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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평점 :
버트런드 러셀은 1927년 3월 6일 전국 비종교인협회 런던 남부지부의 후원하에 베터시 시청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그 내용의 대담성과 러셀의 탁월한 언변에 힘입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30년이 흐른 뒤에 여러 곳에 게재되었던 다른 에세이들과 함께 하나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본서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 이 책에서 러셀은 교육이나 성(性)과 같은 여러 가지 주제들을 함께 다루고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의 문제이다.
종교에 대한 러셀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진실성의 문제인데,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 종교의 각종 주장들을 입증할 수 있는 과학적, 논리적인 증명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용해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사용한 제일원인론, 자연법칙론, 목적론, 도덕론 등의 논리를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용성의 문제, 즉, '종교가 문명에 무엇을 공헌하였는가'하는 것인데, 러셀은 종교가 인류와 문명을 위해 공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종교란 것이 본질적으로 아득한 옛날 한 번 계시된 불변의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반동적인 세속권력과 쉽게 결탁하여 세계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서 비롯된다고 그는 진단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종교가 인간의 두려움, 특히 영원한 심판에 관한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러셀의 철학적 논지는 책의 말미에 실린, BBC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예수회 신부이자 철학자인 F. C. 코플스턴과 주고받은 논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러셀은 제 1 원인을 신이라는 존재에게 돌려야 할 필연이 없으며, 철학에서 합리성이 가장 중요한 사유의 도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등 두 사람의 논지는 근본적인 전제에서부터 어긋나고 있기 때문에 논의가 진전될 여지를 보이지 않은 채 끝까지 이견을 좁힐 수가 없어서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러셀의 글은 대단히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에 기초하면서도 신랄하면서 열정적인 맛을 잃지 않는데, 이는 저자 자신이 보수적인 정치세력 및 종교계와 오랜 기간동안 싸워왔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기의 Christian Humanist와 비슷한 견해를 지닌 나는(필자는 크리스천이다) 러셀이 종교에 대해 제기한 진실성의 문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유용성의 문제는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이 책은 원래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믿음에 관하여 깊이 있는 회의를 해 본 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교회를 다닌 크리스천들도 꼭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