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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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 그 이름만큼이나 열린 집안이었을 거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물론 집안의 가풍도 한몫을 했겠지만 당사자의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대단했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여동생을 위해 오빠는 당대의 문인에게 그녀를 맡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자랐던 집안과는 다른 가풍을 가진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그녀의 재능은 시어머니와 남편에게는 시기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녀의 기에 눌린 남편은 바깥으로만 돌게 된다. 그러던 중 친정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자신의 처지를 어찌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병마가 찾아온다. 그리하여 그녀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다.

 

마틸드라는 여자가 있었다. 예쁘고 매력적이었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또 가난한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한다. 어느날 남편이 내밀었던 초대장으로 인해 그녀는 지난한 삶을 살게 된다. 무도회에 가고 싶어 남편이 모아 두었던 돈으로 옷을 사고 거기에 걸맞는 보석(다이아몬드 목걸이)을 빌려 파티장으로 간다.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 잃어버린 목걸이를 사기 위해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빚에 허덕이게 된다. 세월이 지나 자신이 빌렸던 목걸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모파상의 <목걸이>다.

 

'여자'라는 주제를 앞세워 얘기하라고 하면 나는 위에 언급한 두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죽은 뒤에야 동생에 의해 당대의 문인소리를 듣게 된 허난설헌의 안타까움도 그렇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채 10년이라는 세월을 힘겹게 보내야 했던 마틸드의 삶도 그렇고 왜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만약 허초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마틸드라는 여자가 자존심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그녀들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형의 집>을 탈출하게 되는 노라를 응원할 수 밖에 없다. 여기 이 책도 그런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늘 어떤 형식에 꿰맞추듯 살아가는 소설속의 여인들을 불러냈다. 그저 시대적인 흐름이 그랬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좀 아쉬운 점이 많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책속 그녀들의 삶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일단 언급하고 있는 책이 너무 많다. <여자의 일생>, <보봐리 부인>,<목로주점>,<골짜기의 백합>, <적과 흙>, <마농 레스코>, <소녀 파데트>,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주홍글씨>, <작은 아씨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캐롤> 등 무려 57편이나 된다. 그 중에서 일본작가의 작품이 21편이나 된다. 그 많은 책을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책속의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 짓밟히거나 현실과 타협하거나 자신의 꿈을 향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이 책은 지독히도 주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책을 읽지 못했다면 작가와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게 쉽지 않을 듯 하다. '고전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는 말 책의 제목 아래에 보인다. 말 그대로다. 그러니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다면 이 책과 마주해도 나쁘지는 않겠다. 단, 당신도 어느 정도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수다만 고스란히 들어줘야 할테니까. 덕분에 한번 더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더 늘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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