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내가, 나도 이 바닥과 혈연관계가 있다고 한 거 기억나?”

“아니. 하지만 계속해 봐.”

“우리 할머니가 키티 오웬이야.”

레이시는 화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내 쪽으로 빙글 돌렸다. 표지는 맥스필드 패리시의 그림이었다. 패리시에 대해서는 나도 좀 알았다. 패리시는 1920년대에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화가였다. 그는 환상적이고 목가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호숫가를 노닐거나 나체로 나무그네를 타는 소녀들을 그렸다. 정교한 묘사로 유명했고, 타이어 광고와 잡지 삽화도 그렸다. 그의 그림이 캘린더와 포스터에 실리고, 그 위에 기업 로고가 인쇄됐다. 어떤 때는 패리시가 로고를 그림에 직접 그려 넣기도 했다. 패리시는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에 있던 화가였다.

레이시가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이게 우리 할머니야. 열여덟 살 때 옷을 홀딱 벗고 패리시 앞에 모델로 섰어. 어때? 너만 잘나신 미술적 배경이 있는 게 아니지?”

“할머니…….” 살아 계시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올해 아흔둘이야. 피부는 아직도 이렇지만, 붉은 머리는 폭삭했어.” 나는 표지의 여리여리하고 창백한 소녀를 들여다보았다. 소녀는 무지갯빛 타일을 두른 전원풍 풀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파우누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숲의 신으로, 사람의 얼굴과 몸에 염소 다리와 뿔이 있다] 같았다.




“할머니에게 이 그림의 프린트가 있어. 패리시가 줬대. 값이 얼마나 나갈지 소더비 기록을 찾아봤어. 별로 안 나가더라. 2백 달러 정도? 우리 집에 내려오는 유일한 미술품인데 아쉬워. 그래도 사연은 끝내줘. 우리 할머니가, 그러니까 키티 오웬이 모델을 선 그림이거든. 바위 위에 누드로 누워서. 패리시가 그림의 프린트를 떴고 프린트가 탁자 위에 쌓여 있었대. 패리시가 키티에게 뭐라도 주고 싶다면서 탁자 뒤에서 프린트 하나를 꺼내서 줬대. 값나가는 액자에 넣고 유리까지 덮은 프린트야. 아주 특별한 선물이지.”

“패리시와 너희 할머니가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해?” 내가 물었다.

“아니. 패리시가 사귄 모델은 따로 있어. 패리시랑 패리시의 아내랑 그 모델, 그렇게 셋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아니 끔찍하게 살았대. 이 그림이 옛날부터 우리 집에 걸려 있었어. 나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옷을 모두 벗고 바닥에 누워서 그림을 바라보곤 했어. 내가 할머니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속에서, 노을을 얼굴에 받으며, 몸을 한껏 뻗는 거야. 천국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말이야.”





레이시 이야기: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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