈쇼핑에서 무엇이 어디에 좋다고 하면 즉시 마트에 그 식품이 깔리고 너도나도 그것을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해도 자신에게 맞아야 한다. 그러나 지속성이란 명제가 자동으로 따라온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게 잠깐 머물다가는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버리고 이내 또다른 건강식품이 홈쇼핑 채널의 화면을 다시 채운다. 유기농도 그렇다.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과연 제대로 된 유기농이 가능하기는 할까? 늘 그런 생각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속이 다 후련해진다. 누군가는 입바른 소리를 해야하는 까닭이다. 무엇이 되었든 즐겁고 맛있게 먹으면 그게 보약이다. 그게 내 지론이다. 남들은 100년이상이 걸려 이루었다는 산업화를 우리는 30년만에 이루어 한강의 기적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작금의 우리 삶의 형태는 뭔가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너무나도 많다.

육류업체들은 한국인의 삼겹살 선호를 앞으로도 계속 부추길 것이다. 한국인이 삼겹살에 이미 입맛을 깊이 들인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마진 좋은 수입 삼겹살로 돈을 벌 기회가 육류업체들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넉넉하게 주어지는 음식을 맛있다고 여기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넉넉함의 기준은 자본이 결정하게 되어 있다. (-83쪽) 육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부아가 치미는 말이다. 우리가 삼겹살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좋은 부위는 수출하고 그들이 가져가지 않는 맛없는 부위를 국내에서 소비해야 했기때문이었다는 것은.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나을텐테 우리가 먹어치우는 삼겹살이 부족해서 다른 나라에서 수입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니 저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익을 앞에두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사회라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맛없는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 쌈이 필요했고, 그 삼겹살은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부대찌개나 내장탕의 유래와 다르지 않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편집된 기억을 두고 개인의 것은 추억이라 하고 집단의 것은 역사라고 한다. 추억이나 역사란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현재 우리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게끔 과거의 일을 가져와 스토리를 붙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56쪽) 인간의 뇌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편집된다. 그리고 한번 믿은 것은 웬만해서는 바꾸려들지 않는다는 우리의 뇌처럼 속이기 쉬운 건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것이 '스토리텔링'이라는 옷을 입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완료되어 가던 때, 농부들이 도시로 와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현대적인 삶에 지친 그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워했고 이에 맞춰 언론은 거기에 맞춘 프로그램과 기사를 내 보냈다. 그 욕구가 과해져서 음식 역사의 조작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영광 법성포 굴비, 강릉 초당두부, 의령의 망개떡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굴비란 '등이 굽은 조기'라는 뜻이다.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매달면 구부러지게 되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구비조기라고 하였다는 말이다. 한국전쟁 후 전쟁통에 남자를 잃은 집안의 여자들이 호구지책으로 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초당두부의 시작이다. 그런데 왜 나는 당시의 사대부가 두부만드는 일을 했다는 말을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그 발상부터가 무리였던 이야기를 바보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니! 망개떡의 시작은 일본의 카시와모찌였다. 일제강점기에 이 떡이 우리 땅에 들어왔고, 그 흔적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향토음식의 유래와 역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조작되었다. 서글픈 것은 그 조작의 주체가 중앙 또는 지방의 정부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향토음식은 1980년대 '개발품'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우리의 역사마져 조작된다는 사실이다. 관료주의적 형태가 작금의 우리에게 얼마나 맞지않는 옷인지를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거짓은 진짜인듯 보여지게 포장되어져 당당하게 우리앞에 선다. 정부의 힘을 믿고. 학창시절에 혼분식장려가 있었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도시락의 쌀밥 위에 살짝 보리밥을 얹어 쌀밥을 가리곤 했었는데 선생님은 그걸 또 헤집어 잡아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너도나도 가난했던 시대의 일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밥그릇의 크기를 정부에서 규정하고 그것을 어기면 행정적인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국민의 밥량을 줄여서라도 쌀 자급률을 늘리고자 했던 정부의 모양새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해서라도 뭔가 이룩했다는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슬픈 역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변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임진왜란 후 도망갔던 관료층들에 의해 허울뿐인 제사의례가 생겨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차림이 나오게 된 것은 길게는 가정의례준칙 같은 게 나온 일제강점기이고, 짧게는 한국전쟁 이후 가정생활백과나 가례집 등이 보급되면서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사실 저자의 말처럼 유교사회에서는 양반이외의 사람들은 조상에게 예를 올릴 수 없었다. 상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조선중기에 군역을 피하기 위해 족보를 샀거나, 구한말 신분제도가 사라지면서 모두 양반이라 주장하게 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남을 따라하던 의례가 점점 구체화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사의례가 되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도 정부에서 명절상차림에 드는 비용을 이야기하며 알게모르게 국민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에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책의 말미에 이런 글이 보인다. 다 읽었으면 이 책은 되도록 멀리 두라고. 괜히 읽었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했을거라고. 그러나 단언컨대 누군가는 쓴소리도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항상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살 수는 없다. 항상 보고싶은 것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지적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저자의 말과 달리 한국인이기에 도움이 된 내용이 많았다고 얘기하고 싶다. 저자를 알게 된 것은 '알쓸신잡'이라는 TV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꾸밈없이 이야기하던 저자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어 손을 내민 책이었지만 시원하게 속풀이를 한 듯한 느낌이 든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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