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4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윤진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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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시기에 어려운 책 읽었다. 350 페이지의 책을 열흘 동안 잡았다. 손이 안 갔다는 얘기다. (솔직히 이 글도 그리 손이 안 간다.) 이 책을 읽기 전, 같은 작가의 ‘아프리카인’을 먼저 읽을 땐 거친 땅의 사람 온기 같은 것들이 느껴졌는데, ‘조서’는 달랐다. 서러운 드라마 보고, 혼자 소주 까고, 헤어진 옛 연인 생각하면서 극단의 극단으로 치달아, 마침내 신도 모르는 궁극의 카타르시스적인 슬픔과 고민에 빠지고자 그렇게 책장을 넘겼나 보다.

 프랑스 작가에 데인 적이 있다. 멋모르는 고삐리때, 담임이 추천도서랍시고 교실 뒷벽에 쫘악 200여권의 책목록을 붙인 적이 있다. ‘이건 뭐야~?!(김구라 말투)’라고 본 게 사르트르의 ‘구토’. 어떻게 도서관에서 빌려 누런 종이 넘겨가면서, 정말 구토날 정도로 어렵게 보던  기억. 뭐 여차여차해서 ‘실존’이란 낯선 단어를 2%도 안 되게 이해했던 고삐리 시절.

 세상 만사가 모두 행복한 게 아니고, 슬픈 것들을 다루다가, 그 슬픈 것의 끝이 어디인가 파고 드는데, 인간 때문에 슬픈 일이 있고,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왜 자신이 살아 밥을 먹고 글을 읽고 책을 봐야하는지에 대한 가치의 물음, 그 물음의 해답을 찾다보니 실(實)제 존(存)재 하는 인간이 좀 더 주제적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냐고, 묻고 감히 요구하는 사람이 ’르 끌레지오‘다.

 그래서 ‘조서(調書)’를 쓴다. 주인공인 ‘아담 폴로’가 정신병자인지 탈영병인지 며느리도 작가도 모른다. 하는 짓이 괴이하기도, 쓸모 있어 보이기도, 용기 없어 보이기도, 용맹하게 보이기도 제정신인 것 같기도 하다가 실어증에 걸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작품 해설에 따르면,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간 거란다. 서구 문명과 전쟁은 작가에게 ‘괴물’과도 같아서 실존적 인간과 타협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으니, 언어를 몰랐던 태초의 인류나 혹은 식물(植物)로까지 회귀해 주인공은 말을 하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1963년에 조서가 쓰였으니, 이 말이 맞는다면 작가의 통찰력이 대단한 거고, 이 말이 틀리다면 주인공인 아담 폴로는 그냥 ‘겁쟁이’일 줄 모른다.
 
 그런데 겁쟁이면 어떨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자신을 짓밟는 일상에서, 자신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말없이’ 그냥 떠난 것이다. 겁쟁이인 게 오히려 솔직하고 빠르다. 사람들의 편견 가득한 시선과 말 속에,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성과 자아가 짓밟힐 일을 계속 바라볼 수 없을 테니깐. ‘너무도 많이 세상을 보다 보니 세상이 그의 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버렸다.(p.95)'처럼 말이다. 차라리 내가 먼저 벗어나, 존재의 다른 이유를 찾으면 서로가 속 편한 일이 될 수 있으니깐.

 주인공이 얼마나 겁쟁이라서 말까지 잃었는지,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의 시각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칠십 평생, 많은 사람 만나고 공부하면서 살아도 끝끝내 얻지 못하는 게 객관․ 합리․ 중립 따위가 아닐까. 그냥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고, ‘조서’의 주인공 아담 폴로 같은 사람도 있다는 ‘아량’ 정도를, 서로가 이해해주길 작가는 간곡히 바란 것 같다. 그런 아량이라도 있어야 인간이 ‘실존(existence)’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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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 - 우리가 몰랐던 특별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쿠바를 사랑한 사람들, 개정판
천샤오추에 지음, 양성희 옮김 / 북돋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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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공부를 하든 제일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와 철학이다. 복잡한 공식으로 이뤄진 과학도 과학사를 알아야 현대 과학을 이해할 수 있고, 수요와 공급이 유일한 독립변수 같은 경제학도 성장과 분배를 놓고 치열한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그 외의 학문들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한 나라의 문화와 사람을 이해하는데도 당연히 역사와 철학이 필요하다.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는 역사와 문화로 쿠바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 안에 쿠바인의 철학이 만들어졌다. 쿠바인이 아니라 대만인이 썼다. 이 책은 쿠바 여행 소개기가 아니다. 쿠바의 역사를 소개하고 춤, 노래, 미술, 종교 등의 문화를 정리했다. 쿠바로 여행 갈 사람들이 볼 실용서는 아니지만, 이 책을 여행에 참고한다면 쿠바 문화를 한층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여행은 단순견문기가 아니라 문화체험기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한 단어로 쿠바를 정리하라면, ‘아픔 속의 여유’라고나 할까.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가 지정학적 이유로 이렇듯 많은 열강들의 침탈과 식민 지배 속에 노예제도와 수탈로 신음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늘날 쿠바가 가진 여유를 보면 더 그렇다. 딱히 지나치게 낙천적이라는 말밖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잔혹한 역사 뒤에 매혹의 문화를 뽐내고 있었다. 독특한 혼합종교인 ‘산테리아’, 흥겨운 라틴음악 ‘손(Son)'을 바탕으로, 쿠바는 고난한 삶에서도 낙천적인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국도 지정학적 이유로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 역사를 갖고 있다. 다만 우리는 강자의 그늘 아래 근대라는 회색의 터널을 힘겹게 건넜다면, 쿠바는 홀로 웃고 노래 부르며 쾌활하게 아바나의 아름다운 해변 길을 걸어간 셈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이 책은 지금 쿠바의 모습을 전하고 있진 않다. 쿠바는 반세기 가까운 미국의 봉쇄 정책에도 불구, 독특한 사회주의 체제로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남미 좌파 3인방인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와 함께 민중무역협정(People’s Trade Treaty)을 체결해 새로운 대안 체제를 모색 중이다. 무역협정에 따라 볼리비아는 풍부한 광물자원을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싼 값에 공급하고, 두 나라는 미국 거대 곡물업체의 무차별 공격으로 수출이 급감한 볼리비아의 콩을 수입하고 있다. 또 의료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인 쿠바는 볼리비아 장학생 5천명에게 의료교육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사망 40주기를 맞았던 남미 혁명가 체 게바라의 목소리가 새롭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키우자!” 그가 불가능한 것들로 상상한 많은 것들이 쿠바를 비롯한 남미에서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 쿠바는 아팠지만 웃는 중이다. 아니, 아팠기에 더 활짝 웃을 수 있다.

* 관련 영상 자료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 - 카리브해의 판도라 쿠바 편’,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 여행기를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추천합니다. 특히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흥겨운 ‘손(Son)’음악을 직접 듣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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