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구판절판


질식할 듯 화창한 봄날이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마른 풀씨가 풀풀 날리고 바람이 스쳐가는 머리칼에도 드러낸 팔뚝에도, 깃폭처럼 늘어진 빨래에도 묻는 그대로 꽃으로 피어날 것 같은 봄날, 담 밖을 지나가는 도부장수 아낙네의 기침 소리는 꽃가루처럼 지분처럼 날리고 막연한 예감으로 공기 속에 뒤섞이는 것이었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마루에 길게 누웠다. 문틀에 걸친 발등으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옆집 지붕의 물매가 역시 유연하게 하늘의 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감정의 표백 상태, 어떠한 느낌도 생각도 완벽하게 잃어버린, 단지 한 장의 흰 종이가 머릿속에 막처럼 펼쳐지는 상태의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햇빛 때문이었다.
─「봄날」-122쪽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 여섯 달째로 접어든 아이를, 더러운 종양을 제거하는 기분으로 용감하게 지워버렸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도 나는 여섯 달짜리 태아의 망령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성 간질이었다. 생활의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결코 없었으나 보다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마치 비오기 전의 류머티즘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얇은 고무질의 피막을 벗기듯 일상의 표면을 한 꺼풀만 들치면 그 속에서 배태되고 자라는 새끼를 친 욕망과 회한의 기억들이 진득한 거품으로 부글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봄날」-124-125쪽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몸 전체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넓게 팔을 벌렸다가 힘차게 밀어올리는 동작들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잔인했어. 단애에 서 있는 듯한, 곧 무너져내릴 듯한 정교함이었어. 기교가 더할 수 없이 섬세해지고 완벽해지면 그것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이미 상징성밖에는 드러내지 않게 되지. 공을 치는 그애의 모습은 철망에 부딪히는 공의 이켠에서 튀어오르는 다른 한 개의 공처럼, 혹은 빛의 한 순간처럼 번득거릴 따름이었어.
그것은 바로 그애 나이 때의 내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아 있었는지 몰라. 자신의 체력과 기교가 절정기에 도달해 있음을, 더 이상 공이 완벽하게 맞는 일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들던 절망감으로 나는 자살을 생각했었지. 죽음의 의식(義識)은 너무도 투명해서 한치의 빗나감도 용서치를 않지. 그 무렵 나는 꼭 절벽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라켓을 휘두름으로써 내 속에서 돋아나는 그 어찔어찔한 허무감을 죽이고 또 죽였어.
─「관계」-149-150쪽

당신이 쉬엄쉬엄 올라가는 언덕길가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가 휘어질 듯 달린 잎들은 은백양 나뭇잎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부딪치면 캐스터네츠의 우림처럼 쟁강쟁강 맑은 소리를 내었다. 언덕길은 희게 부풀어 솜을 깔아놓은 듯 보였다. 나는 숨이 가빠왔다. 언덕은 그리 가파르지도 않고 당신은 서두르는 품도 없이 걸어 올라가는데 나는 당신을 따라가기가 무척 어렵다. 구름 속을 걷는다면 이럴까, 다리가 무거워져서 걸음을 떼놓기가 힘이 든다. 나는 큰 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저 좀 보세요. 저 좀 보세요. 당신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이 더불더불한 뒤통수만 보여주며 올라간다. 나뭇잎들이 와아와아 흔들린다. 당신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저 좀 보세요오. 입에 두 손을 대고 길게 부르다가 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려버린다. 쏘는 듯 강렬한 빛에 눈이 시었다. 손박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벌려진 손가락 새로 언덕을 살핀다. 햇빛은 어디에나 만연해 있다. -192쪽

(이어서) 나는 플라타너스 같기도 하고 은백양 같기도 한, 잎을 휘도록 달고 있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것은 햇빛에 부딪혀 쟁강거리는 잎새로 가지마다 열매를 은폐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를 좀더 넓히고 반짝이는 잎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아,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무성한 잎 사이로 얼핏얼핏 내뵈는 것은 풍작의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린 남근(男根)이었다.
─「직녀」--쪽

어머니와 관련된 최초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익사의 공포에서 비롯됐다. 유년 시절 어머니와 갔던 바다에서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젠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없다는, 그녀의 자궁에서 떨어져나온 이래 가장 확실히 분리되었음을 막연한 느낌으로 자각하여 얼마나 외로웠던가. 어머니와 나를 갈라놓았던 수천 수만의 물결, 인처럼 묻어나던 번득거림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절대적인 힘으로 나를 떠밀어 내가 물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끌어올려진 후에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에 십자가를 쥐고 타계했을 때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나는 그녀와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친화력이 생겨 있었다. …(중략)… 그러나 밤바다 거듭되는 그와의 끈질긴 싸움 끝에 어느 날 문득 최초로 잉태의 기미를 손끝으로 느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서 완벽하게 떨어져나온 격렬한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174-175쪽

(이어서) 나는 내 속에 또 다른 하나의 알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아이를 죽여버리기로 작정한 순간 나는 이미 두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본 듯하였다. 나는 그 일을 조용히 은밀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치러진 것이어서 오히려 어머니가 이러한 것을 제물로서 기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아할 정도였다.─「번제」--쪽

목 안의 양쪽 편도가 걷잡을 수 없이 부어오르는 느낌에 잠을 깨었다. 눈을 뜨는 순간 거대한 분홍빛의 봉오리 대신 다가드는 어둠에 나는 고통의 형태나 강도에 앞서 당황스레 고통의 기억만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그다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막사의 딱딱한 목침대 위에서도, 때때로 나는 셔츠깃이 바짝바짝 조이는 느낌에, 혹은 저고리 소매의 솔기가 우드득 뜯어지는 소리에 눈을 뜨곤 한다.
한밤중인데도 창의 격자 무늬가 또렷이 나타나는 건 달빛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씩 어두워지는 건 달을 가리는 구름 탓이라고 짐짓 확인한다. 강상을 뒤지는 밤낚시꾼들의 칸델라 불빛의 흔들림이 번득번득 이곳까지 미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도사리고 있는 건 뜨락 가득한, 어둠, 어둠뿐이고 나는 차차 통증이 되살아남을 감각한다. 꿈속에서의 고통이, 또는 후드득 후드득 실밥 터지는 소리의 불안이 흡사 의식의 솔기가 터지는 소리인 듯 느껴져오고 막막한 절망으로 실감되어오는 것이다.─「走者」-221-222쪽

그의 흰 손, 거기서 비롯한 끈끈한 기억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밖의 어둠이 두텁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폐에 가득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 번, 다시 한 번, 다시, 다시. 그러나 공기는 조금도 신선하지 않았다. 어둠을 들이마신 듯, 다시 그것은 폐 속에서 응고하는 듯했다.─「走者」-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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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거실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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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2010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 우수상 수상작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배수아의 〈무종〉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밀도높은 언어와 감각으로 채운 문장들을 구사할 수 있는지, 황홀한 기분으로 그녀의 문장들을 읽었다. 그래서 《북쪽 거실》을 구입해 읽게 되었다. 한유주의 《달로》와 비슷하면서도 또다른 느낌.  

이 작품에서 서사는 거의 파괴된 듯 보인다. 서사가 진행될 여지가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곧바로 다른 인물의 시점이나 다른 시공으로 뛰어넘거나 자유 연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나가는 식이다. 물론 수니가 정체불명의 수용소에 자발적으로 갇혔다가 7년이 지나 옛 애인 희태에게 돌아왔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는 내용이 있긴 한데 별 중요한 의미는 없어 보인다.  

몽환적으로 온갖 감각적 심상들을 극대화시키는 시적 언어들이 밀도 높게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문장, 문장, 문장들. 보통 소설을 읽으면 서사에 집중하므로 문장이 상실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문장에 집중해서 읽게 된다. 그리하여 페이지를 넘겨가며 시를 노래하듯 입 속으로 언어를 굴려가며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라 있었고,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이 영원하길, 그 마지막 문장을 다 읽어 내려간 순간 이 작품을 덮고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사실이 아련하고 슬피 느껴질 정도로 탐욕스럽게 문장을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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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거실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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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과 같은 대학원생들이 있다. 부모에게서 돈을 받아 비교적 큰 불편 없이 학구적 생활을 이어가는 아카데미커 계층. 그녀들은 사랑에 빠지더라도 함께 살기는 꺼려한다. 남자와 동거를 한다면 돈을 대주는 부모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략) 린은 미숙하지만 독립적이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한 독립의 요령들로 반짝거렸다. 린과 같은 부류의 대학원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모와의 관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자신의 내면을 짓누르는 큰 골칫거리이고, 하지만 독립을 원하면 원할수록 현재의 복종이 더욱 필수적이라는 점, 특히 자신의 계층은 부모 세대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보수적이고 엄격하지만 파렴치하지는 않고, 교육받은 지성인인 데다가 돈까지 갖고 있으므로─부모는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자식들은 그 세계를 산다, 등등. 그들에게 필요에 의한 복종은 더 이상 혁명의 대척점이 아니다. -56-57쪽

누군가 혼자서 책 읽는 소리, 그러한 연습의 소리, 무대에서 들려오는 낭송극의 속삭임, 무대 특유의 울림과 음향 자체에 불과한 인상을 주는, 무형의 속삭임, 하나의 속삭임 위로 다른 하나의 속삭임이 중첩되고, 그렇게 하나씩 무한히 쌓여가는 불특정한 속삭임의 파도치는 덩어리들, 거대한 물살의 소리, 노래, 연설, 외침, 절규, 함성, 고함, 기도, 비명, 구호, 아우성, 저주, 고백, 구애, 탄식, 애원, 호소, 울음, 신음, 설교, 낭독, 독백, 고해, 지시, 명령, 설명, 선동, 웅변, 합창, 그리고 선언으로 이루어진, 동시적인 다언어 음악, 단 하나뿐인 목소리의 수많은 발자국들, 그 위를 걸어가는 무거운 나의 몸들, 아직,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한 번도 읽혀지지 않은, 그런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로, 가고 싶다고 했다. 무거운 몸, 잘려나간 발가락, 튀어나온 눈동자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시곗바늘, 환상곡, 물방울, 눈물, 타이핑, 향수 뿌리기, 전화벨, 책 펼쳐들기, 입맞춤, 팥, 좌절하여 문 앞에서 멈추어 서기, 잠, 아침, 종소리, 그리고 작별, 울림을 만드는 것들. 모든 종류의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들. 모든 종류의 목소리를 갖는 일과 사물들.-104쪽

(이어서) 나는 그것들과도 작별한 걸까. 수니는 귀를 기울인다. 나는 밤이면 부엉이가 되어야 해. 그리고 일단 부엉이가 되면, 내게는 항상 커다란 귀와 밤뿐이지. 귀는 텅 빈채 조용하고 밤은 울림으로 가득하다. 모든 떨림이 저마다 다른 파장을 갖는, 무한한 파장들의 비연속적인 밤. 희태는 그런 밤 수니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다. 어두운 밤의 분수, 흰 물줄기가 외롭게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오직 물의 내부만을 비추는 어딘가로부터의 빛. 그토록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빛.-104-105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사실적 존재 방식은 여전히 내 관심의 대상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환상하는 방식이 곧 나의 실재, 내 세상의 실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나는 오직 환상을 사랑하고, 그것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 시간이 흘러 나이와 이성이 나를 침범하여 나를 현실의 인간으로 만들어놓을지라도, 나는 지금의 이 환상과 헤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하고 린이 다시 물었다. 만일 네가 네 환상을 기록한다면,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네가 꿈으로 꾸는 묘사 불가능한 것들을 기록한다면, 그런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네 언어를 만들어낸다면, 하루하루 네 꿈을 기록한 노트를 당나귀처럼 어디든 짊어지고 다닌다면, 너는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들과 안과 겉처럼 다를 수가 있지. 네 환상은 네가 기록하는 만큼 성장하고 우거질 것이며, 그래서 너만이 산책할 수 있는 검은 숲을 이루게 될 것야. 오, 나는 바란다. 네가 숲이 무엇인지 알기를…… 언젠가는 숲이 무엇인지, 그 속을 산책한다는 게 인간의 어떤 상태를 말하-118-119쪽

는 것인지 알게 되기를 가슴속 깊이 바란다…… 그때가 되면 너는 지금의 내 말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네 환상은 네가 기록하는 만큼의 육체를 갖게 되며, 네가 기록하는 만큼의 고유한 현실성을 얻게 된단다. 환상이야말로 여섯번째 감각의 실체인 셈이지. 눈을 감고 상상해보아라. 안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흰 나무들을, 그들의 시적인 흰 몸들을, 검은 흙과 찬란하게 너울대는 저 세계의 빛을. 무의식 속에서만 살고 있는 꿈은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나, 그런 꿈을 꾼 다음, 정체불명의 매혹적인 우수와 생각에 잠긴 무거움이 네 피부 아래로 파고 들어가 너의 내부에서 폭풍우 치며, 너를 근본부터 바꾸어놓을 테지. 그러면 너는 꿈의 성분으로 다시 태어나며, 네 안에서는 환상 나무가 자라날 거야. 주저 없이 가거라. 그토록 오랫동안 아무도 이름을 모르고 있었던 꿈속의 정원 파라다이스로. -119-120쪽

사실, 대개는 드러내서 말하기를 꺼리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외모’라는 것이 있다. 겨울이나 쇼윈도 앞을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응시하게 되는 말 없는 존재, 육신 말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 얼마만큼의 연관이 있으며 그 연관은 또한 얼마만큼이나 필연적일까, 우리는 간혹 궁금하다. 단순히 순수한 호기심에서 남자는 거울 속에 비친 수니의 외모를 관찰한다. 외모들은 대개 그 소유자보다는 심술궂으며, 엄격한 인상을 주고,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은 언어 습관상 자신들이 스스로의 외모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우리의 외모가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수니의 외모에는 어떤 종류의 독특한 자세가 들어 있다. 얼핏 건조한 행동가 같은 차림새지만 실제로는 셔츠의 깃 모양이나 단순한 형태의 목걸이 등을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으로 선택했을 것만 같다. 담배를 들고 있는 손가락의 모양이나 얼굴 표정의 남다름은 물론이고. 어색하고 고집 센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 그런 외모는 사진 찍힌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 사진이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긴 세월이 흐른 -208-209쪽

다음에도 외모의 장본인을 판단하는 우연한 척도가 될 수도 있음도 알고 있다. 외모는 그런 식으로 살아남아 자아의 일부가 된다.-209쪽

수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을 꾸었다. 악몽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악몽.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아, 모든 것은 꿈이었어, 하고 꺼질 듯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참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하얀 불빛들이 방 한가운데 흐릿한 형체로 둥실 떠 있다. 밤의 씨앗들이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환희로우며, 안도와 평화, 감사의 마음, 심지어 대상이 불분명한 격한 신앙심까지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른다. -237쪽

꿈을 꿀 때 우리의 정신은 활발한 반면, 근육은 움직이지 못하므로 꿈속에서 우리는 육체적으로 그토록 무력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꿈속에서 우리는 쫓기거나 느린 속도로 하늘을 날며 움직임에 대한 초조한 열망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물에 잠긴 것처럼 무겁고 힘겨운 육체를 감지할 뿐인 거죠. 반면에 꿈 자체의 육신은 어둡고 투명해요.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겹을 뚫고 꿈의 꿈속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답니다. 예를 들자면, 꿈속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아는 것들, 당신들이 해변으로 갈 것임을 알았어요, 하고 당신은 말했죠? 그 앎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런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현실에서는 알 수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들 말이에요. 그렇게 낯선 인식이 우리의 꿈으로 찾아오지요. 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며, 과연 우리가 누구의 의지로 그것을 만나게 되는지도 짐작하지 못해요. 우리는 단지 앞뒤 설명도 없이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단순히 그것을 알 뿐이죠.-239-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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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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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사람들이 이 작품집을 왜 그리도 극찬하는지 정말 잘 모르겠다. 윤대녕의 작품은 〈은어낚시통신〉 외에 읽어 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아 독서 후 느낀 기억을 억지로 쥐어짜내 보자면) 뭔가 초현실적인 몽롱한 분위기에 취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독서하며 분출되는 (현실에 기초한) 몽환적 감정의 소비를 왠지 기대하고 구입해서 읽었는데, 확실히 이 작품집을 〈은어낚시통신〉과 같은 분위기로 기대했다가는 낭패이다. 작품은 때로는 비루하고 건조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내게는 재미도 없고 별 감동도 없는 작품이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라고들 하는데 그 정도의 서정성은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여성 캐릭터들도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핍에 상처가 있어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대개 내연녀) vs 그런 이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고 결핍이란 찾아볼 수 없는 현실적 존재 (아내) 구도도 불편하고 찜찜하다. 아내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내연녀와의 관계를 심정적으로 정당화 시킨다는 기분? 뭐 여튼 죄다 이런 식으로 작가의 개인적 연애 판타지 코드가 묻어나는 신파적인 불륜 이야기 정도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신파성이 예술성으로 승화하는 지점을 읽어내는데 실패한 것인지 내 감수성이 보편적 감수성과 거리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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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읽은 책들
 
 
1.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문학동네
 
2.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온다 리쿠/북폴리오
 
3.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페터 회/마음산책
 
4. 도서실의 바다/온다 리쿠/북폴리오
 
5. 플라나리아/야마모토 후미오/창해
 
6.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엘리자베스 길버트/솟을북
 
7.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구희연·이은주/거름
 
8.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당대비평기획위원회/산책자
 
9. 얼음의 책/한유주/문학과 지성사
 
10. 알렙/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민음사
 
11. 섬/장 그르니에/민음사
 
12.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진은영/그린비
 
13.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진중권 외/한겨레출판
 
14. 위대한 유산/찰스 디킨스/혜원출판사
 
15.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예담
 
16. 야구 아는 여자/김정란/나무수
 
17. 1Q84 (BOOK 1 · BOOK 2)/무라카미 하루키/문학동네
 
18. 장송 1 · 2/히라노 게이치로/문학동네
 
19.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민음사
 
20. 월든/헨리 데이빗 소로우/이레 

 

권 수가 중요하진 않을 수도 있지만…… 해가 갈수록 읽은 책 수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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