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1
도몬 후유지 지음, 김철수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불씨’는 언제나 불을 붙일 수 있는 불덩어리를 말한다. 요즘처럼 부쩍 추워진 한겨울에는 학창시절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던 난로가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살을 애는 듯한 추위 속에서 따뜻한 불은 안식이며 희망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불을 붙이는데 라이터나 성냥을 쓴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에는 아궁이의 불씨가 성냥이나 라이터 역할을 맡았다. 그 시절은 분명 땔감에 의존했을 것이며, 불씨를 꺼트리는 것은 커다란 실수였을 것이다. 이웃 집이 가까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면 불씨를 얻어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어야 할 것이다.

도몬 후유지는 누구나 쉽게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불씨’라는 제목을 붙였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불씨는 개혁과 희망을 나타낸다. 소설의 배경은 1700년대 약 2백60개 번으로 구성된 에도바쿠후 시대에 요네자와라는 번이다. 번은 바쿠후의 간섭과 통제를 받으면서 동시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지방정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개혁과 희망의 주체인 우에스기 요잔은 규슈의 조그마한 번에서 열일곱 살 나이로 자신의 가문보다 훨씬 격이 높고 영지가 넓은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가 된다. 우치무라 간조가 쓴 ‘인물인본사’에 보면 요잔은 다이묘(=영주)가 되는 날(1767년 8월1일)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첫째, 문무의 수련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둘째, 가장 중요한 의무는 백성의 부모 노릇을 다하는 것이다.

셋째, 다음 격언을 밤이나 낮이나 잊지 않는다.

      사치하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

      베풀고 낭비하지 말지어다.

넷째, 언행의 불일치, 상벌의 부정, 부실과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요잔이 다이묘가 됐을 당시 요네자와번은 허례허식이 답습되고 재정이 파탄나고 빚만 수백만 냥이 넘었다. 과도한 세금 수탈로 주민들의 삶은 점점 궁핍해지는 등 한 점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번이었다.

그런데 젊은 요잔이 등장하면서 백성을 위한 개혁이 시작됐다. 부정부패의 원흉인 중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개혁파를 발탁해 힘찬 개혁을 추진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솔선수범을 보이며 철저한 검약과 행정 쇄신, 산업 장려 등으로 경제 부흥을 이뤘다. 또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뽕나무, 닥나무, 옻나무 등 상품성 있는 작물을 재배하고 다른 번의 영농기술자를 초빙해 강의를 세우는 등 농촌 번영을 위해 힘썼다. 나아가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껴 백성도 참여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 개혁 사상을 전파했다.

우치무라 간조는 {요잔만큼 결점이나 약점을 꼽기 힘든 인물은 없다. 요잔 자신이 어떤 전기 작가보다도 스스로의 결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요잔을 평하고 있다.

우리가 요잔이란 인물에게서 배울 점은 무궁무진하다.

몇 가지만 손꼽자면, 먼저 장(長)의 솔선수범을 들 수 있겠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조직에서나 장의 마인드와 행동이 전체게 파급되는 것이다. 요잔은 자신부터 검약과 개혁을 삶 속에 실천하면서 그것이 자연스레 중신과 무사, 백성에까지 이르게 했다. 만약 리더가 말과 행동이 다르고 솔선하지 않는다면 어느 조직에서나 진정한 개혁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는 점이다. 당시 요잔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남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과 힘은 ‘백성을 위해서’라는 목적을 위해서 섰다. 이것은 백성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요잔은 다이묘라는 권력을 벗은 알몸뚱이가 되어도 인간성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일이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역풍이 거세진다. 어찌 보면 역풍은 좋은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요잔의 경우, 개혁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반대했고 개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는 개혁을 추진하던 심복이 타락하는 등 갖가지 어려움이 나왔지만 스스로 개혁의 의지를 꺾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개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추진하고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끝으로 요잔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다. 자신의 가슴에 불씨가 있듯이 모두의 가슴에는 불씨가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불씨를 끄집어내는 방법을 모르고 있거나 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인류가 쌓은 그 어떤 위업도 모두 인간의 손에서 이뤄진 것이다. 물론 그 어떤 비극도 모두 인간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점에서 요잔의 지혜와 안목이 돋보이는 것이다.

자신이나 조직, 사회, 국가, 인류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불씨’라는 책과의 만남을 크게 반길 것이 틀림없다. 나 역시 끝없는 자신의 개혁을 추구하는 길을 걷고 있기에 공감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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