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노암 촘스키
이 설득력 있는 책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참담한 교훈은 냉전이 종식되자 사실상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이 책 저자들의 절제된 표현을 인용하자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살’이란 용어가 사용되는 빈도도 늘어났고 무분별하게 사용되다보니 이 용어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었던 20세기의 범죄행위의 의미가 평가절하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들은 이 용어가 요즘 사용되고 있는 사례는 나치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기억에 대한 모욕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지식계의 문화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쉽게 근절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장 명백한 학살의 사례를 두고서 가해자들이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의미를 축소하여 전달하거나 심지어 수혜자들이 회고하면서 사실자체를 부인하는 일이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제국주의적 정복의 가장 사악한 형태인 개척식민주의의 역사가 분명한 증거를 보여준다. 북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개척한 영국 식민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않았다.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신생 아메리카합중국의 초대 전쟁성 장관이었던 헨리 녹스(Henry Knox) 장군은 “멕시코와 페루의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사용했던 것보다 더 파괴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합중국의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에서 모든 인디언들을 완벽하게 근절한 일”은 결코 작은 공적이 아니라고 기술했다.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대통령은 만년에 가서 “우리가 무자비하고 야비한 속임수로 근절하고 있는 불운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운명은 “이 나라가 저지른 극악한 죄 가운데 하나이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으로 믿는다”고 시인했다.
그런데 현대의 평자들은 달리 생각한다. 냉전시대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가디스(John Lewis Gaddis)는 애덤스 대통령이야말로 “확장이 국가안보의 길”이라는 부시 독트린의 기초를 마련한 위대한 전략가라고 추앙한다. 가디스는 그럴듯한 말로 이 독트린이야말로 “유년기의 제국”(조지 워싱턴은 신생 공화국을 이렇게 불렀다)이 전체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적용해야했던 노선이라고 칭송한다. 가디스는 애덤스가 이러한 노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극악한 죄”를 짓는데 공헌한 피비린내 나는 역할과, 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켜 플로리다를 정복한 행위를 자위권의 행사란 거짓논리로 정당화한 유명한 연두교서를 발표한 사실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 학살의 역사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학자 윌리엄 얼 윅스(William Earl Weeks)는 인디언과 도망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살육과 약탈행위의 전람회”에 관한 섬뜩한 사례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플로리다 정복은 애덤스 대통령이 “동남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제거하거나 근절시키기 위해” 만든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진보적 지성지인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의 2009년 6월 11일자에서 정치분석가 러셀 베이커(Russel Baker)는 “영웅사관”을 추종하는 역사학자 에드먼드 모건(Edmond Morgan)의 저작에서 찾아낸 오류를 언급하고 있다. 모건의 기술에 따르면, 콜럼부스와 초기의 탐험가들은 “광대한 대륙에 농경과 수렵을 영위하는 희소한 인구가 거주하고 있음을 알아냈다....열대 밀림지역으로부터 북쪽의 얼어붙은 지역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누구도 손대지 않은 광대한 대륙의 주민은 백만을 겨우 넘을 것 같았다.” 이런 계산은 수천만 명의 주민이 있었던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또한 그 “광대함” 속에는 발전한 문명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모건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학살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부인”은 별로 주목할 가치가 없다. 그것은 별난 일도 아니고 어쩌면 선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1)
허먼과 페터슨은 제국주의적 정복의 역사를 연구하는 동안 또 하나의 명제를 찾아냈다. 그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유엔 대사인 수전 라이스(Susan Rice)가 말한 “대량의 죽음에 직면한 무고한 민간인들을 ‘보호해야할 책임’을 인정하는 최근에 형성된 국제적 규범”이다. 그런데 이 규범은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다른 명분을 동원할 수 없을 때 폭력적 수단의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국주의가 만들어 내서 일관되게 적용해왔던 고상한 규범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상하게도 원주민들에게 만약 너희들이 “전체 세계의 지고의 존재이자 통치자로서 교회의 지위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비와 사랑으로서 너희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아울러 우리는 너희와 너희의 아내, 자식들 그리고 너희의 토지를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며” 나아가 “여러 가지 특권과 면제로 보상해줄 것이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혜택을 줄 것”이라는 약속을 했는데, 이것은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보호해야할 책임을 다 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러나 보호 받는 쪽에서도 이행해야할 의무가 있었으니 스페인의 인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엄격한 권고를 했다. “만약 너희들이 [이와 같은 너희들의 의무를 이행]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희의 나라에 무력으로 쳐들어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또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생명과 재산상의 손실은 너희들의 책임이며 우리의 지도자들이나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우리와 함께 온 기병이 책임져야할 일이 아님을 선포한다.” 그런데 이 말은 이슬람 과격단체에서 서방 이교도들을 향해 경고하는 예언적이면서도 인도주의적인 발언과 같은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이러한 요구 조건을 훗날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 그대로 되풀이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미합중국은 최소한 자국 내에서는 “언덕 위의 도시”, 또는 로널드 레이건의 표현을 따른다면 “빛나는 언덕 위의 도시”라는 찬양을 받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조프리 호지슨(Geoffrey Hodgson)은 미합중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나라 가운데 하나, 그것도 불완전한 나라”라고 묘사했다가 2009년 4월에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하는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Roger Cohen)으로부터 훈계를 들었다. 코언의 훈계에 따르면 호지슨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태어난 나라”이며 미국인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영적인 개념”인 “언덕 위의 도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국제관계 연구 분야에서 냉철한 현실주의학파를 창시한 저명한 학자인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가 “미국의 목표”를 논하는 글에서 표현한 바를 인용하자면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유감스러운 실수일 뿐이며 그 때문에 미국이 갖고 있는 “초월적인 목표”의 근본적인 고상함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스페인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자들도 라이스가 제시한 “최근에 형성된 인도주의적 규범”을 따랐다. 영혼을 울리는 “언덕 위의 도시”란 용어는 1630년에 존 윈스롭(John Winthrop)이 “신이 점지한” 신생국의 영광된 미래를 설명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다. 이보다 한 해 전에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영국 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고 매사추세츠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제정했다. 문장에는 인디언이 평화의 표시로 창끝을 아래로 향한 체 식민자들에게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특허장은 주민의 개종-가혹한 이교도의 운명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는 일-이 “식민지의 주요 목표”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국 식민자들도 원주민을 근절하고 배척하는 것이 인도주의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원주민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한 세기 전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두 번째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백인 선교사들에게 “지난 4세기 동안 백인혈통, 또는 유럽인혈통이 확장되면서.....이 혈통이 확장된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영속적인 혜택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필리핀인, 그리고 그 밖의 수혜자들이 처한 상황은 그와는 반대였다.
학살이란 개념의 통속적 정치화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최근에 형성된 국제규범”은 탈냉전시대의 산물인 것 같다. 냉전시대에 동원되었던 개입의 표준적인 명분은 제거되었지만 냉전시대에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개입의 제도적 이념적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허먼과 페터슨이 밝혀내고 있는 바와 같이, “북반구 백인 강대국이 그들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유색인들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 가운데서 ‘국제정의’라는 기준이 지켜진 적이 한 번도 없듯이 이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무리 터무니없는 행위일지라도 범죄의 희생자들에게는 ‘보호할 책임’이라든가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한다’는 고상한 원칙이 적용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론은 60년 전에 이미 내려져 있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949년 코르푸 해협 사건을 다루면서 재판관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내놓았다: “무력정책의 표현으로서 이른 바 개입권이라는 것은 과거에 매우 심각한 남용의 사례가 많으므로, 국제기구가 어떤 결함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국제법으로서 인정될 수는 없고....본질적으로 [개입은] 가장 강력한 국가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정의의 집행 자체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제법 전문가인 리처드 포크(Richard Falk)는 개입이란 미시시피 강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둘 다가 북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흐른다.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이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호책임”이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자 이를 논의하기 위해 2004년에 UN이 소집한 고위 패널에서도 매우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패널은 NATO군이 세르비아를 폭격할 때 내세웠던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의 ‘권리’”를 부정한 남미국가 정상회의의 견해를 인용하여 이 논리를 배척했다. UN 패널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이 있을 때만 무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UN헌장의 정신을 상기시켰고 헌장 51조에 따르더라도 무장공격을 받은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만 방어를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헌장 51조는 다니엘 웹스터의 고전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행동의 필요성이 즉각적이고 압도적일 때, 다른 수단이 없을 때, 숙고할 시간이 없을 때” 무력의 사용을 인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패널은 “헌장 51조는 오래 동안 적용되어온 범위를 확대하거나 축소할 필요가 없으며....개정하거나 재해석되어서도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아가 패널은 “이런 반응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답변은 잠재적인 위협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전지구적 질서와 그 질서의 바탕이 되는 불개입의 규범을 지키는 것이 집단적으로 승인된 행동과는 대비되는 일방적인 예방행위의 합법성보다는 훨씬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주는 것과 같다.”
서방 세력의 권리를 모두에게 인정해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통령 조 바이든(Joe Biden)이 (2009년 7월 6일) 이스라엘은 이란을 공격할 수 있는 “주권”을 갖고 있으며 워싱턴은 “다른 주권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지시할 권한이 없으므로” (미국의 장비를 이용한) 그런 행동을 저지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이런 발언이 이란이 중동지역에서 핵무기로 군림하는 이스라엘의 심각하고도 상시적인 침공의 위협에 맞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는 “주권”을 갖고 있으므로 미국은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는 상대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투키디데스의 금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에서는 이것이 행동원칙이다.
오직 전통적인 제국주의 세력만이 라이스가 말한 “최근에 형성된 국제적 규범”을 (내심으로는 선호하는) 옛날 방식을 따라 적용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살”이란 용어로 말하자면,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정직과 성실이 “최근에 형성된 규범”이 될 때까지 사전에서 지워버려야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