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누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SNS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아마 5년 전 쯤 일거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며 멀리 떨어진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들이었으니까. 난 어려서부터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전전하며 온라인 활동에 익숙했던 터라, 어느 순간 등장한 SNS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SNS가 이전의 온라인 활동과 달랐던 것은 익명성의 유무였다. 그러니까 SNS를 하는 온라인의 나는 더이상 익명의 '누구'가 아닌 진짜 '나'로 활동하게 되는 거다.


확고한 자화상을 갖는다는 건 불확실한 가치들의 혼란 속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만, 그것이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는 따져볼 일이다. 바람직한 자화상은 분명 자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온라인 상에서 많은 경우 자신을 의식하는 건, 남들이 인터넷에 쓴 내 글을 보며 익명의 어떤 '누구'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 '나'를 생각하게 된다는 걸 알게된 순간일 거다. 인터넷 위에 쓰인 몇십자의 글 쪼가리에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그와 동시에 남들에게 보이는, 그리고 보이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머릿 속에 수많은 '남'은 새로운 '나'를 만든다. 남들에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고, 누구보다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취약한 부분은 감추고 평범한 일들은 포장해서 드러낸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다.


주인공 다쿠토는 취업 준비를 하며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 된다. 다쿠토는 새롭게 알게된 친구 중 한명인 다카요시에게서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예전 자신의 친구였던 긴지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 다쿠토의 시선에 비친 긴지는 허세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내 다쿠토는 깨닫는다. SNS에서 위선적이고 현실을 포장해내는 긴지와 다카요시에게 느끼는 거부감이 그의 열등감과 질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쿠토 역시 자신보다 남을 더 의식하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작품이 짚는 건 SNS 상에서 허세나 부리고 다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너머, 허세쟁이을 비판하며 자기는 관찰자인 마냥 그들과는 다르다는 듯 생각하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포인트를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SNS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드러나는 허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풀어오른 자의식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본연의 자신이 아닌 자기 망상 속의 자신에 맞추려는 사람들, 작품은 그 모든 사람들을 꼬집는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에 신경을 쓰는 건 지극히 인간적인 일일 것이다. 사람은 남을 통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SNS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습성이 가상이라는 공간과 맞물려 증폭된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작가는 그런 SNS 상에서 드러나는 현 청춘들의 양태를 잘 집어내고 있다. 


SNS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공자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한 농부가 도구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더럽힌다며 논에 물지게를 사용하지 않고 바가지로 물을 대었다. 그 모습을 본 공자는 농부에게 '참된 삶이란 모두를 멀리하는 것이 아닌 자기 안에 감싸안고, 있는 그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도구에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도구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구를 잘 알아야 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SNS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남을 의식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리뷰 내용과는 별개로 작품에서 다카요시에게 일침을 놓는 미즈키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 생각을 덧붙여 그 말을 정리하자면, 사람은 사회적으로 나이가 차면 자기 인생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자기뿐이란 걸 깨닫는 시기를 맞는다. 언젠가는 돈도 스스로 벌어야 하고, 여권 신청과 같은 행정 잡무도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자기와 똑같이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본인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대면한 그 순간부터는 더이상 스스로에게 관찰자로 남아있으면 안된다. 그런 무수히 많은 악다구니와 같은 각자의 인생이 부딪히는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말로 치장한 나의 삶을 주목해주지 않는다. 자신이 평가받고 싶다면 인제는 꾸며낸 자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야 한다. 언제나 직시해야 하는 건 남이 아닌 본인이어야 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 7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포탈에 <제 7일>을 검색했더니 연관검색어 하나가 따라온다. '제7일읽지마세요.' 안티가 보이콧이라도 시작했나 생각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게 아귀가 맞질 않는다. 내가 파악한 작가 위화는 성향 상 안티라는 단어를 연상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링크를 타고 따라가 보니 대강 사건은 이랬다. 얼마전 교보문고에 진열되어있던 작품들 표지 위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었더랜다. '제 7일 읽지마세요. 당신의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럼 그렇지. 위화가 또 사람 먹먹하게 만드는 소설을 내놨구나. 그리고 위화의 <제 7일>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지금 느껴지는 이 감흥, 마치 어릴 적 집 앞에 쌓아올린 눈사람 같다. 행여 하룻밤 사이에 줄어들까 아쉽다. 


그러니까 7번째 날이라는데, 제목만 보더라도 창세기의 냄새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목차를 넘기자마자 창세기의 한 구절이 나온다. 이만 보더라도 작품은 기독교적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으며 작품 곳곳에 창세기를 암시하는 메타포들이 즐비할 것이 분명하나, 초딩때 매주 토요일 하교길을 점거하던 교회 전도사 할매들한테 성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게 종교인생의 전부인 내게는 그것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능력이 전무하다. (입소문만 듣고 찾게된 벨라 타르의 작품 <토리노의 말>도 2시간 반을 지겹게 보고나서 이게 뭔가싶은 혼란스러움에 인터넷 검색을 하고난 후에야 창세기를 모티프로한 영화라는 걸 알았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당시 나의 참을성은 정말 대단했다. 후...) 아쉬운 대로 성서적 코드는 저멀리 미뤄두고 읽었는데 이 작품, 그럼에도 정말 좋다. 


이야기는 양페이라는 한 인물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작품에서 양페이의 타이틀은 주인공이라기 보단 화자에 가깝다. 이야기가 일자로 선이 굵은 것이 아니라, 여러 독립적인 사건들이 나열된 에피소드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탓이다. 물론 양페이의 인생 서사를 구심점으로 각 에피소드들이 어느정도의 인과는 갖추고 있으나 이야기 구성 상 그건 그리 중요하진 않다. 에피소드들을 각각의 덩어리로 응집시키는 건 특정 사건이 아닌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단지 사건 묘사만으로 인물 간의 관계라는 관념을 이 정도로까지 구체화해내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굴곡의 인생 끝에 자신의 진실한 사랑은 양페이였음을 깨닫는 리칭, 선로에 떨어진 갓난아이 양페이를 데려와 자신의 인생을 바쳐 극진한 사랑으로 그를 길러온 아버지 양진바오,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서로에 기대어 곡진한 삶을 견뎌온 슈메이와 우차오.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코끝이 찡해지고 마음이 먹먹해진다. 


인물들의 관계로 직조된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정서를 거칠게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야기들 속에서 느껴지는 인물들 간의 정서적 유대관계가 끈끈한만큼 그리움도 깊다. 죽음의 두려움보다 앞서는 건 다시는 상대를 못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서로를 그리워 하는 인물들의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시종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 건 그리움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위화는 작품에 결말에 이르러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건한 관계상을 제시하려는 듯 하다. 그리고 해답으로써 그의 시선이 머문 지점엔 사랑이 있다. 그립고 아파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리뷰를 마무리해가는 지금 작품을 읽고 느낀 감상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어떻게 검열을 통과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중국 사회의 부조리한 온상을 적나라하게 담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사회비판적 감상은 잠깐 제껴두고서라도 지금은 이 먹먹함을 머금은 채로 있고 싶다. 작품에 어떤 말을 이어 달아도 진부한 표현이 될 것 같아, 리뷰는 이쯤에서 작품의 결말 부분과 함께 마친다.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은 결말이 될 것 같다.

그가 놀라서 내게로 몸을 돌리더니 질문을 던지듯 의혹에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가자, 저기 나뭇잎이 너한테 손을 흔들고 바위가 미소 짓고 강물이 안부를 묻잖아.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대답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가 말했다. "새내기 때는 주량이 세병이었는데 인제는 힘들다." 동기놈이 질세라 한 마디 거든다. "형 저도 예전엔 네병 마시고도 멀쩡했는데 요새는 예전같지 않아요, 나이 들었나봐요." 그러자 선배가 아직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벌써 나이 걱정을 하냐며 동기놈에게 핀잔을 준다. 하하 둘 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나이 타령이고. 대충 이야기에 마무리를 지어보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정말 걱정되는 건 지금의 나이가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늙을 거라는 사실. 


모든 존재는 세상에 던져진 때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예외는 없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의 권위 앞에서는 영속성을 내려 놓는다. 소실점을 향해 부단하게 나아가는 우리는 그런 점에서 보면 살아간다기 보단 죽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방역업자 조각도 예외는 아니다. <파과>는 사람들에게서 의뢰를 받아 청부 살인(방역)을 업으로 하는 주인공 '조각'의 이야기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사람 죽이는 일을 하며 살아온 조각에게 삶과 죽음은 뭉친 흙덩이처럼 구분이 무의미하다. 


...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더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그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 

구병모 <파과> 255p



그런 주인공 조각의 건조한 삶에 관성을 흐트러놓은 사건이 일어난다. 강 씨와의 만남이다. 강 씨를 향해 마음에 품은 그것이 이성으로서의 사랑인지 인간으로서의 연민인지 존경인지 가리는 것을 떠나, 어쨌건 그로인해 조각의 마음에는 변화가 생겼다. 조각은 그제서야 자신의 삶을 의식한다.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고, 강 씨와의 나이차를 헤아려 본다. 조각은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강하게 느낀다. 조각은 살고 싶다. 방역업자의 신분으로 45년 간 셀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의뢰라는 미명하에 살해해왔으면서.


사실 까놓고 말해 고상하게 표현해서 방역이지, 조각이 해온 일은 사람의 목숨을 헤치는 살인이다. 작품 분량의 거의 대부분이 방역업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줄거리만 놓고 보면 윤리적인 측면에서 조각의 삶을 옹호하는 것은 힘들다. 그럼에도 <파과>가 사람 죽이는 킬러들의 이야기이기 보단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공감하며 읽히는 이유는 작가의 탁월한 내면 묘사나 문학적 스킬(재밌게도 조각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순간에는 과일이 등장한다.) 덕분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보편적 정서에 기인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마저도 작가의 의도와 역량에 달려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수하고 생소한 방역업자의 인생을 걸어온 조각의 삶에 가끔씩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늙어감에 따라 더욱더 삶을 갈망하는 조각은 방역업자이기 이전에 우리들 중 한 명이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결말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서장에서 종장까지 그 쏜살같은 내달림 위에 흩뿌려지는 주인공 조각의 삶과 함께 작가가 본질적으로 긍정하는 주제가 윤곽을 드러낸다. 우리는 막연하게도 나이를 들어가는 것이 무가치, 무의미의 목적지로 이르는 무한히 뻗은 내리막길이라 생각한다. 시간의 축적과 동시에 소중한 무언가를 덜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두렵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문학 작품처럼 기승전결로 무 자르듯 딱 부러지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가치는 결코 나이에 맞추어 찾아오지 않는다.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버텨온 조각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소중한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 작품 전체로 에둘러 은은하게 할 말을 담아내는 작가의 기지가 빛난다. 


파과는 부서진 과일을 뜻한다. 손에 쥐자마자 부서져 버릴 정도로 오래되어 푸석해진 과일. 이미 먹어야 될 때를 한참 지난 그 과일도 분명 잘 익어 단 맛이 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지난 이야기, 부서져버린 과일 따위에서 무슨 가치를 찾는단 말인가? 그런 물음에 구병모는 담담하게 과일 조각을 집어 들어 보인다. 아직 부서진 과일은 빛깔을 잃지 않았다. 구병모의 작품 <파과>는 모든 늙어가는 것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책을 덮은 지금, 더이상 늙는다는 것이 걱정스럽지만은 않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막심 고리키 <은둔자>


은둔자. 사람을 지칭하는 단순한 명사인데, 생략된 어떤 목적성이 부가적으로 붙는다. 다시 말해 (속세로부터) 은둔한 사람이 은둔자인 것이다. 예전에는 세상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개인으로부터 불화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고, 더이상 사람들이 은둔할 수 있는 곳은 없어졌다. 더이상 속세를 등진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현대 사회의 한복판에서 은둔의 단서를 막심 고리키의 눈으로 본 19세기 러시아에서 찾기로 한다.







아사이 료 <누구>


누군가 언젠가는 분명 다뤘어야 할 이야기다. 가장 최근의, 가장 현대적인, 그리고 가장 많은 담론이 이뤄져야 할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가깝게 만들었으나,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 것. 누구나 그 정체모를 불편함을 인식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토록 고질적인 소통의 불안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 너무나도 친숙한 도구를. 그 담론의 최전선에 아사이 료가 있다. 







위화 <제 7일>


중국 역사의 어두운 면을 들추는데 날카롭고 적확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펜대를 잡는 위화.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느꼈던 그의 필치는 더없이 온건했다. 위화는 내게 소설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에세이 작가다. 개인적으로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 결과는 물론 모옌도 대단하지만 위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던 나였기에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이번에는 위화의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집어볼 차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의 심장]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양문학사의 거대한 흐름에 리얼리즘이 잉태된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손에 꼭 쥐어야 하는 중요한 코드는 '비판'입니다. 낭만만으로는 더이상 견딜 수 없는 팍팍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큼 현실 비판의 각을 세우는 데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 없었죠. 리얼리즘이 막 태동하던 당시의 현실은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비판이 될만큼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리얼리즘은 그 모순적인 현실을 효과적으로 적중시키기 위해 과녁을 오조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궁수가 거리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해 목표물이 아닌 허공을 겨냥하는 것처럼요. 비판의 파급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현실을 더욱 비틀어 그려내는 것이지요.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을 읽어보면, 세밀하고 깨알같은 묘사로 당시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반면 지나치게 평면적인 인물들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모순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러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의뭉스런 속내를 보여주는 것 같이요.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에 큰 빚을 지고 있기에 단순한 허구적 소설 속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습니다.


작품 <개의 심장>은 러시아적 리얼리즘의 배경 위에 집필된 미하일 불가꼬프의 중편소설입니다. 떠돌이 개, 샤릭은 사람의 뇌하수체를 이식 받습니다. 사람의 뇌하수체를 이식받은 샤릭은 예상과 다르게 점점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며 외양적으로는 사람의 용모를 갖춰갑니다. 샤릭은 주택관리소의 쉬본제르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배우고 고양이 청소라는 이상한 공직까지 받게 되지요. 원래 개였던 주제에 인간인 척 행동하지만 무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주변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결국 연이어 사고를 일으키던 샤릭은 강제로 다시 개로 돌아가게 됩니다.  


개가 인간 행세를 하는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리얼리즘'의 단서를 집어 들어야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작품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작품이 집필된 20세기 초, 러시아는 세 차례 굵직한 혁명을 겪습니다. 그 결과로 레닌을 위시하여 과격한 사회주의자들인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집권하게 되지요. 혁명의 구호로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울부짖었으나 정작 혁명의 결과 노동자들에게 찾아온 현실은 여전히 변함없이 어두웠습니다. 


작품 <개의 심장>에서 작가 불가꼬프가 가장 공을 들여 부각시키고자 한 것은 작가 자신이 느끼던 혁명에 대한 위화감일 것입니다. '그래 니들이 옳다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리고 뭐가 나아졌지?' 현실 극복의 길인 줄 알았던 혁명. 그러나 그 이후에 긴장된 사회 분위기, 혁명만이 오직 하나의 답이라며 밀어 붙이는 과격함, 반혁명적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혁명의 배타성. 작가는 혁명 이후의 시대상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쉬본제르와 샤릭에게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주의를 과격하게 받아들인 샤릭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고압적인 태도 묘사에 날이 매섭습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이야기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줄곧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쉬본제르라는 인물이 등장 횟수는 적어도, 작가의 집필 의도를 이해하는 단서로서 비중이 큰 인물이라 보는데, 그의 직업이나 대화 방식 등의 사소한 요소들이 당시 러시아 사회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직관적인 파악이 어렵더라구요. 피상적인 역사적 지식에 의지한 감상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구체화한 역사의 촉감에 비교조차 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러시아인이었다면, 내가 동시대인이었다면' 하고 자꾸 가정을 하게 됩니다. 그랬더라면 작품이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여러 이유로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