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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1.
요즘엔 oo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책을 일부러 사서 읽진 않는다. 취향이 생기기 이전엔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아티스트의 베스트앨범을 사다가 취향이 생긴 후엔 아티스트의 정규 앨범만 사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또 하나 사소한 이유는 문학상 작품집에 보통 이미 읽은 소설 몇 편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이번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4편은 이미 읽은 것이었다. 본전 생각하며 책 읽진 않지만 14000원 11편 작품 중에 4편이 읽은 것이라면 어째 아깝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이런 이유로 난 취향에 맞는 작가나, 남들이 좋다는 작가 위주로 읽는다. 사실 그것들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컴필레이션 앨범엔 손이 잘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다만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음으로써 그 시대의 문학 트렌트를 캐치할 수 있고, 취향에 맞는 새로운 작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한 장점이다. 나도 취향이랄 게 없었던 때가 있었고 2005년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서 박민규를 찾은 후에야 한국 문학의 세계로 들어왔다.
서구 문학이 홀로코스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장담할 수 없지만 한국 문학도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느낌이 강하다. 소설가가 세월호를 의식하지 않았어도 독자가 문학을 세월호의 알레고리로 읽는 순간은 분명 많을 것이다. 강력한 사회의 부조리와 희생자들 그리고 남은 자들의 죄책감, 소설가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고 독자는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할까.
대상 수상작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동안>은 세월호가 아닌 다른 사건을 말하지만, 남은 자들의 윤리를 말하는 탁월한 작품으로 읽혔다. 자, 임신하면 퇴사해야 하는 회사가 있다. 그 부조리에 항거하던 여자가 있다. 여직원들의 편이었지만 결국 임신할 일이 없으니 남을 사람이고, 그래서 방관자로 비친 남자가 있다. 아이러니하게 부조리에 짓눌린 이들은 결국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을 남기고 만다. 여자는 결국 패배하듯 이직하고, 남자 또한 이직하여 각자의 세계에서 윤리적 삶을 지키며 살아간다. 둘은 각자의 이유로 젊어서 죽는다.
소설의 화자는 이 둘의 갈등을 목격한 사람이자 남은 자다. 화자는 삼국유사 일화를 차용한 희곡을 쓰다 머뭇거린다. 삼국유사 일화는 이렇다. 각각의 두 암자에 사는 스님에게 길 잃은 여자가 찾아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요청하는데 한 명은 유혹이 두려워 거절, 한 명은 여자를 암자로 들인다는 이야기다. 거절한 승려는 친구가 유혹에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욕조와 물이 모두 황금으로 변했고, 친구는 황금 부처로 변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관음보살이었다고.
화자는 이걸 그대로 차용해서 희곡을 쓸 수 있을까?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한 구원이 이렇게 쉽고 간편하게 찾아오지 않음을 똑똑히 봐왔던 까닭이다. 희곡은 그의 손에서 조금씩 바뀐다. 길 잃은 소녀는 객석을 향해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화자는 거기서 더 쓸 수 없는데 고통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길 잃은 소녀는 잠들 수 없고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꿈을 꾼다고 당신은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데 우리는 어떤가. 사실 잊고 살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예술 작품은 많다. 그리고 많은 작품이 관객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고통의 한가운데 던져 놓길 주저하지 않는다. 고통을 알량하게 경험한 관객은 착각한다. 자기는 이 고통에 공감한다고. 한강은 소설가인 자신도, 읽는 우리도 모두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말한다. 예술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한강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으며 소설을 썼을 것이다. 거짓 고통/ 거짓 체험/ 거짓 구원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실재하는 고통을 숙고하며 문학의 구원을 스스로 경계하는 감각, 이 윤리적 거리감각은 무척이나 각별하게 느껴진다.
2.
세월호 이후 많은 한국 문학은 문학이 고통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김애란의 <입동>, 이기호의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궤로 읽힌다. <입동>의 이웃들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에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하"다가 이후엔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까" 피하고, 수군거리고, 끔찍한 말을 퍼트리고, 의심하고, 구경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권순찬 씨는 사채업자에게 부조리하게 떼인 칠백만 원을 받기 위해 피켓을 들고 노숙하며 시위한다. 가난한 주민들은 그 사채업자 여기에 없다고, 그의 노모만 있을 뿐이라고, 그를 안타까이 여겨 칠백만 원을 모금해 전달한다. 권순찬 씨는 거절한다.
이 이웃들의 모습은 늘 고통의 바깥에 있던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수군거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섣부른 동정으로 그들을 우리 일상에서 빨리 떼 놓으려 했을 뿐이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비정상을 비정상이라 같이 외치고, 구조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 동참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3.
인상비평
늘 유쾌한 소설을 조금은 더 좋아하는 나에겐 김솔의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가 재밌었다. 한강 작품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비겁함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정소현 <어제의 일들> 또한 무척 좋았다. 조해진 <사물과의 작별>은 누구나 있을 법한 인생의 조각들을 좋은 문장으로 엮어낸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손보미 <임시교사>는 이미 2년 전에 읽은 것인데, 한국 문학 올스타 총출동했던 문학동네 20주년 81호 계간지에서였다. 김훈, 김연수, 천명관, 박민규, 은희경, 성석제...... 그중에서도 빛나는 단편 중 하나였다. 말 다했다.
알라딘 서재의 누군가는 황정은의 최근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두고 이전엔 징징대지 않았는데 이번 소설집은 유독 징징댄다고 말했다. 그의 7년 전 작품을 읽어보니 그 말 뜻을 알겠다. <웃는 남자>는 <아무도 아닌>에 수록되어 있던 단편인데, 소설집 내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러했 듯 폭발 직전의 분노를 포함하고 있었다. 김애란은 여전히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의 디테일을 잘 잡아내고 소설도 잘 쓰지만 더 이상 생기발랄하지 않다. 해학의 대가 이기호는 웃지 않는다. 황정은은 폭발 직전이다. 이런 것들이 아슬아슬하게 읽혀서 가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