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틈새라면집에 대한 에피소드, 사랑, 자긍심 등에 대한 그리고 2부는 소자본 창업에 대한 글이다. 저자의 사업관은 한마디로 '남들과 똑같으면 안 된다'. 무엇이든 달라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나름의 은어 (입걸레, 오리방석)도 만들어 내고 고객이 아니라 '주인이 왕'이라는 낙서도 해 두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성공의 비결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한 것일 것이다. 주인이 왕이라고 해서 손님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업에 대한 '자존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 자존심은 누구라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명예이기 때문이다. 틈새라면의 핵심역량 (Core competence)은 라면과 고추가루이다. 여기서 다른 음식이 파생되어 나온다. 그렇지만 메인디쉬는 빨계떡이다. 책은 재미있게 만들어졌다. 저자는 글보다는 말이 훨씬 뛰어날 것 같지만 글도 잘 썼다. '겁을 내는 것은 금물이다.' '홍보는 사람이다.' 저자의 생생한 산 경험이 나타난다. 이는 경영학 책에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니 현실경험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실제 창업에는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론만으로는 성공적인 창업자가 될 수 없다. 뛰면서 생각하면 성공이 다가올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하는 글이다. 역시나 답은 행동이다.
일본잡지에 간간이 쓴 영화평을 모았다. 전문적인 평은 아니고 단지 작가의 눈(그 중 반쯤은 평범한 생활인의 시각이지만)으로 영화를 본다. 글을 쓰는 데, 꿈을 꾸는데 인생에 활력소가 되어 준 영화. 저자 평생의 영화 이야기이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이야기이지만 평범하게 살아 온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여도 좋다. 아들과 이탈리아와 일본 그리고 영화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그녀 역시도 우리 주변의 생활인에 다름 아닌가 보다. '게리 쿠퍼'를 안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 감독이 죽는 걸 본다. 그러면서 자기도 나이가 들어간다. 삶이 자신이 본 '영화'로 이야기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람보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가. 재미있다? 아니면 미국 패권주의? 나나미는 아무도 몰라주는 베트남 귀향자의 고독을 본다. (이럴수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독립정신. 누가 뭐래도 상관없다는 배짱. 그런 당당함이 그녀를 로마인에게로 안내했다. 당찬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은 법이다.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다. <나는 천성이 낙관주의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고된 장군의 말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보면 이 책은 거의 '역사서'가 되어 버렸다. 당시에는 시의적절하였을 것이나 잡지에 실린 글을 2000년에 모아 출간 했으니 3년은 지나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탁월한 식견은 흠잡을 데가 없으며 그의 한국에 대한 조언(제4강의)은 고맙기까지 하다. 그는 한국경제를 '엔화환율경제'로 폄하하는 태도를 오래전부터 견지해 왔으며 이 책에서는 종합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일본식 시스템을 너무 빨리 포기하였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 이야기는 없다. 룩 이스트(Look east, 정확하게는 일본)라는 동방 정책을 구사하는 말레이시아의 독재자 마하티르에게는 계속 호감을 보이지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반감(혹은 가르치려고만 하는 태도)을 보인다. 그가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하지만 결국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과학에는 학문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나 학문자에게는 국경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한국의 대안으로 미국이 아니라 일본을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닷컴을 키우자'는 뜻으로 기획 된 거로 보인다. 그러면 그들은 일본은 '미국'을 따라갈테니 한국은 '일본'을 따라 오라는 말 밖에 안 된다.) 국제인으로 자처하는 저자라도 일본의 불황에 너무 시달려 일본 민족을 위하여 우익이 되기로 하였나 보다.마지막 장 일본의 국가원수 문제는 일본적 관심사인데 왜 책에 편집되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번역상의 실수로 보이지만 시멘스가 아니고 지멘스이며 루터가 아니라 라우터이다.
원제가 사랑에 대한 에세이이다. 소설로 읽지 않아도 좋다. 끊임없이 머리로 사랑을 이해하려는 주인공의 진술이 전부이다. 플롯은 고사하고 스토리 자체도 아주 식상하다. 스토리는 저자의 사랑론에 대한 예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라. 사랑이란 왔다가 가는 것이다. 주인공이 사랑을 잃고 (배신에 의해 잃어버렸다는 게 더 큰 상처이지만) 죽음까지 생각하지만 결국 다른 사랑을 만난다. 사랑은 삶처럼 유한하다. 현재 사랑을 진행중인 자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안은 없으나 사랑에 관한 여러 진실들이 있으니 사랑에 관한 실용서로 충분하다. 사랑의 '과정'에 관한 철학적 이해가 글의 주제이다. 서양적 사랑관을 전제로 하고 읽을 일이다. 이 책은 육체적 결합 후에 본격적으로 사랑이 시작되지만 아직까지 한국정서에 그런 관계는 사랑의 완성을 뜻할 뿐이다.배신의 감정을 '예수'를 통해 풀고, 아름다움은 설득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으로 풀어낸다. 이런 식으로 대중의 평범한 감정을 추출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한다. 재미있는 기획이다. 또한 이렇게 저렇게 하여야 한다는 식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제각기 제 뜻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결국 '사랑은 분석적 정신의 결함을 가르쳐 주었다' 고 진술하며 사랑은 정의하기 힘들었던 그 무언가로 다시 환원된다. 주인공은 새로운 사랑을 하며 다시 사랑을 곱씹을 것이다. 사랑은 피할 수 없다.
책 후기 대담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런 소설은 작가만이 그만의 상상력으로 써낼수 있는 것이다. 영화같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흡입력이 대단하다. 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어렵지 않게 책 두 권을 한자리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그런 능력일 것이다. 신작 '뇌'와 이야기의 구조, 주인공이 같다. 일단 죽음으로 스토리가 발단되고 과학적 지식으로 함부로 추론되고 결국에는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되고 죽음은 결국 자살로 밝혀지는 등이 그것이다. 베르베르는 탁월한 대중소설가이다. 대중의 호기심을 적절하게 자극한다. 그의 천재성이니 아니니 하는 논박은 그의 소설 속에서는 전혀 개의할 필요가 없다.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와 성서이야기를 과학적으로 풀어보기 위하여 아담, 이브, 카인,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자 특유의 중첩되는 이야기이다. 스토리가 한 선에서 만날 듯했지만 부담스럽고 충격적인 결말을 회피하여 버렸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완결된 결론은 없다. 우리가 미싱링크일 수도 있다는 뤼크레스의 말처럼 완전한 인간이 언젠가는 나타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재미있지만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잘 정돈되어 있다.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문제는 현재의 복제아기 논쟁에 근거하여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그 해답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도 솔직한 사실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과학적인 치밀한 논증이 전제되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언젠가는 해답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