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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면서 친구들의 소중함을 잊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요즘이다. 우정의 소중함을 간과하여 큰 실수를 하는 날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 주변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두려 하거나 깊은 관계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 것, 그러나 아무리 강한 나라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 이 두 가지 방침만 염두에 두면 어리석은 짓은 피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은근히 친구들의 순위를 매겼었다. 마치 생태계의 피라미드처럼, 가장 깊은 관계의 친구, 그보다 덜 깊은 관계의 친구, 그냥 아는 친구,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그보다 덜 좋아하는 친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근본적인 개념이 달라졌다. 지금 내게 친구라는 개념은 나 자신이 아닌 '내 주변인, 혹은 같은 시기에 출발해 같이 성장하는 동시대인'이라는 의미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소설 <마이너리그>에 나오는 네 명의 친구들은 분명 '서로를 사랑하는 친구들'은 아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서로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정을 나눈다. 그들이 끌고 가는 삶의 시간이 불현듯 뼛센 가시처럼 목구멍을 깊숙이 찔러온 까닭이다. 추상적인 의미로서의 삶, 그 지난함의 공유랄까. 친구란 그래서 가장 좋은 친구든 좀 덜 좋은 친구든 간에 세월이 지나고 보면 다들 어딘지 안쓰럽고 등을 두들겨주고 싶은 모양이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아빠 친구의 신년 인사 카드를 보고 가슴 한 켠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여보게' 로 시작해 '같이 힘을 내세'로 끝나는 그 카드에는 친구를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우려는 한편 자기 자신의 삶도 위로하려는 의지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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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옷을 차려 입고 날씬한 몸을 흔들며 춤추는 동생을 보고 엄마는 쟤 데려가는 남자는 참 복 받은 거라고 했다. 생활력 강하지, 얼굴 예쁘지, 날씬하지, 싹싹하지.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겉모습에 신경 쓰지도 않고, 붙임성이 좋은 것도 아니며, 생활력이 강하기는 커녕 혼자서는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 것 같다는 주위의 평판 속에 있다. 이게 나에 대한 평판의 전부라면 너무 암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런 내 단점들을 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중이다. 일종의 '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내 삶의 전부를 바치겠다고 결심하였다. 생활이 고달퍼도, 나를 둘러싼 상황이 쉽게 허락하지 않아도, 결코 그 일을 포기하거나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때문에 나는 나를 데려가는 남자는 참 너그럽고 내가 하는 일을 나와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아직 어리고 순진한 건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한가지 일에만 매달려 그 밖의 다른 것들엔 무신경한 삶이라니. 그것을 열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무모함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고흐가 예술은 질투가 심해 2순위가 되는 것을 참지 못해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그것을 '선택'하기로 한다. 

사랑이 틀림 없다고 확신한다. 소설 덕분에 웃기도 울기도 하고 그 전까진 무관심하던 다른 영역의 것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려 노력하니 말이다. 그것은 깨달은 순간 얼마나 놀라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그 사랑이, 열정이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선자들의 말을 마음 한 켠에 간직은 할 것이다.

'결과가 출발점과 중간 과정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결과가 왜 아니 중하겠는가. 그러나 내 모든 삶을 바쳐서 얻은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내 선택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절대로 의미 없는 짓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들린다. 

진심이 무엇인지를 깨달은지 9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그도 많이 잊혀졌다. 그가, 아직 스물 둘인 나에겐 진심의 고향이자 촉매였을까. 그를 잊어감과 동시에 진심의 효용성과 그것을 구사하려는 의지까지 잃어갔던 모양이다. 그래,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을 절대 잊지 말자.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고 영원히 그렇겠지만,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짓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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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우선 <폐허의 도시>는 어디에나 있다, 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적인 의미 뿐 아니라 은유적인 의미로서도 우리 도처에 널려 있다. 실제적인 측면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문이나 뉴스를 조금만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은유로서의 <폐허의 도시>속에 감금되었던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아빠가 갑자기 불가피하게 가게를 오픈하게 된 바람에 내가 종업원으로 고용되어 규칙적으로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내린 아빠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지만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건비를 줄이는 것 역시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았다. 아니, 한 가지 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가게로 달려와 일을 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고 극장에 간다든가 하는 문화 생활을 즐길 수도 없었다.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체 손님 예약이 있으니 지금 당장 오라는 호출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었다. 격하게. 순간적인 충동에 못 이겨 이성을 잃은 척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빠의 절망적인 어조에 설득 당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리적인 해방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것처럼 보였다. 마치 소설 속 <폐허의 도시>처럼 그 당시 내 삶은 '가게'라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 아무런 조치 없이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을 때 탈출구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위에 가깝다. 때로는 그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잔뜩 허기가 진 사람이 음식을 먹어치우듯 독서에만 골몰했다. 학교에서도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보다는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고, 수업이 끝나고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거나 말거나 내 눈은 책 속의 활자를 쫓기 바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나는 그것이 내 나름의 생존 방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원래 독서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긴 해도, 그 정도로 몰입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개인적인 시간이 워낙 없다 보니 이러다가 내 꿈이 좌절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 심리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참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이미 <폐허의 도시>의 시민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동시에 나는 더 이상 <폐허의 도시>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을 뿐. 그 고정된 일상에 몸을 맡긴 채 책 속에서 기쁨을 찾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존재여부를 알 수 없는 '끝'을 향하여 견디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사는 궁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안나와 이웃들이 편지를 끝맺을 때까지 살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진정한 끝'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 다 할 때까지는 쉼 없이 전진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삶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열정!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을 위협받는 절대위기의 상황에서 그 열정은 더욱 불타오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엄숙한 종류의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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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며칠간 이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주일인 것도 같고 2주일이 걸린 것도 같다. 환상의 책 속에 빠지면 이렇게 시간 관념도 흐릿해지나보다. 나는 '위대한 소설'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인간의 삶과 내면을 향한 집요한 탐구 정신이 본받을만 했다.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상호텍스트 매체들에도 관심이 갔다. 마지막 문장-나는 그 희망을 가지고 산다-을 읽고 나서, 나는 언젠가 오스터 노벨 문학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술자인 '짐머'의 추리력을 지켜보면서 작가가 왠만큼 명민하지 않으면 이런 소설은 절대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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