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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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소리없이 뭉텅 잘려나간다. 흔적, 그림자, 말이나 문장 대신 남겨진 단 하나의 희미하지만 분명한 형체. 과거는 기억의 울부짖음이 만들어내는 칵테일이다. 수많은 맛과 빛깔로 이루어진 날것들이 내는 목소리는 새롭다. 부딪고 겹치고 구르며 재배열되는 지난 날. 과거로 대변되는 상처, 후회, 회한에 포개지는 단상은, 당사자가 대상을 얼만큼의 밀도로 어떻게 회상하는지와 상관없이 비교적 비슷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다. 서로 다른 시간을 껴안지만 현재라는 좌표에서 덧없기는 매한가지다. 오늘을 사는 동시에 어제를 살고,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살지만 다가올 시간을 붙잡지 못하듯 지나간 시간을 멈출 수 없으며, 고행의 산행 혹은 안나푸르나의 봉우리에서 내려꽂힌 이의 마지막 눈동자처럼 희미하고 착잡하게 멍울지어질 뿐이다. 그래서 잊혀진 변두리 동네 카페는 차라리 죽은 자들, 잃어버린 자들의 안식처다. 과거의 상흔은 가족오락관의 스피드퀴즈처럼 빠르게 패스된다. 카페는 본성적으로 태만을 안고 있다. 거기서는 갈기갈기 찢겨 굴절되고 오목해진 일상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얼만큼 중요하든 상관없이 달겨든다. 찌질한 질투를 깊고 짠한 사랑으로 둔갑시키고 흔한 불륜을 달콤한 로맨스로 치장하는데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시간이다. 포근하고 달짝지근한 공기가 감도는 곳에서 독한 환멸 역시 농도가 약간은 더 옅어지지 않을까. 문하에게 산타 페의 카페는 <nowhere>이자 <everywhere>이다.

 

 사랑은 세상에 없다고 겸허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누천년에 걸쳐 퍼마시고 퍼마셔도 고갈하지 않은, 그 어마어마한 추상명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길이다. (p.192)

 

문하는 우연히 발견한 쓸쓸한 카페 주인 산타 페를 형이라 부른다. 말을 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산타 페는 인하 형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형이 가르쳐준 많은 것이 세상에 없는 형이 나(문하)의 하늘이자 땅이고, 지구이자 우주였음을 상기시킨다. 형은 곧 기다림이자 인내, 그리움이다. 기다림, 인내, 그리움은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대신 주어의 생략을 용인한다. 문하가 한 일은 차라리 고행이고 인내일 것이다. 동네 돌+아이로 취급받는 물귀신을 만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너는 세상이라는 틀에 갇혔고, 갇혀있는 세상 안에서만 자유로우라는 뜻에서 '갇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를 애증하며 사는 수인을 도서관에서 만나면서, 형을 본다. 정확히는 그 시절 형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무 늦었지만 더이상은 늦지 않도록. 책과 카페는 여유와 생이 혼합되고 압축된 노랫말이다. 하나는 반드시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한다. 그는 카페에서 비로소 객관적 방관자 입장으로 들어가면서 잃어버렸거나 지나온 시간을 회상한다. 회상은 이중으로 겹쳐지고 부서지며 인물, 사건, 시간의 경계를 지운다. 지금 문하 곁에는 형과 아버지, 산타 페와 물귀신 모두 부재상태다. 형과 아버지 그리고 물귀신은 산타 페와 달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한다. 아버지를 애증하는 배다른 형을 추억하며 가지는 죄의식, 형과 어머니가 서로를 향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편한 적대감, 부와 재물을 향해 질주하던 아버지의 죽음 같은 추상명사와 씨름하며 이미 일어난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건 쉽사리 망가진다.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라든가 신부처럼.

 하지만 슬픔은 영원히 아름답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픔을 아름다움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194)

 

추상명사는 탕진되지 않는다. 형과 아버지, 산타 페와 물귀신, 하연과 수인 역시 사랑과 죽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므로 병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을 돌이키는 데는 시간과 인내만 있으면 된다. 그(녀)와 이야기하면 가슴에 숨구멍이 솟아난다. 수줍음 위로 시간이라는 덫이 거듭 쌓인다. 누구와 무엇을 나누는 일이 매번 기적인 걸 몰랐을 때는 어떻게 견뎠을까. 약속, 기억, 목소리, 장소, 사람, 축제를 포함한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에 그 아니면 그녀가 있었다. 지금 기다리며 슬퍼하며 읊고 끄적이고 기뻐하며 아파하며 한껏 다가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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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3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3-04-1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은 작품 만나고 나니 다 읽기도 전에 자꾸 리뷰를 들여다보게 되네요. 리뷰 보다 책 읽다 또 리뷰 보다 책 읽다..이렇게 책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같아요. 이제 곧 퇴근인데 집에 가서는 맘껏! 읽어야겠어요. 아이리시스님과 겹치는 책이 한 권 더 늘었어요. 히힛. ^^

아이리시스님 리뷰는 진작에 봤는데
아리시스시님 리뷰는 리뷰가 아니라 한 편의 작품 같애요.


아이리시스 2013-04-18 18:08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이젠 이응준은 다 읽으셨겠어요, 제가 너무 늦어서 막막하고 은은한 감동마저 날아가버렸을지도.. 스물일곱에 썼댔잖아요. 글쓰는 이들은 이유도 없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스물일곱에 이런 생각들을 표출하려했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 자체보다는 어쨌든 대단해요. 뭔가 에피소드가 더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저도 달사르님에게 여쭤볼 것들이 있는데, 적절한 때를 찾아보겠어요..^^

아....기분좋은 칭찬이에요(울렁울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