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지나간다 - 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 이야기
구효서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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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히다. 말의 유희로 한바탕 놀고 난 듯한 느낌이다. 된소리 스물네 개로 만들어낸 스물네 개의 이야기에 피식거리며 웃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코끝이 찡한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아팠던 시절이었음이 분명한데도 슬쩍 웃어 넘겨버리고마는 그런 시대가. 그 아픔을 다 이야기하자면 어쩌면 삼백예순날 하고도 5일이 더 걸릴지 모르니까. 뻘, 깨, 빡, 뻥, 깡, 씨, 꿀, 쓰, 빵, 달, 깽, 찍, 땡, 뺨, 쓱, 꽃, 때, 쎄, 떼, 빡, 뼈, 뿌, 떡, 끝... 이 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를 나열해보는 것은 그 소리들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어서다. 어느 정도는 짐작했던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어쩌면 그리도 찰지고 맛나던지. 전기를 증기, 김치를 금치, 김을 짐이라고 하는 강화도 창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음미해보고 싶은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소리가 아니다. "계속되던 것이 아주 갑자기 그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이다. 소리가 아닌 모양이라지 않은가. 모양. 그런데 그걸 글로 적자니 소리가 되고 만다. 그것도 아주 된소리. 뚝. 그러고보니 '하늘'도 아무 소리 없는데 글로 적으니 하늘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거 자꾸 재미있어진다. 무엇이든 종이에 글로 적으면 소리가 된다는 게 그렇다. 글은 말이고 말은 소리구나. 그러니까 모든 글은 소리. (-143,144쪽)  말 그대로 소리가 된 글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상당히 독특한 문장체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글에는 은유적 글이 있는가하면 미사여구 하나없이 있는 그대로의 말로 전해지는 글이 있다. 이 책에는 아름답게 꾸미고자 한 마음이 전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글로 소리낼 뿐. 뻘은 그대로 뻘이고, 깡은 그대로 깡이며 깽은 그대로 깽이다. 단지 그 말들이 1인칭 화자가 되어 그 때 그시절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쑥쑥 빠져드는 뻘에서 게를 잡는 사람들, 늦은 하교길에 80명이 죽었다던 새기재에서 무서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어린 효서에게 달려가고 싶어하는 깡, 달밤에 하릴없이 짓는다고 멋적은 주인에게 얻어맞은 개가 깽, 하고 소리를 낸다. 그 자리에서 떠날 수 없어서 많은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던 꽃이 전해주는 새기재 이야기, 목 매달고 죽은 사람들이 길게 내밀었던 쎄는 '쎄가 빠진다'고 할 때의 '쎄'로 그 의미가 혀라는 것, 만신 할미의 굿이 끝나기만 바라며 목을 길게 빼고 있던 동네아이들에게 키 큰 아저씨들이 나눠주던 시루안의 떡, 밀고 밀리던 전쟁통에 한마을에 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에 의해 죽어갔던 사람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알고 있던 뼈, 다같이 어수선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었음에도 공연스레 아이들의 '뺨'을 때리던 선생들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가 나이를 말할 때 종종 거론되는 58년 개띠가 있다. 1958년생. 개띠. 그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강화도의 창말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이야기이기도 하고 작가의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58년 개띠는 전후세대다. 베이비붐세대다.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교육적으로는 '뺑뺑이'를 맨처음 시작한 세대이고, 7080의 통키타 문화를 만들어낸 세대이기도 하다. 10·26사건과 12·12사태를 거쳐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제5공화국을 무너뜨리며 6월항쟁을 쟁취했던 세대가 바로 그들이며 IMF로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직장을 떠나야만 했던 힘겨웠던 세대가 또한 그들이다. 반공과 방첩을 주제로 웅변대회를 했으며, 송충이를 잡거나 쥐꼬리를 잘라 학교에 제출해야 했던 아이들. 머리에 이가 있거나 뱃속의 회충과 싸우던 아이들. '콩나물시루'같았던 교실에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공부했던 아이들. 그리고 양 어깨에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짊어져야만 하는 세대다. 낀세대, 그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그들이 올 해로 회갑이라고 한다. 만만치않은 노후를 또다시 견뎌내야 할 세대로 자리잡을 것이다. 

 

2016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2년에 걸쳐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스물네 편의 글들을 모은 책이라는 말이 보인다.  연재 당시 된소리 홑글자들이 화자로 등장하는 독특한 내용과 형식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바 있다는데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하게 된다. 1957년 9월에 태어난 닭띠인데도 1958년 9월에 출생신고를 해서 58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는 작가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때는 다 그랬다고 한다. 홍역이다 뭐다해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많아 1년동안 잘 살아내면 그 때서야 출생신고를 했다고.  '빵'도 말하고 '쓱'도 말해서 제 글이 살짝 애니미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도 같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또 어떻게 그 시절을 떠올릴까 싶네요.(-354쪽) 작가의 말이다. 그 시절은 그만큼 힘겨웠다는 말일게다. 삶은 하나의 경험이고, 추억이고, 기억이다. 그 하나의 경험과 추억이 하나의 문화를 만들고 그 하나의 기억이 한 시대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내 언니와 오빠들의 헛헛한 삶을 들여다 본 것 같아 공연스레 안스러움과 미안함이 느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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