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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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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야자 때 옆친구가 법정의 '무소유'를 읽더니 대뜸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짧은 머리에 동그란 얼굴, 여드름이 뽀송한 얼굴에 환한 미소로 눈물 두 줄기가 흐르는데
영락없는 부처님 상이었다.

웃는 눈물을 흘리던 녀석은
옆 친구에게 셔터칼을 빌리더니
입고 있던 체육복 주머니 안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나 이제 무소유로 산다"

별 미친놈 다보겠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눈물이 너무 진지했다.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앗, 저것은 해탈의 미소?"라고 할 만 했다.

야자가 끝난 10시, 녀석은 차비가 없다며 나에게 1000원을 빌렸다가
체육복 주머니 속에 넣고 그대로 잃어버렸다.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며
다음 날 짜증을 내는 녀석은, 다시 부처에서 속인이 돼 있었다,
(물론 구멍난 체육복 바지도 다시 알뜰하게 꿰맸다)

아무튼 스님들 책은 치명적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되든 말든, 내가 하든 남이 하든
정글같은 무한 자본주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한국 사회에 울림을 준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의 얘기다" "나도 절에 가면 그런 얘기할 수 있겠다"고
저평가되기도 했었다. 바람핀 배우자를 쉽게 용서하는 부분에선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재고 따지고 헤아리고 계산하고 배경을 먼저 보는 세태에
'스님의 주례사'는 무릎을 탁탁 치게 만드는 구절이 참 많다.

인상적인 구절이 참 많은데 하나만 옮긴다.

"돈이 없어서 돈 있는 남자를 구하고,
외로워서 위로해 줄 사람을 구합니다.
이건 지극한 이기심에서 시작된 관계입니다....

내가 상대를 재게 되면 그 사람 역시 (나를) 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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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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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부들 잘하고 외국물까지 먹은 경제학자들은,
적어도 이번 금융위기와 관련해 '꿀 먹은 벙어리'였음이 틀림없다. 

학문하는 사람 입장에선 분석도 중요하지만
전망과 예측을 통해 위기를 막아내는 게 사회적 역할인데 그걸 방기했다.

장하준 교수는 루비니 교수처럼 금융위기를 예측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책에서는 금융 위기에 대해 정직하게 경제학자들의 한계를 토로했다.
불편한 진실을 까발리는 '정직한 경제학 전도사'쯤 되시겠다.

전작인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안인들' 모두
'자유시장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thing 7)'는 사실이 핵심이다. 
국가와 시장이 착종된 자본주의로 성장한 선진 국가들은
개발도상국들이 이를 따라오는 걸 막기 위해 '자유시장'이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이게 위선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전작과 비교해 일견 새로울 건 없는 내용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침은 명확하다. 좀 더 큰 정부로 복지를 늘리고 인적 자원 투자가 많아지고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는 것. 현 정부와는 대척점에 서 있으니 장하준 교수는 '좌파'딱지가 곧 붙겠다.

교훈은 두 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 보자'가 첫째다.
사실 3개 신문에서 좌파로 매도된 DJ때부터 한국사회 양극화가 시작됐고
역시 좌파 낙인이 붙은 참여정부 때는 한미FTA, 한나라당 대연정 등이 추진됐다.
오히려 가장 시장친화적일 것 같은 MB는 국가 재정을 풀어 금융위기를
극복하려는 '박정희식' 방법을 추진했다. (문제는 정치도 '박정희식'이란 거다.) 

둘째, 책 간간히 느껴지는 '부족의 철학'이다. 자기가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오만에 빠져 언젠가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다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기에 실수를 덜 하는 것 같다. 

경제학자는 물론 뉴욕 월가 금융전문가들 스스로 한 인간으로서 복잡한 '금융계'를
이해하는데 명확한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 '다 잘되고 있다'는 맹신을 기반으로
모래성을 쌓으면서 명성을 얻고 돈을 벌었다.

물론 음악은 꺼졌고 파티도 끝났다. 이제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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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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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도 제목이지만 내용도 내용이다. 노골적인 형용사와 부사를 제외한 성행위 장면 묘사는 세미세미한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킨다. 큰 흥분(?)없이 책장을 넘기면, 저자인 로빈 베이커가 생물학자다운 시각으로, 왜 인간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찬찬히 설명해준다. 태고적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종족 보존의 욕구, 우성 유전자를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세밀하게 설계된 인간의 정자와 난자.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섹스, 불륜 등을 설명해준다. 영화나 소설에서 그냥 ‘짜릿함’ 정도의 이유로 언급되던 인간의 외도가 결국은 생물학적인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부부관계 중 태어나는 아이의 10%가 외도의 결과라는 주장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관점, 즉 일종의 ‘계(界)’로 세상을 본다. 저자는 생물학자답게 생물학적 관점으로 정자전쟁을 설명했다. 하지만, 조그만 다른 ‘계’로 이 정자전쟁을 본다면, 실제로 정자전쟁은 없다.
  먼저, 재력있고 몸이 건강한 남자에게 여자가 유혹되는 것은 이 책에서 쉽게 설명된다. 여자의 자손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키우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이건 지금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통하는 코드다. 하지만, 재력가와 결혼하고 나서도 애를 낳을 생각이 없는 여자도 있고, 재력이나 건강 외에 다른 기준이 여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남자가 형편없이 가난하고 키도 작지만, 로맨틱하다거나 똑똑한 면이 있어 여자의 선택을 받을 수도 있다. 감수성이나 지능의 발달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본능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로맨스 영화에선 키작고 못생긴 애들인 프로포즈하거나 프로포즈받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 그 순간 공상과학영화가 돼 버리니깐.
 
  장면 묘사와 연관된 설명도 문제가 많다. 언뜻 보면 인간의 기묘한 바람기가 설명되는 듯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저자가 취사선택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하다. 방법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말로 설명을 위해 인위적으로 상황을 조작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책에 묘사된 상황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존재(is)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may)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 우성 유전자를 찾아 평생 황홀하게 방황하는 존재라면, 시골에서 평생 백년해로하는 부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행기를 타고 다른 여자와 출장 갈 기회가 없어서? 집 앞에 잔디가 없어 건장한 정원사를 고용하고 유혹할 기회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전제가 있다.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와 동일한 자손을 무수하게 많이 만들고 싶어하는, 어떤 탐욕적인 존재로 묘사된 전제가 마음에 걸렸다. 특히 남자의 경우 어디서나 총알을 난사하는 본능을 가진 것처럼 설명되곤 하는데, 이는 확실히 잘못된 전제이다. 그건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로빈 베이커의 전제가 맞는다면, (세계 4위의 과밀국가이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선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손을 남기고자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깐. 이와 대비되는 끔찍한 통계가 있다. 국내 모 자동차 회사의 직원들 출산율을 조사해보니, 정규직의 경우 평균 1명이 넘지만 비정규직의 경우 0.8명 정도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프랑스의 경우 동거혼을 합법화했더니 출산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골드미스로 살아가는 여자나, 매월 적자가 나는 잡지 발행을 위해 평생 혼자 사는 남자도 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에는 과도한 회사일 때문에 섹스리스(sexless)로 사는 부부들도 많다. 이들의 유전자는 '평생 순결의 여신'이 내려준 것인가?
  
  결국 인간의 자손에 대한 욕심은 생물학적 시각을 넘어 체제나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 주변에서 자본주의적인 제약이나, 전쟁 후의 불안과 같은 정치사회적 요인이 인간의 자손 번영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생물학적 관점 외에 다양한 변인이 인간의 성생활에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각이 아니겠지만, 인간의 외도가 생물학적이나 사회적으로 충분히 이해는 간다. 평생 한 식당에서 된장찌개만 먹고 살아야 한다면 지겨울 것이다. 그래서 가끔 외식도 하고, 최고 좋은 외식 메뉴로 뷔페 코스가 인기를 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상황 판단이 냉철한 동물이다. 이성이 있어 미래를 내다본다. 뷔페를 먹고 싶지만, 당장 내일 차비와 커피값이 걱정돼서 안 먹는다. 그런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선 일부러 된장찌개만 (좀 끔찍하지만) 평생 먹을 줄도 안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과 곤란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우성 유전자를 찾아 다부다처제로 넘치지 않고, 그나마 대부분 일부일처제로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인생은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도 짧다.’는 말에 깊게 공감하는 나에게, 결국 정자전쟁은 법칙도 경향도 될 수 없다. 정자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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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 화폐전쟁 1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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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윤복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대부분 여자라고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다. 영화 ‘미인도’,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민선, 문근영이 신윤복 역으로 등장하니깐. 하지만 실제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은 분분하다. 파급력이 큰 대중매체에서 여자로 설정하니 다들 여자로 알고 있는 것뿐이다. 그럼 왜? 재미있으니깐. 역사적 사실이나 논란은 조금만 쓰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조미료를 팍팍 쳐주면 사람들이 그 맛에 쉽게 이끌리니깐, 그런 팩션(faction)을 쓰는 거다.

 이 책, 팩션이다. 사실(fact)에 허구(fiction)를 더했다는 말이다. 화폐 패권을 잡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부터 지금의 FRB까지 온갖 나쁜 짓들을 서슴지 않았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움직여, 링컨도 죽이고 심지어 1차 세계 대전도 일으켰단다. 그렇게 막대한 세력이 있다면, 그동안 있었던 역사의 진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금융 규제는 어떻게 생겨났고, 자본가보다는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각종 정책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금융 자본에 좀 더 우호적일 존 케리가 당선되지 않고 오마바가 미국 대통령이 된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감수자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 책 곳곳에 ‘음모론’적 시각이 깊게 배어 있다. 음모론이라고 해서 폄하할 건 아니다. 나름 타탕한 근거와 논리를 갖추면 되니깐. 문제는, 감수자의 말처럼 음모론은 ‘폭넓은 시각을 갖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협하고 근거 없는 낭설에 빠져들 가능성을 높게 할 뿐이다. 몸에는 좋지 않은 설탕이, 자꾸 단맛으로 유혹하듯 말이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음모론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IMF, IBRD같은 국제기구들이 위기에 빠진 한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어떻게 망쳐왔는지에 관한 사실이라든가, 달러를 기축통화로 선점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금융 자유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가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해 시작된 것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동전의 이면처럼 다른 사실이 존재함에도 이를 애써 외면하려 한 것은, 이 책의 객관성을 크게 떨어뜨린다. FRB가 미국 민간은행들의 연합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금리 결정 수행 등 실질적으로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는 미국 대통령이 FRB의장과 이사 7명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정치’가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구조다.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이 책의 결론이다. 그대로 옮겨보자.

p.433, "강한 부의 창조력과 안정적인 화폐 시스템은 중국을 세계의 부가 집중하는 중심이 되게 해줄 것이다.“
p.445, "황금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 위안화는 과도한 채무의 욕심으로 무너진 국제 금융의 폐허를 딛고 우뚝 설 것이며 중화문명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다시 열리는 줄 알았다. 결국 이 얘기 하려고 그렇게 빙빙 돌아왔다. 미국은 안 되니, 중국이 전세계 금융의 ‘제왕’이 되자는 말이다. 글로벌 거버넌스(세계적인 협력과 협치)를 통해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을 공동으로 통제하자는 주장은 하지 못할망정, 자기 나라만 우뚝 세계의 중심에 서겠단다. 중국에서 왜 이 책이 그렇게 잘 팔렸는지 쉽게 이해간다.

 마지막으로 가장 웃긴 사실 하나. p. 229을 보면, 금융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외교협회 회원들이 미국의 메이저급 매체에 포진해 여론을 왜곡한다고 한다. 저자가 지적한 매체 중 출판 업계에는 ‘랜덤하우스’라는 출판사도 있다. ‘화폐전쟁’은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나왔다. 금융자본을 위해 여론을 왜곡한다는 출판사의 한국 법인에서, 금융자본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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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4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윤진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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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시기에 어려운 책 읽었다. 350 페이지의 책을 열흘 동안 잡았다. 손이 안 갔다는 얘기다. (솔직히 이 글도 그리 손이 안 간다.) 이 책을 읽기 전, 같은 작가의 ‘아프리카인’을 먼저 읽을 땐 거친 땅의 사람 온기 같은 것들이 느껴졌는데, ‘조서’는 달랐다. 서러운 드라마 보고, 혼자 소주 까고, 헤어진 옛 연인 생각하면서 극단의 극단으로 치달아, 마침내 신도 모르는 궁극의 카타르시스적인 슬픔과 고민에 빠지고자 그렇게 책장을 넘겼나 보다.

 프랑스 작가에 데인 적이 있다. 멋모르는 고삐리때, 담임이 추천도서랍시고 교실 뒷벽에 쫘악 200여권의 책목록을 붙인 적이 있다. ‘이건 뭐야~?!(김구라 말투)’라고 본 게 사르트르의 ‘구토’. 어떻게 도서관에서 빌려 누런 종이 넘겨가면서, 정말 구토날 정도로 어렵게 보던  기억. 뭐 여차여차해서 ‘실존’이란 낯선 단어를 2%도 안 되게 이해했던 고삐리 시절.

 세상 만사가 모두 행복한 게 아니고, 슬픈 것들을 다루다가, 그 슬픈 것의 끝이 어디인가 파고 드는데, 인간 때문에 슬픈 일이 있고,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왜 자신이 살아 밥을 먹고 글을 읽고 책을 봐야하는지에 대한 가치의 물음, 그 물음의 해답을 찾다보니 실(實)제 존(存)재 하는 인간이 좀 더 주제적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냐고, 묻고 감히 요구하는 사람이 ’르 끌레지오‘다.

 그래서 ‘조서(調書)’를 쓴다. 주인공인 ‘아담 폴로’가 정신병자인지 탈영병인지 며느리도 작가도 모른다. 하는 짓이 괴이하기도, 쓸모 있어 보이기도, 용기 없어 보이기도, 용맹하게 보이기도 제정신인 것 같기도 하다가 실어증에 걸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작품 해설에 따르면,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간 거란다. 서구 문명과 전쟁은 작가에게 ‘괴물’과도 같아서 실존적 인간과 타협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으니, 언어를 몰랐던 태초의 인류나 혹은 식물(植物)로까지 회귀해 주인공은 말을 하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1963년에 조서가 쓰였으니, 이 말이 맞는다면 작가의 통찰력이 대단한 거고, 이 말이 틀리다면 주인공인 아담 폴로는 그냥 ‘겁쟁이’일 줄 모른다.
 
 그런데 겁쟁이면 어떨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자신을 짓밟는 일상에서, 자신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말없이’ 그냥 떠난 것이다. 겁쟁이인 게 오히려 솔직하고 빠르다. 사람들의 편견 가득한 시선과 말 속에,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성과 자아가 짓밟힐 일을 계속 바라볼 수 없을 테니깐. ‘너무도 많이 세상을 보다 보니 세상이 그의 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버렸다.(p.95)'처럼 말이다. 차라리 내가 먼저 벗어나, 존재의 다른 이유를 찾으면 서로가 속 편한 일이 될 수 있으니깐.

 주인공이 얼마나 겁쟁이라서 말까지 잃었는지,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의 시각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칠십 평생, 많은 사람 만나고 공부하면서 살아도 끝끝내 얻지 못하는 게 객관․ 합리․ 중립 따위가 아닐까. 그냥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고, ‘조서’의 주인공 아담 폴로 같은 사람도 있다는 ‘아량’ 정도를, 서로가 이해해주길 작가는 간곡히 바란 것 같다. 그런 아량이라도 있어야 인간이 ‘실존(existence)’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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