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서커스 - 2,000년을 견뎌낸 로마 유산의 증언
나카가와 요시타카 지음, 임해성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나카가와 요시타카는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토목공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세계적 교각으로 평가받는 세토대교등의 설계및 시공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고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역사학의 시각이 아닌 토목건축학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하면서 로마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그의 저서로 고대 고마 번영사를 3부작으로 엮은 <수도로 보는 고대 로마 번영사>, <도로로 보는 고대 로마 번영사>, <오락과 휴식으로 보는 고대 로마 번영사>가 있다. 이 책은 그 세권의 책을 한권으로 묶은 게 아닌가 싶다. 옮긴이의 말을 빌면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된 원서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국에서의 출판을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라 하는데 고대 로마의 문명이나 로마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토록 세심하게 관찰하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게 쉽진 않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이나 토목건축학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정도는 흥미를 끌지 모르겠지만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어 살짝 지루한 맛도 없지않았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검투사 경기는 상당히 자극적인 장면으로 기억되어진다. 죽음을 각오한 전차 경주의 스피드와 검투사의 잔혹한 경기 장면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화속에서 우리는 위정자들의 간악함을 볼 수가 있다. <빵과 서커스>라는 책의 제목은 빵은 식량이요, 서커스는 오락을 뜻한다. 당시의 위정자들이 시민들을 위해 내밀 수 있었던 최선의 조치이기도 했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왕정으로 시작했다. 공화정과 제정을 거쳐 오현제 시대를 겪다가 나중에는 동서로 분열돼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먼저 멸망했다. 오현제 시대에 현재의 유럽연합 영토보다 더 큰 영토를 갖고 있었다. 제국시대만으로도 500년을 지속했다는 로마는 세계유산으로 남겨진 유물, 유적이 1052건이 된다고 한다. 약 2000년의 세월을 버텨냈다는 말인데 그만큼 로마는 인류문명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주자였다. 그토록이나 풍성한 문화를 가졌던 로마의 멸망이 지금까지도 역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라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한다. <빵과 서커스>는 고대 로마의 시인 유웨날리스가 오락을 일삼던 대중을 풍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로마의 흥망성쇠가 담겨있는 말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튼튼한 성곽도시에서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 싸인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았다. 로마가 번성할 때는 100만명의 사람들이 사는 초과밀 도시였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모여살게 되면 아무래도 불평불만이 쌓이게 된다. 그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내세운 방침이 눈길을 끌었다. 첫째, 화재의 위험에 대비해 석조건물을 지을 것. 둘째, 도시내 교통 혼잡을 없애기 위해 상하수도를 지하화 할 것. 셋째, 고층 주택과 포장도로로 효율성을 높일 것. 넷째, 폐쇄된 공간인만큼 오락거리를 제공할 것. 다섯째, 고도의 건축기술(석재나 콘크리트)로 성곽을 만들 것..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고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에도 현재의 우리 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 로마의 주민들은 이민족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저항하기 보다는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그랬던 것일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랬기 때문에 먼 훗날의 우리가 그 시대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앞에 언급한 다섯가지의 방침만 보더라도 당시의 문화가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당시의 수도교는 견고했다. 그만큼 상수도 시설이 잘 되어있기도 했다. 수도사용료는 기본적으로 무료였지만 개인주택으로 수도관 시설을 끌어들였을 경우에는 사용료를 받기도 했다. 일반 시민들을 위해 도로변에 공동수도를 마련하기도 했고 말이나 가축을 위한 음수장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하수도 시설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상하수도의 처리가 용이했던 고층주택의 1층은 임대료가 높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고층에 살았다. 그들은 폐수와 분뇨를 항아리를 이용해 지하배수로에서 처리해야 했는데 법으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창 밖으로 투기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스운 생각이겠지만 하이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살풋 웃음이 나기도 한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웬 똥벼락이람! 어찌되었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로마의 영토가 분할되면서 기술의 전승이 끊기게 되고 로마의 수도 기술은 사라졌다.

 

그 많던 오락과 휴식시설은 결국 기독교 사상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공공욕장도 나체조각상도 기독교가 힘을 얻게 되자 자취를 감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문화는 어찌되었을까? 만신전에서 유일신신전으로 바뀌었으며 종교건축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네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큰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마침내 313년 공인을 받게 되고 이후 수많은 교회와 성당이 세워졌다. 이탈리아, 터키, 아르메니아, 이집트등..... 전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는 로마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세계유산으로 1052건이나 남아 있다고 하니. 빵과 서커스에서 서커스에 해당하는 오락의 형태로 투기장, 극장, 전차 경주장이 있었다. 휴식시설로는 공공욕장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이 정치가들의 인기몰이에 이용되었다는 것은 주목해 볼 만 하다. 상당히 저렴했던 휴식시설의 이용료조차 부족분은 모두 국가가 부담할 정도였으니. 로마가 검투사 경기를 중시한 까닭조차 시민에 대한 통치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정리가 될 것 같다. 고대 로마에는 수많은 철학자와 작가 그리고 기술자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상관없이 좋은 문화라면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세상에 전파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많은 국가와 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실용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콘크리트를 발견했으며 로마법에서 서양법률을 가져왔다. 로마의학의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등도 그들의 말 라틴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기록을 토대로 지금의 우리가 반복된 역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愚問을 하게 된다. 만약 로마가 망하지 않고 지속되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愚問은 항상 잘나갔던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시작하는 듯 하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