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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우선 <폐허의 도시>는 어디에나 있다, 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적인 의미 뿐 아니라 은유적인 의미로서도 우리 도처에 널려 있다. 실제적인 측면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문이나 뉴스를 조금만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은유로서의 <폐허의 도시>속에 감금되었던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아빠가 갑자기 불가피하게 가게를 오픈하게 된 바람에 내가 종업원으로 고용되어 규칙적으로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내린 아빠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지만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건비를 줄이는 것 역시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았다. 아니, 한 가지 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가게로 달려와 일을 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고 극장에 간다든가 하는 문화 생활을 즐길 수도 없었다.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체 손님 예약이 있으니 지금 당장 오라는 호출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었다. 격하게. 순간적인 충동에 못 이겨 이성을 잃은 척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빠의 절망적인 어조에 설득 당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리적인 해방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것처럼 보였다. 마치 소설 속 <폐허의 도시>처럼 그 당시 내 삶은 '가게'라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 아무런 조치 없이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을 때 탈출구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위에 가깝다. 때로는 그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잔뜩 허기가 진 사람이 음식을 먹어치우듯 독서에만 골몰했다. 학교에서도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보다는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고, 수업이 끝나고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거나 말거나 내 눈은 책 속의 활자를 쫓기 바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나는 그것이 내 나름의 생존 방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원래 독서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긴 해도, 그 정도로 몰입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개인적인 시간이 워낙 없다 보니 이러다가 내 꿈이 좌절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 심리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참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이미 <폐허의 도시>의 시민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동시에 나는 더 이상 <폐허의 도시>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을 뿐. 그 고정된 일상에 몸을 맡긴 채 책 속에서 기쁨을 찾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존재여부를 알 수 없는 '끝'을 향하여 견디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사는 궁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안나와 이웃들이 편지를 끝맺을 때까지 살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진정한 끝'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 다 할 때까지는 쉼 없이 전진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삶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열정!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을 위협받는 절대위기의 상황에서 그 열정은 더욱 불타오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엄숙한 종류의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