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티소, 사교계 여인, 1883~1885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 레이시는 유럽회화 경매장에 들어가서 접이식 의자 중 하나에 슬그머니 앉았다. 경매장은 빈자리가 반이었다. 늘 듣던 경매 현장의 들썩이는 흥분감은 간데없고, 느릿하게 올라가는 패들[경매에서 응찰 의사를 알리기 위해 드는 번호판]과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미술시장은 몇 년 전 급락한 뒤 아직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1980년대의 호시절은 갔다. 호시절이 간 것도 문제지만, 그 시절에 일본인들에게 무더기로 팔아치운 저질 프랑스 그림들도 문제였다. 일본인들에게 인상주의에 대한 안목이 생길세라 후다닥 포장해서 얼른 배송해 버렸던 그림들. 소더비와 크리스티를 위시한 매디슨 애비뉴의 미술 거래상들의 창고마다 수북이 쌓여 있던 2급, 3급 그림들을 그런 식으로 처분한 것이다. 그 결과 이제 모두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과시용으로 백화점마다 자랑스럽게 걸어 놓았던 먼지 낀 피사로 그림과 보풀이 선 르누아르 그림을 다시 팔기로 결심하는 날에는, 그래서 자신들이 속아서 샀다는 걸 깨닫는 날에는 진짜 큰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미술시장이 붕괴했다. 딜러들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본인들이 뉴욕에서 산 그림들이 얼마나 저질인지 깨닫고 당장 재구매하라고 성화를 부려도 그걸 피할 구실이 생긴 것이다. “경제가 붕괴됐어요!”

레이시는 경매를 구경하면서, 이름만 길고 들어본 적은 없는 에스파냐 화가의 스케치에 2만 달러나 지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했다. 히스 아코스타가 싱글대며 벽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로 싱글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올라오는 그림마다 유찰[경매 결과 낙찰이 되지 않고 무효로 돌아가는 일.]되고 있었다. 망해가는 경매지만 표정관리를 하는 건가? 레이시가 지하실에서 본 그림들도 나왔다. 레이시의 맘에 들었던 그림들이 심드렁한 관객 앞에 줄줄이 딱지 맞았다. 그런 그림들은 조만간 지하실로 돌아와 낙심한 주인들이 찾아갈 때까지 대기할 일만 남았다. 

이어서 제임스 자크 조제프 티소의 그림이 올라왔다. 커튼콜 후 관객이 쏟아져 나오는 극장 로비를 그린 그림이었다. 오페라해트를 쓴 남자들이 아내들과 줄지어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호사스런 드레스를 입고 마차 값과 맞먹는 모자를 쓰고 모피를 구름처럼 둘렀다. 부(富)를 묘사하는 데는 티소를 따를 화가가 없었다. 티소는 화려한 옷을 치렁치렁 걸치고 자태를 뽐내며 배에서 내리거나 공원을 거닐거나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있는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 



"소더비 지하창고에서 나온 소설"


레이시 이야기: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티소 그림의 소더비 추정가는 50만 달러에서 70만 달러였다. 회전 전시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방 안이 작게 들썩였다. 그림 상태는 좋아 보였다. 이것마저 유찰되면 아코스타는 과시용 미소를 유지하기 어려울 듯했다. 시작가로 35만 달러를 불렀다. 올라가는 패들이 없었다. 아코스타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매사가 외쳤다. “35만 나왔습니다!” 그것이 40만 달러가 되고 이어서 45만 달러가 됐다. 경매사는 그 시점부터 호가를 5만 달러가 아니라 10만 달러씩 높였다. 60만 달러. 70만 달러. 어느새 가격이 백만 달러를 넘었다. 이어 150만 달러에 도달했다. 이때부터 호가가 다시 5만 달러씩 증가했다. 결국 그림은 2백만 달러에 낙찰됐다.

일시적인 일일까? 아니면 미술시장의 불황이 풀리는 걸까? 이게 아코스타가 웃고 있었던 이유일까? 티소를 노리는 응찰자들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나? 경매사가 누가 얼마를 부를지 미리 아는 경우도 흔했다. 레이시는 응찰이 불붙는 것을 보면서 그에 비례해 자신의 맥박수도 빠르게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최음제 광선검이 몸을 가르는 것처럼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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