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롭게 쓸데없게 - 츤데레 작가의 본격 추억 보정 에세이
임성순 지음 / 행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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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다. 정말 그런 때가 있었다. 작가는 그걸 추억팔이라고 했다. 추억을 글로 써서 책으로 냈으니 결국 추억팔이라는 말일 터다. 그럼에도 나에게만큼은 썩 괜찮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가끔 되새김질하던 그 때의 기억을 작가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팔았던 탓이다. 어렸을 때 자주 보았던 만화를 떠올려보니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옛 것에 사람들이 심취되는 듯 하다. 뭐 그렇다고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옛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겨우 몇 십년 전의 이야기들이다. 머리가 네모지게 생겼던 녀석의 말썽을 그렸지만 그 노래만큼이나 다시 생각해보면 웃지못할 우리의 이야기였던 <검정고무신>은 지금 보아도 웃음이 절로 난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나는 이미 테레비 앞에 앉아 <은하철도 999>를 보고 있었다. 구석기시대 사람처럼 생겼던 귀여운 포비를 보기 위해 <미래소년 코난>을 즐겨보았고, 유난히 무서웠던 만화 <요괴인간>도, <황금박쥐>나 <우주소년 아톰>도 엄청 재미있게 봤다.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Z> 보다는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없던 힘도 생겨나는 <짱가>나 <전자인간 337>을 더 좋아했고, 돔의 천정이 열리며 날아오르는 <태권V>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캔디>를 보겠다며 동생녀석과 매번 싸우기도 했었다.

 

그 때는 또 TV보다 라디오가 훨씬 더 인기 있었다. 동양방송의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울다가 웃다가 했던 많은 밤.. 여자성우로는 송도영이 단연 톱이었고, 배한성과 양지운이 당시의 인기 성우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눕시다 명랑하게 일년은 삼백육십오일 ♬ 이 노래로 시작하던 아차부인 재치부인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들었었는데... <밤을 잊은 그대에게>나 <별이 빛나는 밤에>,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와 같은 음악프로의 인기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노래를 듣고 싶다고 정성스럽게 엽서를 보냈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오죽했으면 예쁜 엽서 전시회까지 열었을까?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ist thing, 조앤 글래스콕의 The Centaur 는 지금도 좋아하는 노래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느낌은 여전하다. 사이먼&가펑클의 노래를 들으며 감상에 젖었던 때가 엊그제 같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많은 극장들. 대한극장이 아마 안경쓰고 보는 영화를 맨처음 시도했을 것이다. 스카라극장, 명보극장, 국보극장, 서울극장, 허리우드극장... 단성사와 피카디리는 피맛골이 사라지면서 색이 바랬다. 종로의 추억을 책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장소들이 사라졌다는 건 우리의 문화가, 우리 삶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말도 될 것이다. 지금이나 되니 그나마 지나간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마치 문화의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어느 한 단면만으로 문화의 흐름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여러방면으로 추억을 팔고 있는 걸 보면 시대의 흐름이나 변천사가 느껴진다. 임성순이란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막힘없이 읽혔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할 말은 하고 본다,는 식의 문장들이 꽤나 이채롭게 다가온다. 보통은 책날개에 저자의 약력을 쓰는데 그 작은 지면에서조차 너무 솔직해서 탈, 인듯한 말이 보여 피식 웃고 말았다. - 내가 책을 구매하는 데 저자 약력이 영향을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왜 이곳에 저자 약력을 적는지 잘 모르겠다. 뭐, 사실 나도 그렇다. 책을 구매할 때 저자의 약력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도 작가처럼 특별하게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 작가는 없다. 노래가 좋고 극의 흐름이 좋고 글이 좋을 뿐이다. - 이 글은 대체로 무해하다. 그리고 이런 글들이 그렇듯 대체로 별 쓸모도 없다. 그럼에도 나름 재미는 있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몸에 좋지 않은 게 맛있고, 쓸데없는 게 재밌다. 뭐, 그렇다고해서 그렇게까지 쓸데없는 건 아닌 듯 하다. 그리고 당신의 말처럼 재미있다. 지나간 것이라고해서 모두 재미있는 건 아니다.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잉여롭게와 쓸데없게라는 말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잉여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까닭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로써는 작가의 추억을 살 수 있어 잠시나마 즐거웠다.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면 삶이 편해진다. 낙관, 자기 계발, 외향성의 신봉자들은 이런 삶이 향상성 없는 실패한 삶이라 말한다. 그리고 늘 성공을 외친다. 그러나 더 나은 것을 하려는 동기가 꼭 성공하기 위한 욕망일 필요는 없다. (-227쪽)

취향만으로 한 인간을 정의할 수는 없다. 취향을 끌고와 타인의 감수성을 재단하는 것은 취향의 수용소로 그들을 쫒아냈던 오지라퍼들과 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는 문화적 파시즘일 뿐이다. 쓸데없는 것들의 훌륭한 점 중 하나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 예술적 수준과 미학적 완성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반드시 더 뛰어난 것을 택할 이유도, 그것을 택했다고 해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정식을 싫어하고 국밥을 좋아한다고 해서 더 못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238쪽)

이런 글의 정석이라면 여기서 이 유배자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말을 하나쯤 해야겠지만, 그냥 끝낼 것이다. 섣부른 위로조차 오지랖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239쪽)

그냥 그렇게 끝내주어서 내심 감사했다. 저런 글을 썼다고해서 꼰대기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오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적어도 지금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시대에는 말이다. 작가는 1976년생으로 2010년 소설<컨설턴트>로 세계문학상을 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작품으로는 <극해>,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근영은 위험해> 등이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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