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2
케이트 윌헬름 지음, 정소연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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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던 작품이었다. 고려원미디어에서 나왔던 '시간여행 SF 걸작선'에 실렸던 한 단편, 언젠가는 과거로부터 시간여행을 해 온 남자에게로 떠날 여자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 '영원히 당신만을, 애너Forever Yours, Anna'를 읽고 나서 그 섬세한 감성에 놀란 터였다. 그래서인지 행책SF의 2005년 라인업에 케이트 윌헬름의 대표작인 이 책이 올라가 있다는 소식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생식능력의 급격한 감퇴로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보전이 위협받는 미래에, 인간복제 기술에 의지하게 되는 인류의 절박한 선택을 다루고 있다. 그 결과 태어난 클론은 동일계통간에 일종의 텔레파시적 유대관계로 이어져 있고, 이들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는 자연히 각 개체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독립된 자아로서의 개인이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폐쇄적 공동체가 된다. 약간의 시간차를 둔 3부로 나누어진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는 이러한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라져가는 마지막 인류의 일원이기도 하고, 전체로부터의 분리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클론이기도 한 그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이다.

사회로부터 단절된(또는 단절되기를 선택한) 아웃사이더 이야기라면 결국 개인이 패배하고 파멸로 내몰리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윌헬름은 한 개인인 아웃사이더의 자아탐색을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인류 전체와 과학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과 결부시킴으로서 과학소설만의 장점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진화에 관한 무미건조한 이데올로기 대립 구도를 늘어놓는 대신에, 공동체와 이를 지탱하는 복제기술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통받고 희생당하게 되는 사람들의 슬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이해,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싹트는 조그만 희망을 크지도 격하지도 않은, 나즈막하고 애잔한 어조로 그려내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여운이 가슴 속에 남게 만든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인류의 진화를 소재로 삼은 그 어떤 과학소설보다도 문학적인 면에서 월등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에 필적할만큼 탁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면 이런 과격한(?) 주장도 전혀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만 권말 해설이 작품 자체보다는 작가 소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런 사소한 흠 정도로 이 작품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튼, 자신을 진정한 과학소설 독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정도 작품은 읽어둬야 되지 않을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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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9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29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의 도둑
클라이브 바커 지음, 소서영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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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Grand Prix de l'Imaginaire Jeunesse 수상 (aka 'le Voleur d'éternité' in French edition)

이제 열 살 먹은 Harvey는 만사가 귀찮고 따분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Rictus라는 사람이 Harvey의 방에 마술처럼 나타나 자신이 멋진 곳, 매일 낮에는 태양이 따사로이 빛나고 매일 밤에는 섬뜩한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the Holiday House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Harvey도 계속되는 Rictus의 유혹에 넘어가, 엄마에게도 아무 말 없이 Rictus를 따라 집을 나선다.

그렇게 Rictus의 손에 이끌려 the Holiday House에 온 Harvey. 아침은 따스한 봄으로 시작해서 후덥지근한 여름인 점심을 지나 온종일 뛰어놀다 보면 저녁 먹기 전에 가을잎이 떨어지고 어느새 할로윈의 저녁이 찾아온 뒤 자정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면 하루가 지나간다. 이렇게 신선놀음을 즐기던 Harvey는 어느 날 the Holiday House와 그 주인인 Mr. Hood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되고, the Holiday House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자신이 치뤄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e Thief of Always'는 바커가 처음으로 쓴 young adult fantasy로, 에로티시즘과 적나라한 잔혹함으로 덧칠된 이전의 비블로그래피를 돌이켜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화기이기도 한 바커는 이 소설 안에서 사용된 30여 점이 넘는 삽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일단 소설을 처음 읽고 나면, 시간을 훔처가는 존재라는 모티프에서 많은 독자들이 미카엘 엔데의 '모모Momo'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모'에서 엔데가 시간과 대립쌍을 이루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금전으로 환산 가능한 현대적 효율성인데 반해, 바커가 'The Thief of Always'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간, 그리고 시간과 길항(拮抗)적 관계로 결부된 생명vitality의 문제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확연히 다르다. 이 점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소설의 20장인 'The Thieves Meet'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the Holiday House로 돌아온 Harvey는 다락방에서 드디어 Hood와 조우하게 되는데, 이때 Hood는 이곳에 머물렀던 아이들로부터 빼앗은 시간을 조그마한 공처럼 만들어 한창 빨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 장면에서의 Hood는 흡사 에스파냐의 화가 고야의 작품인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데, 재미있는 건 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가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시간)와 동일한 속성을 지닌 신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Harvey가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모든 것을 낳는 동시에 자신이 낳은 것들을 무(無)로 되돌리는 시간 그 자체인 것이다. Hood는 Harvey의 영혼도 손에 넣기 위해 Harvey를 회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Now I understand," He said.
"Understand what?"
"Why it is you came back."
Harvey began to say: I came for what you took, but Hood was correcting him before he'd uttered two words.
"You came because you knew you'd find a home here," Hood said. "We're both thieves, Harvey Swick. I take time, you take lives. But in the end we're the same: Both Thieves of Always."

우리들 인간은 모두 각자의 분량만큼 시간을 지니고 태어나며, 그 시간을 생명으로 바꾸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대신 생명은 그 시간이 다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시간을 팔고 생명을 사는 불가역적인 거래인 셈이다. 이 거래의 천칭에서 Hood와 Harvey는 대척점에 놓여 있으며,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관계로 끝없이 투쟁한다. 이런 이유에서 Hood는 Harvey 역시 자신의 동류이며 일종의 뱀파이어라고 말한 것이다.

"So I'll end up feeding on children, like you?" Harvey said. "No thanks."
"I think you'd like it, Harvey Swick," Hood said. "You've hot a streak of the vampire in you already."
There was no denying this. The very word vampire reminded him of his Halloween flight; of soaring against a harvest moon with his eyes burning red and his teeth sharp as razors.

실제로 앞부분에서 Harvey는 할로윈의 밤에 Hood의 종복 가운데 하나인 Marr의 도움을 받아 뱀파이어로 변신하는데, 아주 잠깐이나마 자신의 본능에 따라 친구 Wendell의 피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여기서 뱀파이어로의 변신은 Harvey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삶의 본질적인 조건,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다른 생명들을 대신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평범하면서도 무자비한 진리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바커의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변신transformation이라는 모티프는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이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반대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Harvey가 Hood의 네 번째 종복인 Carna를 어떻게 물리치는지 보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The Thief of Always'는 '모모'에 비해 작품 전체의 구도라는 면에서는 보다 중층적이고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작품의 엔트로피를 끌어올리려는 결말 처리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냥 깔끔하게 끝내는 것도 괜찮았을 듯 한데.

이제부터는 한국어판에 대해서 몇 마디 하겠다. 첫째, 제목인 'The Thief of Alwasy'는 앞서 언급한 대로 '시간의 도둑'인 Hood 뿐만 아니라 '생명력의 도둑'인 Harvey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자는 제목을 전자에 한정시켜 번역함으로써, 원제의 중의적 의미를 탈색시켰다. 'Always의 도둑', 다시 말해 '언제나 훔치는 자들' 쪽이 (좀 어색할런지는 몰라도) 의미상으로는 더 정확하다고 본다.

둘째, 왜 하필이면 이 책을 기획, 번역했는지가 의문이다.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분량도 얼마 안 되고 어휘나 표현도 아주 쉽기 때문에 원서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큰 무리 없이 금새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작가의 전집을 번역할 것이 아닌 이상은 소개할 수 있는 작품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먼저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터, 그렇다면 바커의 장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The Damnation Game'이 먼저 번역되었어야 했다.

PS. 제일 왼쪽의 표지는 바커가 직접 그린 Harpercollins의 하드커버 판으로, 앞뒤표지를 완전히 펼치면 the Holiday House의 사계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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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1
스티븐 킹 지음 / 밝은세상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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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햄프셔의 해안에 위치한 알함브라 모텔 앞에서 한 소년이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물결치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키는 열 두 살 치고는 조금 큰 편인데, 다갈색 머리카락이 소년의 하얀 이마를 쓸어올리고 있다. 소년의 이름은 Jack Sawyer. 저명한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동업자였던 Morgan Sloat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그러나 사업의 지분을 넘기라는 Sloat의 압박은 계속되고, 암까지 어머니의 건강을 조금씩 좀먹어 간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근처 놀이공원의 관리인 Speedy Parker로부터 다른 세계의 존재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그 세계의 이름은 테러토리- 현실 세계의 분신자twinner들이 사는 곳. 어머니의 분신자인 테러토리의 DeLoessian 여왕은 몸져 누웠고, 반역자 Morgan of Orris는 이 틈을 타 테러토리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테러토리는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여왕이 건강을 되찾으면 어머니도 암으로부터 나을 수 있을 텐데, 이를 위해서는 '부적'이 필요하다. 이제 잭은 서부 해안의 어딘가에 있다는 '부적'을 찾아 미대륙을 횡단하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킹과 스트로브는 중간계에 완전히 반해 있었나 보다. 이 작품은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중 네 호빗의 동부대로 여행 부분에서 깊이 감명받은 두 사람이 쓴 일종의 오마쥬에 가까운데,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동쪽으로 떠나는 여행은 부적을 얻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여행으로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올드 포레스트에서 호빗들이 겪은 일처럼 테러토리의 나무가 Jack을 잡아먹으려 하는 부분에서 Jack이 그들을 엔트와 비교하며 "톨킨의 소설에도 이런 것은 쓰여 있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반지의 제왕'은 작품 가운데서 의식적으로 수 차례나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킹과 스트로브는 하이 팬터지의 클리셰를 단순하게 되풀이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야기를 좀 더 현실과 밀접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Jack은 처음에는 Wolf 그리고 나중에는 죽마고우 Richard와 함께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미국 사회의 근저에 깔린 근본주의적 종교의 위험성과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움, 핵실험의 피해(테러토리의 서부지역이 초토화 된 것은 미국의 사막지대에서 실시했던 핵실험의 결과일거라고 Jack은 추측하고 있다) 등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크가 짐과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가며 노예 제도를 비롯한 당시 미국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엿보는 과정과도 상응한다. 주인공의 이름이 Jack 'Sawyer'인 것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각각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에서 인용한 제사(題辭)로 대신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고, 이 작품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 발표 1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출판 되었다는 점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잭은 이름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마크 트웨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닮아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성장소설Bildungsroman로서 팬터지의 영원한 테마 가운데 하나인 성숙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 등장할 법한 인물들로 하여금 톨킨 식 퀘스트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동시대의 정치적/사회적 이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문학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의식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아 참. 그리고 소년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이들이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Stephen King & Peter Straub, 'Black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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