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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1
스티븐 킹 지음 / 밝은세상 / 199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뉴햄프셔의 해안에 위치한 알함브라 모텔 앞에서 한 소년이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물결치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키는 열 두 살 치고는 조금 큰 편인데, 다갈색 머리카락이 소년의 하얀 이마를 쓸어올리고 있다. 소년의 이름은 Jack Sawyer. 저명한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동업자였던 Morgan Sloat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그러나 사업의 지분을 넘기라는 Sloat의 압박은 계속되고, 암까지 어머니의 건강을 조금씩 좀먹어 간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근처 놀이공원의 관리인 Speedy Parker로부터 다른 세계의 존재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그 세계의 이름은 테러토리- 현실 세계의 분신자twinner들이 사는 곳. 어머니의 분신자인 테러토리의 DeLoessian 여왕은 몸져 누웠고, 반역자 Morgan of Orris는 이 틈을 타 테러토리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테러토리는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여왕이 건강을 되찾으면 어머니도 암으로부터 나을 수 있을 텐데, 이를 위해서는 '부적'이 필요하다. 이제 잭은 서부 해안의 어딘가에 있다는 '부적'을 찾아 미대륙을 횡단하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킹과 스트로브는 중간계에 완전히 반해 있었나 보다. 이 작품은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중 네 호빗의 동부대로 여행 부분에서 깊이 감명받은 두 사람이 쓴 일종의 오마쥬에 가까운데,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동쪽으로 떠나는 여행은 부적을 얻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여행으로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올드 포레스트에서 호빗들이 겪은 일처럼 테러토리의 나무가 Jack을 잡아먹으려 하는 부분에서 Jack이 그들을 엔트와 비교하며 "톨킨의 소설에도 이런 것은 쓰여 있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반지의 제왕'은 작품 가운데서 의식적으로 수 차례나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킹과 스트로브는 하이 팬터지의 클리셰를 단순하게 되풀이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야기를 좀 더 현실과 밀접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Jack은 처음에는 Wolf 그리고 나중에는 죽마고우 Richard와 함께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미국 사회의 근저에 깔린 근본주의적 종교의 위험성과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움, 핵실험의 피해(테러토리의 서부지역이 초토화 된 것은 미국의 사막지대에서 실시했던 핵실험의 결과일거라고 Jack은 추측하고 있다) 등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크가 짐과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가며 노예 제도를 비롯한 당시 미국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엿보는 과정과도 상응한다. 주인공의 이름이 Jack 'Sawyer'인 것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각각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에서 인용한 제사(題辭)로 대신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고, 이 작품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 발표 1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출판 되었다는 점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잭은 이름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마크 트웨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닮아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성장소설Bildungsroman로서 팬터지의 영원한 테마 가운데 하나인 성숙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 등장할 법한 인물들로 하여금 톨킨 식 퀘스트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동시대의 정치적/사회적 이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문학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의식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아 참. 그리고 소년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이들이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Stephen King & Peter Straub, 'Black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