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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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소설을 읽었는데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싶었을 만큼 재미있었다. 난 원래 이런 애정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유명하다기에 간지러움을 무릅쓰고 한 번 시도해본 것이다. 결과는 ‘굉장히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와 같은 상반된 의견이 나왔다.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은, 적어도 8~9년이나 되는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10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러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 때문이었고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8~9년이라는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길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8~9년이 아니라 8~9일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고, 한 두 달이 지나면 몸이 저절로 그 사람에게로 향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도저히 사랑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자존심 따위는 집어 던진 지 이미 오래이고 무모하다고 생각될 만큼 저돌적이다. 그래서 8~9년 동안이나 떨어진 채로 다른 사람과 동거를 해온 주인공 남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서로 상처 받았다면, 용서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말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있다. 이럴 땐 냉정해져야 하고, 저럴 땐 사랑을 표현해도 되고, 하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까, 혹은 저 사람에게 상처를 주니까 하는.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네가 밉다고 그러면서 달려가 안기면 안 되는 것일까. 누가 상처를 받고 화를 내고 미래가 두렵고 하는 문제들을 다 떠나서?

 

괴로운 것은 내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갔다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플 정도로 그리워하다가도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고 싸늘하게 식기를 반복하는. 만약 둘 중 하나의 상태에만 머무른다면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을 머뭇거리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들이 믿는 것은 자신의 냉정이나 열정 같은 감정이 아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 같은, 안심이 되는 누군가이다. 용서해주고, 투덜거리고, 왜 청소를 이 모양으로밖에 하지 못하는 거냐고 불평불만을 터뜨려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사람들이 믿는 것은 그런 불가해한 성격의 안정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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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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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얼핏 보면 만화 같은 이야기다.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사춘기 소녀가 술주정뱅이 새아버지를 간접살해하고, 친구를 죽이려는 사람의 뒤통수를 꽝꽝 언 참치로 가격, 살해하려는 이야기를 전형적인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아니, 실제로 세계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그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사건이다. 9시 뉴스에나 나올법하지 않은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이고, 무턱대고 믿지 않기엔 또 어느 정도는 그럴듯하다. 여선생을 폭행한 여중생 사건도 있는 마당에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잔혹성장기. 이 책의 장르는 그렇게 규정돼 있다. 사실 장르라는 건 세상의 모든 소설책 수만큼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구분하기 쉽게 그냥 SF, 미스터리, 추리, 성장 소설이라고 붙여버리는지도 모른다. 성의 없게 시리.


  읽기 쉬운 책이었다. 덕분에 인기를 얻긴 쉽겠지만 일부독자의 도전의식을 깎아먹기도 할 것이다. 너무 쉽다고 생각해서 건성으로 읽게 된달까. 작가가 공들여 쓰면 독자도 공들여 읽을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작가가 시원시원하게 쓰면 독자도 시원시원하게(사실은 성의 없게) 읽게 된다. 나는 독자가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기 급급해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되는 소설보다는 남은 장수가 점점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하며 소가 되새김질하듯 야금야금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냥 이야기만 읽으면 장땡인 독자라면 차라리 2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영화에는 이야기뿐 아니라 멋진 배우들과 빵빵한 사운드까지 있으니까.


  그래도 좋았던 게 더 많았던 소설이다. 36살인 작가는 여중생의 심리와 주변 환경을 실감나게 그리는데 성공했다. 진짜 여중생이 쓴 일기나 자서전 같다. 소녀가 사는 바닷가 마을의 풍경도 구체적으로 잘 묘사했다. 소녀의 거주지를 도시가 아닌 바닷가 마을로 설정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도시가 아닌 외진 마을이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다.


  가장 좋았던 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경찰관을 만나 우린 살인자니까 잡아 가라고 울먹이는 장면에선 가슴이 먹먹해진다. 긴장감 있게 흘러가던 이야기의 끝치곤 약간 허무하긴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23살인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십대 소녀 같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그랬다는 얘기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저건 어떻게 해? 난 모르겠어. 당신이 대신 해주면 되잖아.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누군가에게 맡겨버리고픈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어려운 순간에 울음을 터뜨리며 난 몰라, 해버리고 싶었달까. 그런 십대 소녀 같은 행동방식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면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던 내가 이 소녀주인공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옷과 손에 뜨거운 피가 묻어있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20대 이하의 독자에겐 공감과 이해의 감정을, 20대 이상의 독자에겐 연민과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모두가 한번쯤은 지나치는 10대, 어떤 경우엔 모든 인생을 통틀어도 이토록 버거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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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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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서평

  솔직히 말하면 나는 추리소설엔 별 관심이 없었다. 범인을 찾는 과정이 내겐 그닥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추리소설의 이야기 구조란 항상 정해져 있지 않은가. 탐정이 범인을 잡는 것과 동시에 끝나는 소설. 너무나 뻔하다고 생각해선지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추리 쪽엔 눈길을 주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아니면 뭔가를 분석하고 발견해내는 일엔 별로 재능이 없어서일까.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연애소설 역시 추리소설처럼 남녀가 헤어지거나 이루어지는 뻔하고 단순한 구조인데도 정말 좋아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인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을 읽은 건 이 소설에서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풍겨났기 때문이다. 미스터리는 좋아한다! 혹시 나는 너무 분명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연애, 미스터리물은 그닥 분명치 않은 이야기에 속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레이코와 왜 섹스를 했는가 하는 수수께끼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100% 다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완전히 이해는 안 가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어지는 수준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인물행동의 동기를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는 이런 소설들과는 달리, 추리소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답이 딱 하나다. 범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도덕성 따윈 져버릴 수 있을 만큼 악독하거나 혹은 미쳤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 추리소설은 100% 다 이해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보다는 범인을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 재미를 느껴야만 추리소설을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범인을 찾는 과정엔 별 흥미를 못 느꼈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연애도 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여자의 연애였다면 시시했겠지만 주인공 아델리아는 죽은 자들을 검시해 범인을 찾아내는 유능한 의사이자 탐정이다. 게다가 성질도 보통이 아니다. 유능한 사람들은 다 그럴까? 주교직위에 오른 로울리경이 청혼을 해도 자기는 환자들에게 일생을 바쳐야 한다며 거절한다. 로울리에겐 다행한 일이다. 아마 그녀와 결혼했으면 그는 밥도 못 얻어먹고 빨래도 자기 손으로 해야 했을 것이다. 하녀가 해줬을까? 부부동반 모임에도 그녀는 환자를 보러 가고 그 혼자 쓸쓸히 모임에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럼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둘은 만날 싸우지 않았을까?


  그 밖에도 이 소설엔 밝고 재미있는 조연들이 대거 출연한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궁전의 연회장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행복해졌다. 내내 시체, 살인, 음모, 이런 어두운 이야기만 나오다가 밝은 부분이 나오니 반가웠다. 책을 읽으며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 난 그런 순간을 사랑한다.


  아델리아는 며칠 전 본 <트랜스포머>의 주인공과 닮았다.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정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아니, 정의가 아니라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였나? 난 절대 그렇게 못할 텐데.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가 그런 얘기를 하자 친구는 ‘그건 영화잖아, 우린 다 소심해’라며 나를 위로해줬다. 친구와 나 사이엔 잠시 우울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우린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 그러면 어때? 사실 정의 따위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평범한 인간인 게 감사하다. 지구는 오토봇들이 잘 지켜주겠지. 고맙다, 오토봇!


  이 소설은 영아살인사건과 관련된 어두운 이야기임이 틀림없지만 정의를 위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의 지향점은 평화와 안식이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과 함께 이야기가 끝나면 내내 어두운 동굴 속을 헤매다가 비로소 밝은 빛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지막 문장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다가 이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이 소설엔 그런 마력이 있다. 소설이 너무 두껍기 때문은 아니겠지? 의심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라. 의심이 많은데다 속독의 기술까지 겸비하셨다면 이 두꺼운 추리소설이 입맛에 맞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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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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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읽고

 


1. 서술기법


  영상기법으로 쓰였다.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다. 심리묘사를 안 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인지 엄청 잘 읽힌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영상기법’이라고 부르며 당당히 소설의 한 기법으로 인정해줘야 할지는 의문이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을 그대로 쓰면 된다고 스티븐 킹도 말하고 있지만 글쎄, ‘보이는 것’이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영상기법으로 쓰면 작가는 인물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인물의 마음속에 든 것이 아닌 인물의 행동을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심리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심리를 알지 못하면 행동도 상상할 수 없다.
  심리묘사를 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심리묘사를 배제하고 행동만 묘사한다는 것은 심리묘사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행동만 보고도 심리를 알 수 있게끔 행동을 더욱 치밀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표현의 한계는 있겠지. 그러나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심리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삶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심리묘사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다.

 

 

2. 하룻밤 동안 일어난 일


  <빛의 제국>이나 <이반 데소비니치의 하루>처럼 하룻밤 동안의 일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끝이 난다. 하루키는 어디서부터 소설을 시작한 것일까? 두 달 동안이나 깊은 잠에 빠진 언니를 둔 마리라는 여자아이가 도저히 집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밤 집을 나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우기로 하는 것에서부터?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겠지. 그는 마리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아이일 것이다. 작가는 하룻밤동안 일어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을 상상하게 하고 보여주며, 그것이 우리의 삶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는 별 감동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인공 마리의 감정을 알 것도 같다. 하룻밤동안의 배회, 내면의 갈등. 날이 밝자 집에 돌아와 언니의 곁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감수성이 예민한 마리는 깊은 잠에 빠진 언니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는데 하룻밤 사이에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그리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난 뒤 변화한다. 성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꼼짝도 않던 벽을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미세한 변화이지만 중요한 것은 움직였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마리의 정신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밤은 그러한 성찰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주 소중한 것을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게 해 치유해주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니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의 저편>. 표면적으로는 어둠에 불과하지만 그 어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표현해보자면, 재생의 에너지? 그 밤 동안의 사건들이 마리에게 스며들어 그녀의 내부를 재배열한다. 죽어있던 부분이 살아나기도 하고 살아서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이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하는 어둠의 시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날마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문득 <밤에 쓴 편지>라는 시를 읽고 싶다.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쓰지 않는다면 책을 읽는 의미는 없을 것이다. 생각하고 고민해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는 환희를 느껴야만 문학작품의 가치를 깨닫고 나도 그런 환희를 다른 사람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독서 감상문을 쓰는 것은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간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는 즐거운 과정이다.

 

 

3. 인물, 대사


  소설 속 인물들의 대사는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사들이다. 뭐랄까... 인물들이 하나같이 참 설명을 잘한다.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한다. 실제로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그들의 대사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굉장히 사교적으로 보인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도 잘 걸고 부탁도 잘 하고.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문제를 짊어지고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들 모두에게 다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피적으로만 느껴지는 인물도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오토바이 남자라든가 카오루?

 

 

4. 환상성


  우리가 사는 도시인데도 왠지 신비로운 분위기다. 그것은 시간적 배경이 ‘밤’이기 때문일까? 밤에는 어쩐지 위험하고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에 투영되었던 사람의 얼굴이, 실체가 나가고 난 뒤까지 거울에 남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장면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입증해준다. 정말로 그럴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이미 화장실에서 나가고 없는데.

 

 

5. 작가


  1979년 등단해서 2006년까지, 27년 동안 81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1년에 3권을 썼다는 얘기다. 탁월한 작가적 역량과 억센 체력이 뒷받침된 덕분이라고 역자는 말하고 있다. 1년에 3권이라... 3달에 책 한권 쓴다고 보면 휴식시간은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사람은 글을 안 쓰는 시간을 더 힘들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읽은 하루키의 작품은 <렉싱턴의 유령>, <도쿄기담집>, <상실의 시대>,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 <꿈에서 만나요>, <핀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해변의 카프카>, <TV피플> 등. 이 작가의 책을 가장 여러 권 읽었다! 하면 답은 하루키다. 나오는 족족 흥미를 끈달까. 그의 작품에는 우리를 현실에서 일탈시켜 미지의 세계로 진입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맛에 중독되는 것 같다. 그 힘의 정체는 뭘까? 단순히 신비한 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에? 카프카를 몇 번이고 정독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영향 때문인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에 몽환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장님과 버드나무 잠자>였나? 그런 제목의 단편이 특히 그랬고, <도쿄기담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몽환성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에서도 가끔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몽환성.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하루키는 세계를 낯설어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남편이 며칠 후 어느 기차역 대기실에서 깨어난다든가(그는 왜 자신이 거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벽에 붙은 그림 속 여자와 매일 밤 만난다든가(해변의 카프카), 낮에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아무 말 없이 TV를 옮겨간다든가(TV피플), 윈드서핑을 하다 죽은 아들을 보러 매년 같은 해변으로 휴가를 오는 여자(도쿄기담집), 자신의 신분을 가르쳐주지 않고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난 애인의 목소리를 몇 년이 흐른 뒤 우연히 차 안의 라디오에서 듣게 되는 남자(도쿄기담집).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하루키 경우처럼, 작품 자체보다 작가가 더 유명한 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해왔다. 왜 작품을 놓고 말하지 않고 “하루키를 싫어하면서도 읽었는데 역시 싫다”라고 독후감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키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녹아있는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대해 인지하게 되자 독자들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가 쓴 어떤 소설에서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개인의 내면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선호하는 장치(주로 환상적인), 특유의 대화체, 유머가 있다. 그건 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각에서 기초한 것들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글쎄, 빌려온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심어주려면 살짝 흉내 내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어둠의 저편>을 읽으면서 나라면 남자주인공 다카하시를 하루키가 그린 것보다 위험하고 비루한, 하지만 동정심이 이는 사람으로 그릴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루키가 그린 다카하시는 귀여웠다. 좀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작품을 통해 그의 내적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그가 귀엽게 느껴진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공상을 즐기는 40대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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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beautmin 2007-02-0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각에서 기초한 것들이다.
공감합니다. 하루키만의 세계, 그의 시각이라는 말 와닿네요.

헤이시 2007-07-2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