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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날들 - 대서양 외딴섬 감옥에서 보낸 756일간의 기록
장미정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2월
평점 :
: 누군가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영화 '집으로 가는 길'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그 영화를 본 사람이거나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거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영화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들 때문이라고나 할까.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영화는 실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운운이 나온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 영화의
내용이 100%의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재미있었던 것은 나를 포함한, 당시 영화를 봤던 사람들 중 극중 대사관의 행태가 과장된
면은 있을지언정, 상당부분 사실이었을 거라고 자연스레 믿고 있었던 점이었다.
슬픈 현실이지만, 우리는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직/간접적으로 정작 내가 나라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나라는 나를 꼭 도와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다못해 정말
범죄를 당해서 경찰서에 신고를 해 봐도 경찰들이 정작 피해자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문서 처리에만 급급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본인의 경험이다) 교통위반 딱지는 칼같이 떼고, 신호위반에는 엄정하게 떨어지는 벌금 고지서는 '높으신 분들'의 횡령이나 뇌물에는 참
인색하게 떨어지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사관을 욕하는 걸 보면, 안타깝게도 이런 경험은
나만 했던 '재수없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 중 이게 과장되었을 지언정 '우리 대사관이 이럴 리 없다!'고 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던 걸 보니 말이다.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해도 하는 수 없지만, 이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죄, 이런 나라를
바꾸지 못하는 내 능력도 죄라 그래서 어쩌겠나 싶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화가 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이 나라의 윗선들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서 영화 후기도 쓰지 않았더랬다. 사실, 이 사건은 내게 그렇게 잠깐의 분노와 한탄 정도로 지나갈 법한 이야기였다. 이후에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굳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었다. 영화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오히려 이렇게 잊혀질 일에 대해 관심을 확 가게 만드는 글이 외교부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참고 :추적 60분 장미정 사건 보도에 대한 외교부 입장) 언뜻 보면 외교부는 정말 할 만큼 한 것도 같다. 그런데
보다 보면 정말 한숨이 나오는 글이다. 중간에 타 사례를 인용하며 꼭 장미정씨가 20년쯤은 받아야 하는데 1년 받고 나온 것은 천행인 것처럼 써
놓은 부분에서는 이 글이 정말 대한민국 회교부가 쓴게 맞기는 한 건가, 오히려 한국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한국
외교부가 프랑스도 안 하는 변명을 나서서 해 주고 있는 건가. 게다가 구글 검색을 해 보니 외교부는 정말로 추적 60분의 방송이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방송을 막으려고 했다더라. 참, 개인적으로 외교부 해명문 중간에 나오는 '장미정으로부터 감사하다는 서신 접수'는 좀 구차하게도 보였다.
실제로 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당사자와 가족들은 실제로는 죽일놈 살릴놈 하면서도 최고한 입과 손으로는 '존경하는 대사님' 운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사서 읽어봤다. 외교부의 말도 들어봤으니, 장미정씨의 말도 들어봐야겠다 싶었다. 처음 책을 폈을 때는
오히려 경계심이 가득했었다. 얼마나 감상적인 글이 가득할 것이며, 또 얼마나 자기 변명이 가득할까 생각했었다. 게다가 사람의 기억은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조작되는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책은 담담하고 건조하게 서술된다. 오히려 전문 작가라면 눈물 좀
뽑을 장면들도 그냥 '한없이 울었다' 정도로 서술해나간다. 그래서 오히려 사건에 몰입하고 공감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좀 재미있었던 게, 외교부의 저 입장문을 보고 보다보면, 외교부가 왜 저런 글을 썼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달까. 한 번이라도 회사에서 보고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어떤 사건에서 어떤 일을 저런 식으로 서술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되려 장미정씨를 위로하기보다는 자살하도록 충동질하게 되는 그 방문 건이 '교도소 방문, 장미정 면담'이라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놀란 것은 내가 영화적 장치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100% 영화를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던 귀국
후 전화 통보도 사실이었고, 역시 100% 영화를 위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간수에 의한 수감자 강간도 어느 정도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확실히 책은 영화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지라, 처음에는 그렇게 의지하던 대사관을 어떻게 불신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참 .... 그렇다. 보고 나면 오히려 영화보다 감정 소진은 덜 되는데도 더욱 허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교도소에는 VIP룸도
있었다. 그곳에는 일본인과 프랑스인이 수감되어 있다고 했다. 그곳은 일반 방보대 두 배는 더 컸다. 일본 대사관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왔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부족하지 않게 챙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도소 측에서도 일본인이라고 하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VIP 룸에 있는
수감자들은 고단하게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본인들이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지낸다고 누군가
말해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우리나라가 좁다거나, 힘이 없거나 답답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중략) 엄연히
나도 일본 못지않은 선진국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죄수들 사이에서만큼은 초라한 착각이었다.
(pp.100-101)
국가는 국민들의 보호자이고, 변호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사치스럽고
과분한 생각이던가. 의지할 데 없는 외국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나라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내 편에 서서 날 보호해주길 바라는 게
그렇게 바랄 수 없는 일이던가. 최소한 국민이 무언가를 주장할 때, 그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게 그렇게 안 될
일이던가.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왜 요즘에는 그 반대인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국가'라는 명분으로
국민을 소모하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덧 - 외교부의 글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글이 있어 링크함. 장미정 사건에 대하여 - 외교부의 거짓말.
덧 2 - 영화 개봉 시기에 맞춰서 내려고 만든 책이라 글이
정리되지 않고, 너무 아마추어적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가독성도 좋고, 책도 잘 나온 듯하다. 하지만 역시나 급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읽다보면 종종 오탈자가 보이는 점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