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불안하고 눈물만 그렁거렸다.

하루에 자는 시간은 물고기처럼 몇시간뿐이 전부였다.

점점 내 얼굴은 TV,만화에서나 나오는 곰팡이핀 사람처럼 다크서클이 전셋집 마련하듯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도 움직여야지만 했다.

내가 입대하는 순간 우리집은 어찌될지 장담을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지옥이였다. 차라리 죽는게 이것보단 편하겠지 하면서

나쁜생각을 행동으로 실천을 그사이에 했었다.

물론 그 여파는 어머니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로 남겨드렸다

입대날짜가 하루로 다가왔고 나는 여지껏 돈을 갚아 나간 것이

어느덧 잔고는 700만원이 되었고, 잔금 입금전 나는 100만원을 현찰로 빼놨다.


엄마는 내가 입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있다

생각해보면 속 썩였던 아들인데 나하나 없어지면 엄마가 더 편하겠지?

문제는 나는 생색을 잘내는 스타일의 남자다

그냥 군입대 들어간다는게 개인적으로 너무 억울했나보다.

그래도 얘기는 해야겠다 싶었지만 엄마 얼굴을 바라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평소에 쓰지도 않은 편지를 엄마에게 쓸려고하니 고민이 됬다.

‘존댓말로 써야될지, 반말로 써야될지’ 

여지껏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사용해본적 없는 아들이다

반말로 쓸려니 또 편지가 없어보이고, 존댓말로 쓰자니 오글거린다.


“에라이 모르겠다”


존댓말로 써버렸다. 편지를 접기전 돈 80만원을 편지봉투에 함께 넣었다.

실은 군대 입대를 한 것은 더 이상 돈을 갚는것에 지쳐 

도피하듯 간거나 다름없다. 그나마 떳떳하게 떠나려 그동안 일했는지 몰른다.

‘나쁜 놈은 되기 싫어서’

그렇게 난 지옥같은 빚청산을 매듭짖지 못하고 군대로 나름 도피라는 명분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참고로 20만원은 군입대하는데 그래도 돈은 가져가야될 것 같아서 내가 챙겼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입대통보 없이 엄마를 떠났다는것이 너무 미안한게 사실이다.


나머지 빚은 어떻게 됬냐고 궁금해 할 것이다.

엄마는 빚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 연채가 되었고, 

자대배치 이후 나를 찾는 전화가 부대로 왔다. 

'누구지?' 

전화를 받는순간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그전화는 다름 아닌 

군부대까지 전화를 걸어 나에게 돈을 갚으라는 독촉전화였다.

‘개새끼들 군대까지 전화로 독촉할줄은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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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전 이 얘기부터하는게 좋을듯하다.

이야기를 쓰기 앞서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

글의 맥락을 이야기해야될것을 사족을 얘기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글을씀으로써 어떻게 쉽게 얘기할수 있을지 나혼자 수련하기 위해서라고 하는게 좋을듯 싶다.

근데 왜 나의 20대에대해서 쓰냐 묻는다면?

내이야기를 써보자 했을때 나의 20대를 쓴다면 한사람뿐이 생각이 나질않는다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9년이이라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의 20대라 함은 곧 그녀였다.


*

이것은 내가 놓쳐버린 가장 똑똑하고 이쁜 여자에 대한 글이다.

왜 서론을 주제와 다르게 이야기하는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앞으로 얘기하겠지만 난 생색을 잘내는 편이다.

그만큼 힘들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이다.

다만 그이야기를 다 쓴다면 돈키호테급의 분량이 될것 같아서 참는다!

어차피 이글은 나혼자 보게될 글이지만...

그녀를 만난 것이 나에겐 그때 한줄의 비상구나 다름없기 때문이였다.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9년이이라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의 20대라 함은 곧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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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가장>


21살 이전에 나의 삶은 피폐했다.

어린나이에 사업해보겠다고 까불던 나 때문에 집안 형편은 기울어졌고,

집이 기울고 더 악화됬을쯤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가장이였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다시 원상복귀 시켜야되는 부담이 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때 이혼하셨고 미성년자인 나와 여동생을 보살필 사람은 어머니뿐이였다.

당시 어머니는 보험회사에 다니셨고 허리디스크를 숨기며 보험방문판매를 하셨는데, 

많이 아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한번의 내색없이 매일 출근하시다 종국엔 움직이지도 못할정도가 되셨다.

만일 어머니가 아프지만 안았다면 내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심도 지금 해본다.

 

빚을 갚기 위해 사는날 하루하루가 바빴고 3개의 일을 동시에 짊어져야만 하는 젊은 가장이였다.

당시 어린 나이지만 옷가게 나는 사장이였다.

(마지막 재산 300만원을 가지고 옷장사를 시작했다) 

말이 사장이지 다른 직원들과는 별다를것이 없는 볼품없는 일개 노동자였다. 

알바를 세워 놓고 오후엔 도시락배달을 했고 저녁엔 호스트바, 택시알바도 하였다. 

집에 빚은 2천만원정도였는데 당시 일수를 빌려 돌려 막기를 하면서 이자를 갚아나갔고

돈을 벌어봤자 당시 일수매꾸기에 바뻤던 나날들이였다.

그렇게 3년정도를 지내다 보니 나의 개인적인 시간과 삶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뎌져 버렸다. 

지금 다시말하자면 그런 생각해볼 시간도 없었다.

돈버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친구들을 보면 항상 부러웠다.

나도 놀고싶고 연애하고 싶지만 나에게는 그런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느덧 집의 빚은 이제 천만원 정도 남았다. 

‘이것만 갚으면 이젠 끝이구나!’

근데 나에게 예상치도 못한 한편의 우편이 날라왔다.

‘2005년 9월 1일 ㅇㅇ훈련소’ 입영통지서다

핸드폰을 열어 오늘날짜를 확인했다.


2005년 6월의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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