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산문선 102
심노숭 지음, 김영진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눈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눈물샘에서 나온다고 답할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을 말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를 살다간 감성적 문인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눈물이란 화두를 놓고 사색의 나래를 편다. 우선 눈물이 눈에서 나오는 것인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짚어 본다. 그리고는 마음을 땅에, 눈을 구름에, 눈물을 땅과 구름이 감응해서 내리는 비에 비유한다. 또 눈물이 나오는 것은 곡하고 곡하지 않음이나 제사를 지내거나 지내지 않음에 있지 않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감응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눈물에 대해 감상적인 사색이 담긴 이 글을 쓴 때는 심노숭은 사랑하는 동갑내기 아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생각해 보면 아내를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이 느껴짐과 동시에 보통 사람 같으면 다른 경황이 없을 때에 깊은 사색을 거쳐 빼어난 글을 남기는 문인의 삶을 마주할 수 있다. 문인에게는 인생사의 모든 것이 문학의 소재인 것이다.

옮긴이가 심노숭은 자신이 지나온 삶의 자취가 춘몽처럼 스러질까 봐 76년 인생 역정을 집요하리만큼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심노숭은 문집 효전산고’ 58(유배일기 20책 포함), 집안 선조들에 대한 기록인 적선세가’ 8, 야사총서 대동패림’(현존본 136) 등을 남겼다. 5백 권짜리 여유당전서를 쓴 정약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다작이다.

이러한 왕성한 창작에는 시대적인 배경과 자신의 불운도 한몫을 한 것 같다. 부친인 심낙수가 정조시대에 당파싸움에 가담했다가 정치적으로 큰 시련과 고통을 겪었고, 그 영향으로 자신의 앞날에 눈부신 태양이 비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주류 사회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하고 예리하게 시대를 통찰하고 논할 수 있었으며, 재기발랄하고 감상적인 자신만의 단단한 성을 쌓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를 잃고서 2년 동안 무려 26편의 시와 23편의 산문을 남긴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더구나 풍속이 두려워 아내를 잃은 슬픔을 숨기는 그 시대에서 이처럼 구구절절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글로 남긴 것이다. 오늘날을 사는 부부에게도 부부관계의 무게와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고전이나 문학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옮긴이도 고전이나 문학사에 대한 좀더 충분하고 친절한 해설을 곁들여주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곶감과 수필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을 수필이라고 한다. 사물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나 생활을 반추하며 느낀 점,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 등을 자기만의 색깔로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필의 재료는 흔히 접하는 사물이나 자연 현상부터 개인의 소소한 경험, 시대의 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 이처럼 다양한 재료들을 그저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꼭 필자의 목소리가 깃들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 장르에서 볼 때는 시처럼 고도로 압축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소설처럼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시 못지 않게 아름다운 운율이 마음을 울릴 수 있고, 소설을 능가하는 교훈이나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것도 수필이다.

또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문학의 문외한이 시나 소설을 쓰겠다고 덤벼들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더구나 문학성을 떠난다 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부담감이 앞선다. 하지만 우리가 일기를 쓰듯이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수필일 것이다.

그런데 붓 가는 대로 쓴다고 다 수필일까. 그저 신변잡기만 늘어놓는다면 차라리 잡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잡기는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보다는 글쓴이 혼자서 간직하는 쪽이다. 이에 비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되 격조가 있고 읽는 사람의 마음에 여운을 남기고 그들의 생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방망이를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로 만난 윤오영. 방망이를 깎는 일은, 길 가는 사람들이 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노인에게는 더 없이 더 없이 소중한 생업이자 천직인 것이다. 이 글은 아무리 하찮게 보이더라도 누구에게나 생업은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책 속에서 다시 읽다 보니 학창시절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윤오영의 수필은 소재의 다양성이 먼저 눈에 띈다. 달밤, 붕어, 농촌, 찰밥, 염소, 치아, 넥타이……. 어쩌면 이런 재료들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읽다 보면 작가의 기발한 생각, 남다른 경험 등이 잘 녹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담 없이 또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술술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필 한편의 분량이 불과 몇 쪽이 되지 않지만, 그 속에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선철들의 말씀과 사상, 따뜻한 인간미와 멋들어진 풍취, 선비처럼 맑은 정신 등이 고루 담겨 있다. 편안하게 다가오면서도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메시지와 사색의 자료를 남겨 주는 것이다. 모름지기 수필은 이렇게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는 곶감과 수필이란 글에서 수필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문학성을 필수적인 요소로 들고 있다.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 작품은 아니다.”

그는 수필을 곶감에 비유한다. 절묘한 비유를 감상해보자.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彩)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 이 문()이요, 적백색(赤白色) 이 장()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袁中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枾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은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 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인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

잡기라도 부지런히 적어 보자. 혹시 언젠가는 수필 같은 글이 한편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꽃들의 웃음판 -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
정민 지음, 김점선 그림 / 사계절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울 가에선 아내가 방아를 찧고

나무 그늘 아이는 책을 읽는다.

우리 집 못 찾을까 염려 마시게

거기가 다름 아닌 내 집이라네.

장혼(張混, 1759~1828)의 답빈(答賓)

 

오랜만에 소나기가 내렸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보름 이상 계속된 무더위와 열대야를 단번에 시원하게 날려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푹푹 찌는 여름의 도시는 숨막힌다. 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숲이나 물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니 말이다. 물론 에어컨을 팡팡 켜 놓고 사무실에서 틀어박혀서만 지낸다면 더위를 피해갈 수 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꽃들의 웃음판은 무더위 속 소나기 같은 책이다.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이란 부제를 달고 나왔는데, 정민 선생이 봄 꽃, 여름 숲, 가을 잎, 겨울 산으로 나눠 한시를 풀이한 것이다. 거기다 김점선씨가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책 안팎에 예쁘게 넣었다. 그래서 정민이란 이름과 예쁜 책 표지를 보고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여름 숲편에 있는 위의 시는 시골에서 사는 여유와 낭만이 절로 배어있다. 아내가 방아를 찧고 아들이 나무 아래서 책 읽는 모습을 보며 지내는 시인의 마음을 평화와 여유로 가득 찬 모양이다. 각박한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살고 싶다고 누구나 한번쯤 꿈꿀 것이다. 3, 4구는 늘 1, 2구처럼 살고 있다는 시인의 삶은 뒷받침 해줄 뿐 아니라 은근히 손님에게도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민 선생이 머리말에서 시는 고도로 농축된 언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다. 시는 압축 파일이다. 물에 담가 두면 마구 불어나는 미역 같다라고 말한다. 나는 평소 시를 잘 읽지 않는데다 한자투성이인 한시는 더욱 어렵게만 느껴왔다. 그런데 정민 선생의 명쾌한 해설을 읽으면서 한시에 담긴 멋과 해학, 감정과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이번에는 무더위를 식혀줄 방랑 시인 병연(=김삿갓, 1807~1863)이란 시를 감상해 보자. 밤새 함박눈이 내려 온통 은세계로 변한 세상을, 가히 범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늘 임금 죽으셨나 땅의 임금 죽었는가

푸른 산 나무마다 모두 소복 입었네.

밝은 날 해님더러 조문하게 한다면

집집마다 처마 끝엔 눈물이 뚝뚝 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불씨 1
도몬 후유지 지음, 김철수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불씨’는 언제나 불을 붙일 수 있는 불덩어리를 말한다. 요즘처럼 부쩍 추워진 한겨울에는 학창시절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던 난로가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살을 애는 듯한 추위 속에서 따뜻한 불은 안식이며 희망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불을 붙이는데 라이터나 성냥을 쓴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에는 아궁이의 불씨가 성냥이나 라이터 역할을 맡았다. 그 시절은 분명 땔감에 의존했을 것이며, 불씨를 꺼트리는 것은 커다란 실수였을 것이다. 이웃 집이 가까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면 불씨를 얻어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어야 할 것이다.

도몬 후유지는 누구나 쉽게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불씨’라는 제목을 붙였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불씨는 개혁과 희망을 나타낸다. 소설의 배경은 1700년대 약 2백60개 번으로 구성된 에도바쿠후 시대에 요네자와라는 번이다. 번은 바쿠후의 간섭과 통제를 받으면서 동시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지방정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개혁과 희망의 주체인 우에스기 요잔은 규슈의 조그마한 번에서 열일곱 살 나이로 자신의 가문보다 훨씬 격이 높고 영지가 넓은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가 된다. 우치무라 간조가 쓴 ‘인물인본사’에 보면 요잔은 다이묘(=영주)가 되는 날(1767년 8월1일)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첫째, 문무의 수련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둘째, 가장 중요한 의무는 백성의 부모 노릇을 다하는 것이다.

셋째, 다음 격언을 밤이나 낮이나 잊지 않는다.

      사치하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

      베풀고 낭비하지 말지어다.

넷째, 언행의 불일치, 상벌의 부정, 부실과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요잔이 다이묘가 됐을 당시 요네자와번은 허례허식이 답습되고 재정이 파탄나고 빚만 수백만 냥이 넘었다. 과도한 세금 수탈로 주민들의 삶은 점점 궁핍해지는 등 한 점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번이었다.

그런데 젊은 요잔이 등장하면서 백성을 위한 개혁이 시작됐다. 부정부패의 원흉인 중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개혁파를 발탁해 힘찬 개혁을 추진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솔선수범을 보이며 철저한 검약과 행정 쇄신, 산업 장려 등으로 경제 부흥을 이뤘다. 또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뽕나무, 닥나무, 옻나무 등 상품성 있는 작물을 재배하고 다른 번의 영농기술자를 초빙해 강의를 세우는 등 농촌 번영을 위해 힘썼다. 나아가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껴 백성도 참여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 개혁 사상을 전파했다.

우치무라 간조는 {요잔만큼 결점이나 약점을 꼽기 힘든 인물은 없다. 요잔 자신이 어떤 전기 작가보다도 스스로의 결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요잔을 평하고 있다.

우리가 요잔이란 인물에게서 배울 점은 무궁무진하다.

몇 가지만 손꼽자면, 먼저 장(長)의 솔선수범을 들 수 있겠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조직에서나 장의 마인드와 행동이 전체게 파급되는 것이다. 요잔은 자신부터 검약과 개혁을 삶 속에 실천하면서 그것이 자연스레 중신과 무사, 백성에까지 이르게 했다. 만약 리더가 말과 행동이 다르고 솔선하지 않는다면 어느 조직에서나 진정한 개혁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는 점이다. 당시 요잔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남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과 힘은 ‘백성을 위해서’라는 목적을 위해서 섰다. 이것은 백성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요잔은 다이묘라는 권력을 벗은 알몸뚱이가 되어도 인간성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일이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역풍이 거세진다. 어찌 보면 역풍은 좋은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요잔의 경우, 개혁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반대했고 개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는 개혁을 추진하던 심복이 타락하는 등 갖가지 어려움이 나왔지만 스스로 개혁의 의지를 꺾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개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추진하고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끝으로 요잔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다. 자신의 가슴에 불씨가 있듯이 모두의 가슴에는 불씨가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불씨를 끄집어내는 방법을 모르고 있거나 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인류가 쌓은 그 어떤 위업도 모두 인간의 손에서 이뤄진 것이다. 물론 그 어떤 비극도 모두 인간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점에서 요잔의 지혜와 안목이 돋보이는 것이다.

자신이나 조직, 사회, 국가, 인류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불씨’라는 책과의 만남을 크게 반길 것이 틀림없다. 나 역시 끝없는 자신의 개혁을 추구하는 길을 걷고 있기에 공감이 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서점 가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책들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다. 이런 책들은 대개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영, 처세, 판타지나 추리소설 분야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1분’역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별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그것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책 소개 프로그램을 보다가 정신병력을 비롯해 젊은 시절 많은 고뇌를 경험하고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파울로 코엘류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분명 무엇인가 깊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 기대를 안고 책을 들었다. 우선 성교의 지속시간을 말하는 ‘11분’이라는 제목 자체가 참 엉뚱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책은 작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술술 쓰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책은 술술 읽혀졌다. 그가 책을 통해 헌사를 했다는 헤밍웨이를 닮았는지 짧고 간결한 문장에다 영화 시퀀스처럼 단락을 나누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더구나 작가의 내공이 부족하면 자칫 삼류소설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소재-한 브라질 출신 창녀의 모험과 삶-를 성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이야깃거리로 창조했다. 그것은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성과 사랑, 인생에 대한 작가 자신의 깨달음과 담론들을 주인공 마리아와 그의 정신적 동반자 랄프의 대화와 생각 속에 간간이 채색했다.

작가는 매춘의 역사를 통해 성을 성스러운 측면과 세속적인 측면으로 나누고, “성의 성스러운 측면에 대해 쓰려면 그것이 왜 그토록 세속화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 성과 사랑에 대해 서툴던 브라질 처녀가 모험을 찾아 스위스 제네바를 찾아간다. 그런데 젊음의 불안과 희망, 혼동과 의지의 모순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창녀의 길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부푼 꿈을 날려버린 창녀라는 최악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책을 읽을 읽는다. 그리고 성을 비롯해 인생의 많은 것들을 달관한 랄프라는 젊은 화가를 운명적으로 만남으로서 성과 사랑, 인생의 참된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성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마리아라는 이름 자체는 예수의 어머니, 즉 성녀를 뜻하지만 주인공 마리아는 창녀의 삶을 경험한다. 그래서 작가는 누구나 성의 성스런 측면과 세속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성스런 측면에 진실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성과 사랑과 인생에 대해 상당히 통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녀가 만나 다른 한 사람이 없으면 못살 것 같다가도 결혼을 하고 살아가다 보면 삶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사랑에 대한 절실함이 없고 섹스도 점점 의무감으로 다가오고 그러면서 점차 불행 속으로 접어들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에 경종을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도 예전에 비해 사랑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해져 있는지, 얼마나 노력을 안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위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