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이유정 지음 / 시공사(만화)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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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편집부에 갔다가 왜소한 몸과 어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홍대 앞 아이들같은 곱슬곱슬하고 산만한 머리모양을 한 남자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가 순정만화 스타일로 Na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라는 데 놀랐고, 여성스러운 그림을 그리는 이유정이 여자가 아니라는 데 놀랐다. 그러나 편집부에서 잠깐 빼어든 만화책에서 몇 편의 만화를 보고 독특한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잠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책 표지를 봤을 때 표지에 적힌 이름이 이유정임에 놀랐고, 주저없이 이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보여주려고 사기 위해 알라딘에 들어왔다가 그 '아이'가 이미 애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자신을 해롭게 하지 않는 놀라움이란 유쾌한 것 같다. 이 따분하고 심심하며 졸리운 일상에서 누군과의 만남에서 놀라움을 가지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러브머신/지구별 씨받이/집으로/얘네들은 악당이다/웃긴 걸/나 같은 쓰레기조차도/헤어(hair) 총 6편의 단편 만화가 실려 있는데 SF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깔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툭 던져주어서 아주 매력적이다.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소재는 성, 사랑, 치열하지도 않고 의미조차 없어보이는 듯한 일상이다. 또한 어떻게 보면 조금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구석도 있는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판에 박은듯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시시한 영화들 보다 몇 배 독특하고 그만의 철학이 담겨 있다. 남자로서 그가 가진 성에 대한 환상은 남성 권위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듯 해서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뭐 이건 '그의' 만화이니 그냥 말이 안되는 구석이 있어도 넘어가 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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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닭 - 이우일의 명랑만화
이우일 작화 / 홍디자인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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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박광수씨와 함께 초대된 이우일씨를 본 적이 있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키도 크고 외모도 핸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이우일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처럼 박광수 만화의 아류 쯤으로 생각하며 봤던 걸로 기억한다.

종종 도널드닭의 캐릭터를 잡지나 다른 책에서 만나긴 했지만 광수의 만화처럼 여성들이 좋아하는 그림체라던가 감성적인 주제를 주로 다루는 것도 아니고 표정이 다양하지 않은 듯한 도널드닭은 쉽게 친근감이 들지 않았고, 글씨 엄청 못 쓰는 애가 애써서 쓴 듯한 글씨체 따위 때문에 만화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우일의 만화를 제대로 읽으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새삼 느꼈다. 강경한 어조로 통쾌하게 엎어버리는 시사만화는 아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름대로 할말은 있는 소신있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책을 읽는 내내 유쾌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광수생각'에 비해 color가 공들여 입혀진 느낌이 덜하고, 책의 판형을 고려하지 않고 컷을 옮겨와 글자가 다소 작게 보이는 등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사회적인 주제를 풍자하는 재치나 비비꼬는 빈정댐이 주는 즐거움은 '광수생각'의 감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소제목을 드러내는 첫 컷에 각 편에 담긴 총체적인 내용을 만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나 매 회마다 적지 않은 컷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도 작가의 섬세함을 느끼게 해주어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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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 두려움 없이
전여옥 지음 / 푸른숲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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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도 다 끝난 고3의 끝무렵. 벌써 마음은 이미 학교 담장을 넘은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서 친절하게 편성한 프로그램 가운데 유명인 선배나 앞선 여성들을 모셔놓고 얘기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에너지 넘치는 전여옥 씨를 처음 만났다. 졸업 후 만나게 될 세상이 두려웠지만 그녀의 강연을 듣다보니 징징거리며 나약한 여자로 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글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그녀의 에너지를 주변 사람에게 전이시킨다.

그녀의 다른 책들에도 나타나있지만 그녀는 처한 악조건을 묵묵히 참고 순응하며 사는 스타일은 아니다. 자기 합리화에 뛰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마인드컨트롤 해가며 해쳐나갈 줄 알며 다소 감상적일 지언정 자신감에 넘치고 덩달아 기분좋은 최면에 걸리도록 만들어준다. 어차피 어려운 현실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장점을 찾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대하는 여자의 풍성한 수다를 듣고 있는 것은 확실히 즐겁다. 잘난 여자의 잘난척은 그냥 웃으며 들어줄만 하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이 겪었고 자신이 만나온 사람들을 통해 배운 삶의 노하우를 명쾌하게 요약하여 아낌없이 전달한다. 하루하루 자극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무심하게 사는 여성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잖아'하고 큰 목소리로 다그치며 자극시키는 인생 선배 같다고나 할까.

경제적 독립, 외모, 사랑, 조직생활의 노하우, 이혼, 다이어트, 재테크,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해 파워풀한 어조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refresh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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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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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곳엔가 소속감을 느낄 때 사람은 안도하게 마련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한 사람의 여성임에 안도했다.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문제들로 혼자 고민해야 하는 여성이 아니라 서로 감싸 안아주고 자기 자신을 찾도록 도와주며 함께 어려움을 해결해나가고 터전을 마련해나가는 당당한 여성들의 무리에서 나는 함께 빙긋 웃었다.

연극을 놓치고 책으로 만났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터미널에 앉아서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는데 사실 처음엔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책 내용을 오해하여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책을 슬그머니 가리고 읽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은밀하다고 생각했던 단어와 마주치면서 나는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겪어온 부당한 일들에 함께 분노했으며, 수치스럽고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욕망이 자유로와지는 순간 웃을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여성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자유가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왜 공공연한 진리가 배제되어 온 것일까. 감히 딴지 걸지 못하는 사실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온 것만으로도 이 책은 유쾌하다.

'버지니아'에 옷을 입히고 '버지니아'를 향해 귀를 기울여 얘기를 듣고, 여성들이기에 할 수 있는 자유롭고 즐거운 상상들로 버지니아가 더이상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소중히 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도 이 책의 힘이다. 또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폭력을 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성의 성이 주체성을 지니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환기시켜준다.

인간적으로 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남자들을 위한 책이며, 억압된 사회구조에서 자신의 몸, 자신의 의지, 바로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들을 위한 책이다.
두려움없이 당당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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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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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영상이 아른거렸다. 사람이 오가는 소란스런 공항의 대기실에서 바람이 머리카락에 날리는 날, 풀냄새가 나는 묘지로 다시 공항의 대기실 또 유럽영화에 나오는 낯선 인테리어의 집, 다시 공항의 하얀 벽 귀퉁이로 전환되는 씬을 따라 다녔다.
융통성없어 보이는 외모로 매사 따분하고 관심없다는 표정의 한 남자와 껄렁대며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기분나쁘게 실실 웃으며 엉뚱한 소리나 해대는 또 한 남자. 시종일관 서로를 무시하는 투의 두 남자의 대화로 이어지는 이 책은 실제로 가독성이 고려된 편집과 글자 크기 때문에 어려움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반면, 중간 중간 작가의 지적인 관념을 드러내기위한 철학적 인용 때문에 멈춰 꼼꼼히 되새기게 만들기도 한다.

제목을 충분히 의식하고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어긋나는 불편한 그 둘의 대화에 말려들어 갑작스런 결말은 충격적이었다. '이적'이라는 가수는 실제로 자기 자신을 적으로 설정하고 'this 적'이라는 가명을 지었다던데, 내 안의 적을 의식하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럼없이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해야 했던 그에게 거침없고 무자비한 말투의 내적 자아와의 대면은 그를 얼마나 괴롭혔을 것인가.

자살에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버티지 않고 순순히 자살을 감행해나가는 인물들을 작품속에서 낳으며 그녀 자신은 알코올 대신 차를 즐겨 마시며 절제되고 정제된 채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히 느긋하게 읽기. 그리고 놀라 잠깐 멈춤 시간 몇 초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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