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도 더 지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큼직한 여행용 손가방이 보였다. 새까만 새벽이었다. 여인은 옷가지를 비롯해 이것저것을 분주히 주워 담고 있었다. 꼬마는 잠이 깼지만, 일부러 일어나지 않았다. 지퍼가 다르륵 하고 잠겼다. 문을 나서기 전, 여인은 자신이 낳은 피붙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려 몸을 돌렸다. 아마 그것이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으리라.
꼬마는 황급히 일어나 와락 여인을 껴안고는 가지 말라 울어 보챘다.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눈망울이 가득 차올랐다. 이윽고 한숨이 깊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다시 짐을 원래대로 돌려놨고, 그녀의 매 맞고 무시당하는 삶도 도로 원상복구 되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나는 ‘여자의 체념’이 주는 어떤 한기를 직감했던 것 같다. 이제는 화조차, 슬픔조차 찾아오지 않는 그런 극한의 체념. 그 싸한 분위기가 꼬마를 깨웠던 것이다. 다만 그 꼬마는 자라면서 자신이 저지른 순간의 이기적 어리광의 결과를, 두고두고 확인하며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다.
여행 가방을 싸면서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버티는 삶의 나날들을 치러냈다. 나는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외국에 간다. 그녀는 아마 회사 작업장에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묶여있을 것이다. 눈이 잘 안 보여 최근 돋보기를 샀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녀가 공장에 남아있기에, 내가 밖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인이 어디로 여행 가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최근 모자는 장기간 불화상태에 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불한당에 인질로 잡혀있던 꼬마의 애원에 ‘가택연금’을 자처했던 그녀였다. 그 뒤론, 자연스레 노동과 빈곤이라는 쳇바퀴에 ‘하차 불가’ 상태에 있었고, 앞으로도 몸이 성할 때까진 계속 무한동력의 소모품으로 거기 감겨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 해방될 것인가. 여인의 인생에 석방 가능성은 있을 것인가. 나의 화내는 모습이 꼭 누군가와 닮아 소스라치게 불쾌한 적이 있었다. 잉카의 마추픽추를 좋아하는 여인은 생에 자신만의 비행기를 띄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여행 가방에 그날의 기억을 담았다. 언젠간 석방된 그녀와 함께 고지대의 만년설에 모조리 그 기억을 얼려버리리라.
-2017.12.11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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