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모리 하늘신발 Project LC.RC
송경아 지음 / 알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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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출판사의 이번 크툴루 신화 중편선 출판은 여러 유명 한국 작가들의 크툴루 신화라는 단일 주제 하에 집필한 중편들을 별책으로 냈다는 점에서 어거스트 덜레스가 편집한 기념비적인 최초의 크툴루 신화 앤솔러지 <Tales of the Cthulhu Mythos>(1969)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덜레스의 앤솔러지 전반부가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작품 및 생전의 그와 교류하던 뉴잉글랜드 작가들 작품 위주로 구성된 반면 후반부에는 러브크래프트 사후 뉴잉글랜드 바깥에서 창작 활동을 하던 후대 작가들의 작품 비중이 늘었는데, 작가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문화적 영향이 깊이 배어 있어 창시자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를테면 램지 캠벨의 단편 <Cold Print>(를 포함하여 브리체스터 신화 작품군)의 주요 배경인 브리체스터 곳곳에 스며든 황량한 느낌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으로 인해 폐허가 된 머시사이드 일대에서 유년기를 보낸 작가의 심상 풍경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제임스 웨이드는 단편 <The Deep Ones>에서 뉴잉글랜드의 고풍스러운 저택들과 첨탑을 네온 조명이 휘황한 캘리포니아 밤거리의 뒤틀린 야자나무와 마약 중독자들, 돌고래와의 텔레파시를 연구하는 과학연구 시설, 바닷가의 히피들과 반문화운동 등으로 대체함으로써 정치적 격변과 가치관의 충돌로 혼란스럽고 불안한 60년대 미국 서부해안 지역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잡아내고 있다. 이렇듯 크툴루 신화가 창시자 일인의 한정된 경험과 관점에 구애되지 않고 전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공포로서 확립되는 데 후대 작가들의 기여에 힘입은 바 크다.


크툴루 신화의 공간적 배경을 러브크래프트의 고장(Lovecraft country)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이식할 때 러브크래프트의 신화적 원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더라도 작가가 속한 문화권이나 시대의 영향이 은연 중에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역량 있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경우, 마치 와인의 원재료인 포도가 그 지역 자연 환경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역의 것과 확연히 구분되는 독특한 향미를 지니게 되는 현상인 테루아르(terroir)에 비교할 만한 효과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번 알마의 중편선 가운데 송경아 작가의 중편 <우모리 하늘신발>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작품의 배경은 우모리라고 하는 가공의 한국 농촌 마을인데, 특이한 점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개발독재로 이어지는 격동기를 거치고 있는 바깥 세상과는 달리 우모리는 드란댁의 보호 아래 마치 시간의 흐름이 비껴 나간 것처럼 작중의 시간적 배경인 60년대보다 훨씬 이전의 전통적인 한국의 농촌의 모습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본서 41~42; 물론 전근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차별 습속들은 드란댁의 수정펀치를 맞았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마리의 관점을 통해 회고되는 우모리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의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집단적 기억 속의 이상적 공동체의 원형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으며, 그 결과 급변하는 세상에 둘러싸인 채 소멸하거나 변질될 위기에 처한 전통적 사회라는 모티프라는 점에서는 러브크래프트의 뉴잉글랜드에 대한 태도와 어느 정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러브크래프트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운 요소, 즉 여성들 사이의 연대에 대한 작가 자신의 굳은 믿음이다. 장씨 할머니와 드란댁의 결말에는 전통 사회에 속한 친숙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 잊히고 사라지리라는 상실의 슬픔이 배어 있지만, 작가는 여기서 러브크래프트가 다다른 전환기의 불안과 퇴행적인 혐오 대신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과 희망을 끌어낸다. 그 낙천성과 희망을 지탱하는 것은 식민 지배와 전쟁, 개발이라는 근현대 한국사의 격랑뿐만 아니라 외계로부터 도래한 미지의 괴물에 맞서는 두 여자 사이의 애정과 연대이다.


크툴루 신화가 근현대 한국이라는 공간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신화적 원형에 없던 이질적인 요소들,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과 작가의 관점이 뒤섞여 하나의 서사로 빚어진 결과 어떤 크툴루 신화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 것이 본작 <우모리 하늘신발>이다. 제법 많은 크툴루 신화 작품을 접해 보았다고 자부하는 독자들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만한 수작이라 평가하고 싶다. 다만 본작만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번역했던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를 포함하여 수정주의적 크툴루 신화 작품들에서 공통으로 느끼는 아쉬움이 하나 있는데, 작품 전반에 위어드 픽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다소 병적인 관심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위어드 픽션은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의 에세이 문학에서의 초자연적 공포에서 언급했던 바 알려지지 않은 외계의 권능에 대한, 설명할 길 없이 숨 막히는 듯한 두려움이 부각되어야 하는데, 수정주의적 작품들의 목적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유해한 요소로 남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다소 현실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위어드 픽션 독자가 응당 작품에 기대함 직한 방향과는 다소 어긋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부분은 작가들이 러브크래프트 다시 쓰기를 계속 시도하면서 작법이 확립되면 조만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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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사랑했든 내가 사랑했든 창비청소년문학 55
송경아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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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과학소설이나 판타지를 즐겨 읽고 리뷰를 하는데 사랑 이야기라는 생소한 분야(?)라서 그런지 오히려 어떤 식으로 감상을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판타지의 이차세계나 외삽으로 구축된 근미래에 툭 떨어졌을 때보다 더 당황스럽다.


누나와 동생이 한 남자에게 동시에 반하는데, 사실 동생은 동성애자로 자신의 짝사랑을 숨기고 누나와 그 남자를 이어주려 노력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청소년 동성애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작가는 센세이셔널한 면을 되도록 배제하고 여느 사랑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풀어나가고 있으며, 덕분에 이야기가 조금 더 보편적으로 다가와 쉽게 공감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이성애자인 나도 짝사랑 벙어리 냉가슴앓이는 실컷 해봤으니까...


오히려 이 작품을 읽으며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이런 점이다. 보통 첫사랑에 관한 기억이라면 매체 불문하고 다소 미화되어 (사랑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헤어졌지만 그때 우리는 참 아름다웠지...' 혹은 (짝사랑에 그쳤다면) '말하진 못했지만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이런 식으로 회고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예경과 성준으로부터 동시에 애정의 대상이 되는 희서라는 인물은 아무리 잘 봐줘도 그냥 꼴통 속물에 불과한 인물로, 이런 식의 미화가 도무지 끼어들 만한 구석이 없다. 특히 희서가 동성애자들에 대해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주인공이랑 그 누나는 이런 인간이 뭐가 좋아서 쫓아다니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첫사랑의 환멸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작가가 의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그리고 성준이 짝사랑하던 친구 동일이와 함께 요양병원에서 봉사하는 장면에서는 다소 울컥했다. 나를 이뻐해주시고 맡아서 키워주신 외할머니께서 암투병 끝에 몇 년 전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던 것이 문득 기억났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주인공이 동성애자라서 다소 특별한 첫사랑 이야기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첫사랑 이야기라는 점이며 누구나 한 번쯤은 겪고 넘어가는 일이기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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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하고 산산조각 난 꼬마들 - 카툰 문학의 거장 에드워드 고리 걸작선 1 카툰 문학의 거장 에드워드 고리 걸작선 1
에드워드 고리 글.그림,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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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봤던 '13일의 금요일' 6편 가운데 한 장면이 생각난다. 제이슨이 닥치는 대로 등장인물들을 베고 다니다가 꼬맹이들이 잠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다들 자고 있었지만 어떤 여자 아이 하나가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만 제이슨과 눈이 딱 마주친 거였다. 그런데 다른 때 같았으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을 제이슨이 갑자기 그 아이를 멍하니 계속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 당시에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헐리웃 영화에서는 어린 아이를 살해하는 장면을 영화에 넣는다는 것은 일종의 '넘어서는 안 되는' 금기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보면,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에서도 호스맨이 어린 아이의 목을 자르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고리의 이 그림책은 바로 우리의 이 아주 오래된 금기를 건드린다. 우리가 보호해야 하고 또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어린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이 묘하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나 그들이 맞게 된 끔찍한 죽음에 대한 혐오감이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얼굴에 조만간 닥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마저도 철저하게 무심한 표정을 그려넣은 고리의 그로테스크한 감수성에 대한 것이다. 그 그로테스크함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도대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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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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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은 1927년 3월 6일 전국 비종교인협회 런던 남부지부의 후원하에 베터시 시청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그 내용의 대담성과 러셀의 탁월한 언변에 힘입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30년이 흐른 뒤에 여러 곳에 게재되었던 다른 에세이들과 함께 하나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본서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 이 책에서 러셀은 교육이나 성(性)과 같은 여러 가지 주제들을 함께 다루고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의 문제이다.

종교에 대한 러셀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진실성의 문제인데,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 종교의 각종 주장들을 입증할 수 있는 과학적, 논리적인 증명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용해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사용한 제일원인론, 자연법칙론, 목적론, 도덕론 등의 논리를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용성의 문제, 즉, '종교가 문명에 무엇을 공헌하였는가'하는 것인데, 러셀은 종교가 인류와 문명을 위해 공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종교란 것이 본질적으로 아득한 옛날 한 번 계시된 불변의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반동적인 세속권력과 쉽게 결탁하여 세계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서 비롯된다고 그는 진단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종교가 인간의 두려움, 특히 영원한 심판에 관한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러셀의 철학적 논지는 책의 말미에 실린, BBC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예수회 신부이자 철학자인 F. C. 코플스턴과 주고받은 논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러셀은 제 1 원인을 신이라는 존재에게 돌려야 할 필연이 없으며, 철학에서 합리성이 가장 중요한 사유의 도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등 두 사람의 논지는 근본적인 전제에서부터 어긋나고 있기 때문에 논의가 진전될 여지를 보이지 않은 채 끝까지 이견을 좁힐 수가 없어서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러셀의 글은 대단히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에 기초하면서도 신랄하면서 열정적인 맛을 잃지 않는데, 이는 저자 자신이 보수적인 정치세력 및 종교계와 오랜 기간동안 싸워왔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기의 Christian Humanist와 비슷한 견해를 지닌 나는(필자는 크리스천이다) 러셀이 종교에 대해 제기한 진실성의 문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유용성의 문제는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이 책은 원래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믿음에 관하여 깊이 있는 회의를 해 본 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교회를 다닌 크리스천들도 꼭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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