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 개정판 환상문학전집 18
메리 셸리 지음, 이미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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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책임 회피에 대한 인간의 성찰

어느순간 고전문학, 세계명작에 재미에 빠졌다.
이유는 즉슨 고전문학, 세계명작들을 토대로 현대문학의 새로운 해석들과 그를 기반으로 모든소설들이 베이스를 이룬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고전 문학은 오래되서 식상한것이 아닌 그 시대의 인간을 바라보는 시점과,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그치만 고전문학을 비롯한 모든 소설이 현대소설의 미치는 막대한 영향은 바로 현대문학의 뿌리는 고전문학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내가 알고 있던 프랑켄슈타인이 아니였다. 많은 각색과, 어린이, 또는 대중의 눈에 맞추고 관심을 사로 잡으려다보니 상업적으로 변한 <프랑켄슈타인>인을 나는 접해왔던것이다.
아~어찌 프랑켄슈타인을 나는 나사밖힌 괴물로만 생각했을까? 프랑켄슈타인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 괴물을 만든 과학자
의 성명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프랑켄슈타인>을 접하게 된게 가장큰 나의 행운이라 생각할정도이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며 3가지가 가장 나에겐 와 닿는다.
우선 외모로 평가하지말것,
두번째 나에 대한 일에 책임을 질것,
세번째 인간의 욕망에만 끌려살지 말것

이 3가지를 생각하게 된것을 간단히 얘기하려 한다.
첫째 외모로 평가하지 말것
괴물은(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은 정확한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착한 성심이 기본적으로 묻어 나온다.
위에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만드는 조건중 가장 큰 요소로 작용되는것은 환경이다.
괴물은 자신의 솔직함과 인간애?를 얘기하고 인간이 가진 교양과 친절에 자신또한 감정을 교류하고 인간들과 함께 하길 꿈꾼다.
그러나 괴물이 앞에 서는 순간 그 수많은 착한 선함을 가진 사람도 흉측한 모습에 몇미터나 커보이는 괴물 앞에서는 고함을 지르거 심지어 기절을 한다.
괴물이 어떠한 사람인지 대화로 사람을 알아가는 단계를 지니다면 흉측한 외모덕에 괴물에게 대화는 인간들과 허용할수 없는 단점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은 그에게 어떠한 고민을 들어줄 의향을 선뜻 내보이는가 하며, 그를 돕겠다고 자청한다.
이후 가족이 들어 닥치면서 그의 계획은 선이 아닌 악으러 바꾸는데 결심을 하게된다.
(요기서 그 가족들은 가족들로 인해 괴물이 인간을 존중하게 되고, 성실한 가족들의 모습에 인간과 함께 교류하고 싶다는 인간애적인 모습을 담고있다. 그치만 그들조차 괴물을 흉측한 모습을 보는 순간 악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어쩌면 외모로 단순히 인간의 성찰을 분류하는 핵심적인 지적을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번째
나에 대한 책임을 질것이란,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을 자신의 과학적 욕망으로 그를 창조했지만, 그가 두려워 방치 아닌 방치를 하였다.
괴물은 자신의 인격에 기본이 되었던 가족의 배신을 받아,정에 굶주리고 사랑에 굶주려있다.
그 외로움이란 극심한 공포는 겪어본 사람만 알것이다.
나의 구원자, 즉 부모에게 앙탈을 부리듯 그는 자신과 교류할 또 다른 괴물을 요구하지만, 도덕적인 판단과 윤리적으로 괴물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치만 요기서 문제는 자신의 욕망에 휩싸여 어떠한 일을 성취하고자 할때 따르는 책임이다.
이 책임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을 경멸하고 멸시만 할뿐 몸소 실천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잊혀진다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거란 인간의 안일함이 더 큰 사태를 불러 일으킨다.

셋째 욕망에 휘둘려 끌려살지 말것!
이 또한 두번째랑 이유랑 연관된다.
욕망에 휩싸이다 보면 이성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 순간 인간의 선택 또한 무뎌진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선택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욕망은 그를 창조함과 동시에 시간이 지나서는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그를 파괴하는게 그의 욕망으로 바뀐다.
그러다 보니 창조와 동시에 괴물에 의해 자신이 이끌려 다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프랑켄 박사는 죽을때가 되서야 이것보다 행복한것이 없다고 월튼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얘기하길, 자신의 과학을 궁굼해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 궁금해 하지말길 바란다고 충고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은 갈수록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며 가장 강하게 느낀 3가지이다.
이 책은 내가 지극히 느낀 대표적인 3가지이며, 많은 해석과 토론이 가능하다.
위에 내가 책을 읽은 감상을 쓴것뿐이지 정답은 아니다.
정말 좋은 책을 보았고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통해 더욱 많은 토론을 해보고 싶다.

괴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개인의 양심을 따를것인가?
반대로 인류를 위해, 윤리와 도덕을 택할것인가의 문제다.
양심에 따른 가책으로 괴물에 제안을 받아 들인다면,
내 짐을 덜 수는 있지만 인륜적으로는 최악의 과학자로 남는다. 또한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
어렵다 어떤 선택이 맞는것인지...
개인의 책임을 위해서라면 전자가 맞지만 미래를 보자면 후자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순간에 무뎌져,
선택의 순간조차 놓치지 말아야 하며,
나의 책임에 충실히 해야만 하는 인간이다.

그치만 반대로 그 책임의 무게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개인을 위한 것인가? 단체 모두를 위한 것인가?의 차이지만
단점의 차이의 크기는 누군가 판단할 수 있어도,
당사자에게 그 크기는 동등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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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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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제목부터가 뭔가 강해 보였다.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던중 일본서점대상 1위라는 말에
흥미는 그닥 있지는 않았지만 구매하여 읽게 되었다.

<양과 강철의 숲>은 제목처럼 강한것이 아닌 피아노를 뜻하는 말이였다.
양가죽으로 둘러싸인 피아노의 해머와 강철로 둘러싼 피아노
를 뜻하는건 아닐까 생각한다.
조율사의 세계에서 피아노 조율늬 장인 같은 존재를 어쩌면 <양과 강철의 숲>을 걷는 사람이라고 야기할수도 있을것이다.

이책을 어떠한 큰 감동이나, 여운을 느끼고자 읽는다면 이책은 그닥 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중요한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계속 이야기한다.

도무라라는 주인공은 어느날 학교에 피아노 조율을 하러온
이타도리라는 피아노 조율사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피아노 조율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함에 있어 도무라는 한치의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면 자신의 확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내가 하고있는 일에 의심을 품는다.
이때 이길이 맞는지 자기자신을 고민하는데 어쩌면 시간을 몇일이나 할애할 것이다.
<양과 강철의 숲>에서 주인공 도무라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더 잘하기위해서 메모를하고 더 많은것을 느끼려 한다.

무척이나 인상적이였던 부분이 있다.
본문에서는 책이라서 이해 될수 있겠지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구간이 있다.
도무라는 조율사이지, 음악(베토벤,모짜르트의 교양곡)등을 굳이 들어야 할까?이다
왜 이부분이 이책에서 내가 감명 깊게 본 이유는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배우가 있다. 이배우는 연기를 잘하기위해
발성을 연습하고, 매일 연기연습을 한다.
또 다른 배우는 연기를 잘하기 위해 자신이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는다고 하자.
눈으로 보기엔 연기를 잘하기위해선 매일 연습하는 배우가 더 열심히 열성적으로 보일수 있지만 실은 감독을 해본 배우는 어떻게 하면 안되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깨닳는다.
그럼 누가 더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냐라고 말할때
감독을 해본 배우가 좋은 결과가 나올수 뿐이 없다.
왜냐면 다른눈으로 자신의 일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빠져나올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노력은 제한적, 기존틀에서만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히트앤런
<양과 강철의 숲>에서 이타도리씨가 도무라에게 한말이다.
홈런을 치려하지말고 한발한발 천천히...
도무라가 조율사가 되기로 결심한것처럼 인생은 어느 특별하지 않던 한순간으로 인생이 변한다.
또한 쌍둥이자매 가즈네와 유니,
유니는 피아노를 칠수 없게 되자 꿈을 포기하는것이 아닌
내가 좋아할수 있는 꿈을 다시 가지게된다.
바로 도무라처럼 말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조제 무리뉴가 생각났었다.
무리뉴는 축구선수 시절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무리뉴는 자신이 축구를 좋아하지만 포기할수 없었다.무리뉴에세는 경기를 분석할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그는 경기분석관을 거치며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지금의 명장 무리뉴는 그렇게 존재한다.

이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사람은 경쟁적이지도 않다.말그대로 즐기며 살기에 재능이 있는자들보다 행복하고
순간순간 감흥을 받는다.

당신이 어떠한 일을 한다면 히트앤런처럼 천천히 다가서면 되는 것이고 지금 하는일에 기준을두고 노력하지 말아야한다. 내가 전혀 상관없는 일을하더라도, 분명 같은 분야지만 조그다르다거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는것이다.

지금 하는일이 자신이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할 수 있다
내가 재능이 없다 한들 열심히 하며, 끝가지 붙들고 노력하고 있는것 또한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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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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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찰나
신간소설 부분에 문득보이던 책이<스파링>이다.

평소 복싱에 관심이 많아 복싱 관련영화와 관련된것들을 많이 찾아보았지만, 복싱에 관련한 소설은 대체로 찾기가 힘들었다.
*영화는 복싱관련 추천을 검색하면 나오지만 책은 검색이 힘들기에 소설은 많이 접하지 못했다.

<스파링>에 대한 소감을 말하자면, 너무 솔직하다.
솔직하기에 통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한 느낌이 들수도 있지만 불편함이 통쾌함으로 느껴질정도로 문장력이 속이 다 시원하다는 것이다.

우선 스파링이란 소설은 어찌보면 어디서 들어본듯한 이야기플롯,구조를 택하고 있다. 그치만 그게 최고의 무기로 마치
리뉴얼한 느낌이다.
항상 요즘 나오는 어떠한 소설 또한 모두가 고전에서 작가의 생각과, 현대의 시국에 변화되며 파생되온거라 생각한다.
모두가 멋을 부리고 멋진 문장력으로 얘기하고 스토리를 얘기할수 있지만 스파링은 어쩌면 수직표현 속임수 없는 가장 정직한 스트레이트로 승부본다.
가장 단순한것이 최고의 무기가 된것이다.
고수는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아니라,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온갖 부조리와, 권력이라는 이름앞에 어쩔수 없이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희망적으로 그린다면 <스파링>은 더 정직하게 말한다.
˝그래, 세상이 나를 증오할수뿐이 없다면, 그렇게 계속 바라볼꺼면, 더 좃같이 살아줄께, 너네 말대로 해줄께˝라고 스트레이트를 날려버린다.
<스파링>에서 주인공 장태주는 그가 왜 이세상에서 위악으로 살아야하고 왜 폭력적인 인물로 변해가는것인지, 또한 그란 관습이 왜 시대가 변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본질적인 질문을 한다.

<스파링>을 보면서 내가 느낀것을 말하자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세상이 스파링이고 아웃복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웃복서의 등장은 복싱계의 산업화, 즉 승점을 따내기 위한 전략적인 변칙복싱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점수만 따기위해 아웃복서 행위를 하는것은 아닌가?
이것이 <스파링>에서 말하는 핵심이다.
복싱에서 진짜는 인파이터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스포츠가 과학적으로 진화했어도 오히려 예전의 복싱만큼이나 재미가 반감되는건 인간이 과학으로도 매꿀수 없는 인간의 정신력과 본질을 해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책의 질문이다. 당신은 진짜은 진짜인가?
그 비유를 인파이터와 아웃파이터로 비유하며 묻는다.

권력,부조리,단체라는 타이틀을 가진 세계챔피언 앞에
우리는 묵묵히 수많은 쨉을 마져가며 살아간다.
수많은 쨉과 스트레이트를 맞으며 내가 할수 있는건 내가 주먹을 뻗을수 있는 사거리를 만들기 위해 한발한발 정직하게 전진해 나가야할뿐이다.
비록 큰 한방을 맞아 숨쉬기 어렵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기도하고, 가드를 내리고도 싶겠지만 변칙술을 쓰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가는 <스파링>속 인파이터의 모습이야말로 이시대의 우리 청춘과 사회인들이 아닐까?

오늘도 가드를 올리고, 묵묵히 전진해 나가자.
내 사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멋지게 한방 먹여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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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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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코타로의 단편집이라면 단편집이고, 잘 엮여 있는 징편소설이라하면 장편소설이라 할수있겠다.

우선 소설의 구성이 흥미롭다.
한편한편 독립적인 소설의 내용을 취하면서, 동시에 소설의 스토리 연결브릿지가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골든 슬럼버>를 읽고 작가의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꾸준히 기회가 된다면 구입해 읽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골든 슬럼버>에서 강조하는 ‘신뢰와 습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 말하며, <아이네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에서는 또 다른 것을 얘기한다.

바로 ‘만남‘이다
<아이네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란 원래 모자르트의 13번 세레나데이다. 이노래는 누구나 쉽게 따라할수 있는 선율로 구성되있고 다른듯 다르지 않은 노래를 엮어 논듯하지만
그만큼 누구나 쉽게 따라할수 있는 선율이기에 더욱 흥얼거리며 머리에 남는다.

이런이유에서 <아이네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는 누구나 특별한 영웅도 아니고, 인물도 아닌 평범한 누구나 할수있는 사랑을 일상에서 나누며 지낸다.
분명 드라마틱한 사랑이 있을수 있으니 대부분이 그럴것이다. 그치만 누구나 할수 있는 사랑의 이야기를 이사카코타로는 <아이네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통해 특별한 기적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사랑은 평범해 보일지 몰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남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또 다시 만나고, 그것이 결국엔 모두가 기적이라고 말하는듯 우리의 사랑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고 더욱 갚어치 있게 변화한다.
모짜르트의 13번 세레나데처럼 평범하고 쉬운 선율들이 1악장~4악장까지 합쳐졌을때 <아이네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처럼 우리의 평범한 사랑은 특별해지는것이다.

드라마틱한 사랑을 꿈꾸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그 드라마틱한 사랑 한가운데
‘당신이여서 다행이다‘라는 것이다.
당신이 있기에 좋은 시간을 사랑으로 보낼수 있고, 당신이기에 지금의 나의 주변에도 기적같은 만남들이 이루어지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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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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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욕망과 타락으로 물든 곳에서 희망과 이상을 꿈꾸며 정직하게 산다는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덕목이 아닌가?

위대한개츠비를 읽고 생각나는 것이다.
몇 일전 썼던 다른리뷰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을 꾸는것만큼 절망이 없다‘ 라고 썼던가?

희망과 이상을 꿈꾸며 정직하게 산다는 것과 전에 썻던 글을 본다면 모순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도대체 뭐 어쩌란 말이냐?‘ 왔다갔다하는 내 심리가 참 어처구니 없을 수 있지만 한가지 정리하고 넘어가려한다.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을 꾸는것만큼 절망이 없다‘
이말은 현실을 자각한 것을 얘기한다.
결과 어찌 될지 알지만서도, 어리석게도 자신의 아집으로 밀어붙이고 그렇게 믿고 싶은것이다.
반면 ‘욕망과 타락으로 물든 곳에서 희망과 이상을 꿈꾸며 정직하게 산다는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덕목이 아닌가?‘은 다른 뜻으로 풀이한다.
적어도 난 인간으로써 부끄럽지 않았고 정직하기에, 내 결정에 후회는 없다는 내포이다.
그러기에 난 희망과 꿈이 지금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수 있는 원동력이자 힘이다.

무엇을 꿈꾸고 이상을 바란다면, 분명 필요한것이 있다.
나만의 철학이고 휘둘리지 않는 나다운 정직함이 그 큰힘이 된다.

위대한 개츠비는 참 매력적이다.
이소설을 보면서 인간이란 겉으로만 잘꾸면진 인간인지,
내면으로 꾸며진 인간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에서 굳이 ‘아메리칸드림‘ 을 설명하진 않지만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개츠비‘와 유산을 물려받은 부자‘톰‘의 대립이 매우 흥미롭다.
또한 캐츠비의 저택에서 파티를 즐기러 초대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인물들인지 궁금증이 자아낸다.
인맥으로 성공을 꿈꾸고, 비지니스를 관계를 얻기위해 참석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무엇인가? 이득을 취할것을 얻으려는 자들로 가득하고, 모두가 겉에만 취중한다.
심지어 부도덕하고,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언행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따지고 드는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얘기하는것이 이닌 ‘교양‘ 또는 ‘격식‘을 지키기에 바쁘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모습들이 보인다.

가장 부유한 동부지역을 배경으로 얘기하지만, 이들의 삶은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멋진 삶들이지만 실은 그들의 삶들은 오히려 보다 못살지만 정직하게 살고있는 사람보다 불행해보이며, 타락해 보인다.
심지어 개츠비의 마지막을 함께한 친구들은 캐츠비의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닉과 아버지 또한 올빼미 아저씨?뿐이다. 결국 캐츠비에 화려한 겉모습에서 얻은 사람은 없고
진심으로 자신과 교류하고 솔직했던 닉과 가족뿐이 없었던 것이다.
*올빼미 아저씨는? 왜왔을까 궁금했지만 개인적으로 두가지로 추측해본다.
첫째 그는 캐츠비의 서재에서 만나볼수 없던 지식들을 배웠기에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말은 물질적인것이 아닌 내면으로 얻은것이기에 가능할수 있다는 생각
두번째 실제로 올빼미아저씨란 인물은 실제로 피츠제럴드의 절친을 모티브로 했다는 얘기가 있다.
캐츠비가 피츠제럴드의 곧 자신의 인물이라면, 가장 친한첸구 한명 없이 장례를 치룬다는게 서럽다라는 생각도 했기에 넣지 않았을까 한다??
*해석은 자유니깐 이유를 아신다면 저도 갈켜주세요ㅜㅜ
지극히 저의 과대해석일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쩔수 없이 타락함과 손잡아야 할 때가 분명 있을것이다. 캐츠비 또한 그렇다.
그치만 적어도 캐츠비는 타락함과 환상속에서 자신이 지켜야될 덕목을 지킨샘이고 닉은 부정직하게 살지 않았으며,
인간으로서 책임감과 도적성은 지키며 살았다.

캐츠비를 읽고 생각나는 말이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요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을 이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인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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