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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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도 경제 때문에 우울했던 적 있는데,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저금리 시절 너도 나도 주택 담보 대출받아서 집 샀는데, 금리가 슬금슬금 계속 올라서 결국 원리금 못 갚는 소시민들이 떨어져 나간 것. 그때 주인 잃은 빈집들이 속출했는데, 소설은 그 빈집을 몰래 무단 점거하여 살아가는 네 명 젊은이의 이야기다. 폴 오스터는 누가 봐도 뻥 같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매혹적이었는데, 이 소설은 아무래도 배경이 실존하던 최근의 경제 위기다 보니 이전처럼 알면서 속아주는 느낌은 덜하다. 현실적 우울함이다.

 

소설은 네 명의 젊은이 이야기 말고도 주인공의 부모와 부모 친구까지, 모두의 내면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간다. 모두가 각자의 죄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 다만 말을 못 할 뿐이다. 경제 위기는 배경일 뿐 진정 우울한 것은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내면의 수렁이다.

 

주인공 마일즈 헬러는 피가 섞이지 않은 형과 말다툼하던 중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차도로 밀친다. 그런데 그 순간 코너를 돌아 나온 차가 형을 친다. 형은 죽는다. 이 과실치사 상황에서 마일즈 헬러가 궁금한 건 단 하나뿐이다. 과연 나는 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형을 민 것인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그는 스스로를 처벌하듯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간다. 부모님은 애타게 그를 찾는다. 7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마일즈 헬러는 자신이 형을 밀쳤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자, 우리가 부모라면 마일즈 헬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형을 밀쳐버린 마일즈 헬러를 평생 미워하며 살 것인가. 마일즈 헬러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평생 스스로를 처벌하듯 살아야 하는가.

 

죄는 물론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예측하지 못 했던 일에 대한 가해자의 죄책감과 피해자의 원한이 영원하다면 모두의 삶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필립 로스 <네메시스>에선 소아마비 전염에 대한 죄책감에 스스로의 삶을 폐기시킨 남자가 나온다.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죗값을 치르고 조용히 살아가는 남자에게 끝까지 복수하는 아주머니가 나온다. 영원한 죄책감과 원한의 끝은 비극이다.

 

불행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일일 때, 용서와 망각은 아주 어렵다. 그렇기에 용서와 망각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피해자 편에서 나와야 한다. 가해자가 스스로 말하는 용서와 망각은 자신만 편하자는 비겁한 논리일 때가 많다. "저는 신에게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같은 말들처럼. 그러므로 용서의 시작은 가해자 스스로 "일어서서 자기 행동에 책임(326)"을 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아프지만 겨우 합의할 수 있다. 이제 다신 들추지 않고 살아가자고. 소설의 아버지는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이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용서받아야 한다." 잊는 건 여전히 어렵고 완전히 잊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을 유지시켜줄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이 누적되어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능력이 약화된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없기에, 말년에는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젊은 시절의 큰 비극에 맞먹는 힘으로 울릴 수도 있다. <낙타 등을 부러뜨리는 것은 마지막으로 올린 지푸라기 한 가닥이다.> 다른 여자의 질 속에 들어간 멍청한 페니스가 그 예다. 2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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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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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소설에 수차례 반복되는 문장이다. 1960년대 공산주의 체코에서 주인공은 35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한다. 인류의 정신과 지혜가 축적된 책이 압축되어야 하는 세계는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주인공은 책을 압축할 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책을 한 권씩 구출해낸다. 소설은 그런 주인공을 통해 진정 인간적인 것에 대해 묻는다.

 

도대체 인간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여러 명이 죽어나가지만 끝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출하다가 자신도 죽는 것? 교장에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모두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것? 분명 숭고한 희생이다. 이건 인간만이,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찌 생각하면 무언가를, 심지어 자신까지 초월한 인류애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그런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내던질 용기가 없다.

 

소설은 거창하지 않은 인간적인 것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주인공의 젊은 시절 애인은 두 번이나 똥 때문에 (...) 수치를 겪는다. 주인공은 똥 좀 옷에 묻혔다고 애인을 떠나지 않는다. 그건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44)"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인이 수치심을 못 이기고 주인공을 떠난다. 수치심 또한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니 떠나는 그녀를 어찌 잡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소설 밖 우리도 우습고 별것 아닌, 그래서 몹시 인간적인 이유로 헤어지곤 했다.

 

독백 내내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주인공이지만, 우리는 그의 삶이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는 걸 안다. 그는 왜 사랑했던 집시 여인의 이름을 잊었을까. 그토록 비인간적인 것을 싫어했던 그가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불행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잊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을 때가 있다. 타인에게 베푸는 용서만큼이나 불가항력의 불행에 대한 망각도 인간적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선 고통과 고독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삶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비인간적 세상의 너무나 인간적인 장면이다. 고통 그 자체가 몹시도 인간적이기에 그걸 목도하는 우리는 같이 눈물지을 수밖에. 때때로 고통만이 삶을 증명하는 걸 우리는 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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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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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엔 oo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책을 일부러 사서 읽진 않는다. 취향이 생기기 이전엔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아티스트의 베스트앨범을 사다가 취향이 생긴 후엔 아티스트의 정규 앨범만 사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또 하나 사소한 이유는 문학상 작품집에 보통 이미 읽은 소설 몇 편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이번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4편은 이미 읽은 것이었다. 본전 생각하며 책 읽진 않지만 14000원 11편 작품 중에 4편이 읽은 것이라면 어째 아깝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이런 이유로 난 취향에 맞는 작가나, 남들이 좋다는 작가 위주로 읽는다. 사실 그것들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컴필레이션 앨범엔 손이 잘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다만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음으로써 그 시대의 문학 트렌트를 캐치할 수 있고, 취향에 맞는 새로운 작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한 장점이다. 나도 취향이랄 게 없었던 때가 있었고 2005년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서 박민규를 찾은 후에야 한국 문학의 세계로 들어왔다.

 

서구 문학이 홀로코스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장담할 수 없지만 한국 문학도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느낌이 강하다. 소설가가 세월호를 의식하지 않았어도 독자가 문학을 세월호의 알레고리로 읽는 순간은 분명 많을 것이다. 강력한 사회의 부조리와 희생자들 그리고 남은 자들의 죄책감, 소설가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고 독자는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할까.

 

대상 수상작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동안>은 세월호가 아닌 다른 사건을 말하지만, 남은 자들의 윤리를 말하는 탁월한 작품으로 읽혔다. 자, 임신하면 퇴사해야 하는 회사가 있다. 그 부조리에 항거하던 여자가 있다. 여직원들의 편이었지만 결국 임신할 일이 없으니 남을 사람이고, 그래서 방관자로 비친 남자가 있다. 아이러니하게 부조리에 짓눌린 이들은 결국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을 남기고 만다. 여자는 결국 패배하듯 이직하고, 남자 또한 이직하여 각자의 세계에서 윤리적 삶을 지키며 살아간다. 둘은 각자의 이유로 젊어서 죽는다.

 

소설의 화자는 이 둘의 갈등을 목격한 사람이자 남은 자다. 화자는 삼국유사 일화를 차용한 희곡을 쓰다 머뭇거린다. 삼국유사 일화는 이렇다. 각각의 두 암자에 사는 스님에게 길 잃은 여자가 찾아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요청하는데 한 명은 유혹이 두려워 거절, 한 명은 여자를 암자로 들인다는 이야기다. 거절한 승려는 친구가 유혹에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욕조와 물이 모두 황금으로 변했고, 친구는 황금 부처로 변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관음보살이었다고.

 

화자는 이걸 그대로 차용해서 희곡을 쓸 수 있을까?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한 구원이 이렇게 쉽고 간편하게 찾아오지 않음을 똑똑히 봐왔던 까닭이다. 희곡은 그의 손에서 조금씩 바뀐다. 길 잃은 소녀는 객석을 향해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화자는 거기서 더 쓸 수 없는데 고통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길 잃은 소녀는 잠들 수 없고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꿈을 꾼다고 당신은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데 우리는 어떤가. 사실 잊고 살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예술 작품은 많다. 그리고 많은 작품이 관객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고통의 한가운데 던져 놓길 주저하지 않는다. 고통을 알량하게 경험한 관객은 착각한다. 자기는 이 고통에 공감한다고. 한강은 소설가인 자신도, 읽는 우리도 모두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말한다. 예술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한강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으며 소설을 썼을 것이다. 거짓 고통/ 거짓 체험/ 거짓 구원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실재하는 고통을 숙고하며 문학의 구원을 스스로 경계하는 감각, 이 윤리적 거리감각은 무척이나 각별하게 느껴진다.

 

 

2.
세월호 이후 많은 한국 문학은 문학이 고통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김애란의 <입동>, 이기호의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궤로 읽힌다. <입동>의 이웃들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에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하"다가 이후엔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까" 피하고, 수군거리고, 끔찍한 말을 퍼트리고, 의심하고, 구경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권순찬 씨는 사채업자에게 부조리하게 떼인 칠백만 원을 받기 위해 피켓을 들고 노숙하며 시위한다. 가난한 주민들은 그 사채업자 여기에 없다고, 그의 노모만 있을 뿐이라고, 그를 안타까이 여겨 칠백만 원을 모금해 전달한다. 권순찬 씨는 거절한다.

 

이 이웃들의 모습은 늘 고통의 바깥에 있던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수군거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섣부른 동정으로 그들을 우리 일상에서 빨리 떼 놓으려 했을 뿐이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비정상을 비정상이라 같이 외치고, 구조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 동참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3.


인상비평

 

늘 유쾌한 소설을 조금은 더 좋아하는 나에겐 김솔의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가 재밌었다. 한강 작품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비겁함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정소현 <어제의 일들> 또한 무척 좋았다. 조해진 <사물과의 작별>은 누구나 있을 법한 인생의 조각들을 좋은 문장으로 엮어낸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손보미 <임시교사>는 이미 2년 전에 읽은 것인데, 한국 문학 올스타 총출동했던 문학동네 20주년 81호 계간지에서였다. 김훈, 김연수, 천명관, 박민규, 은희경, 성석제...... 그중에서도 빛나는 단편 중 하나였다. 말 다했다.

 

알라딘 서재의 누군가는 황정은의 최근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두고 이전엔 징징대지 않았는데 이번 소설집은 유독 징징댄다고 말했다. 그의 7년 전 작품을 읽어보니 그 말 뜻을 알겠다. <웃는 남자>는 <아무도 아닌>에 수록되어 있던 단편인데, 소설집 내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러했 듯 폭발 직전의 분노를 포함하고 있었다. 김애란은 여전히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의 디테일을 잘 잡아내고 소설도 잘 쓰지만 더 이상 생기발랄하지 않다. 해학의 대가 이기호는 웃지 않는다. 황정은은 폭발 직전이다. 이런 것들이 아슬아슬하게 읽혀서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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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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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고 그 유명한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잠깐 떠올렸다.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같은 아릿한 구절을 기억한다. 신경림 시인이 그 시를 썼을 때보다 사회 전체의 생활 수준은 높아졌을지라도 여전히 살아내기에 바빠 사랑을 사치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빛이 밝으면 그늘은 더욱 어두워지기에 그 안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소설 제목은 백百의 그림자인데 대략 모두의 그림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소설은 그림자를 물리적 실체로만 그리지 않는다. 소설 속 그림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황에 따라 커지고, 일어서고, 주인에게 눌어붙는다. 그것을 이기지 못한 인간은 그림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많은 빚을 졌던 무재 아버지,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기러기 아빠,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여인, 고작 폐지를 두고 다른 노인과 싸워야 했던 할머니, 이들은 그림자를 따라가며 삶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결국 소설이 말하는 그림자는 저마다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인데, 이 삶의 무게가 턱밑까지 육박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땐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살아지는 지경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결국 그림자를 견디지 못해서 죽(143)'는 수밖에.

 

소설 속 세계는 철거 예정인 전자상가로 요약된다. 오래됐고 보기에 안 좋으니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삶들은 어쩌나.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기만 한 도시에서 빈민들이 그림자를 따라가는 건 '왠지 홀가분(32)'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 세계의 해답이 이것뿐이라면 너무나 슬픈 일일 것이다.

 

화자의 연인 무재도 불우한 삶을 살았고, 현재 삶도 녹록지 않은 까닭에 위태로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소설 초반에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라고 말하던 무재는 종반에 완벽한 좌절을 맞는다. 오래된 중고 자동차가 섬에서 퍼져버린 것인데, 이는 그저 엔진의 사망이 아닌 그들 삶에 대한 잔인한 선고와 같이 느껴진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 씨의 그림자인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 서로를 의지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언어는 이렇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걸어갑시다." "노래할까요." 이 마지막 장면은 같이 걷는 사람들의 무채색 풍경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가가 말하는 그림자는 여러모로 영리한 은유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평소 자신의 그림자를 특별히 신경 쓰지도 않는 마당에 남의 그림자는 더욱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런 우리는 그림자가 일어선 타인에게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무사 할아버지처럼 전구 하나를 습관적으로 더 내어줄 수 있는가? 소설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아픈 세상에서도 사랑만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소설가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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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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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한국 소설은 시대에 짓눌려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사회의 불합리,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비극, 트라우마. 이것들을 꼭 말해야 한다는 작가의 시대의식 때문일까? 문학이 시대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소재가 무엇이든 그걸 주무르는 건 작가의 몫이긴 하다. 그러나 간혹 미숙한 터치로 주제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은 삐딱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외국 소설, 적어도 단편만큼은 시대 상황을 소설의 전제로 활용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이 몸담은 사회가 불합리나 트라우마가 적기 때문인지, 좀 더 보편적 인간성의 탐구에 매진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독자가 실재하는 불행에 대한 공감을 강요받지 않는 장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마다 감수성이 다르고 사건에 대한 생각이 다른데 너희도 같은 슬픔을 느끼라는 식의 한국 소설을 읽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한국 소설도 조금은 시대 상황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사회가 먼저 변해야겠지만. 

 

사전 잡담은 여기까지. 이 미국 소설가의 작품들은 일상의 긴장감을 생생히 담고 있다. 기실 삶에서 파국의 씨앗은 어디 깊숙한 곳에 있지 않고, 일상을 한꺼풀만 벗기면 드러나게 되어있다. 소설집 제목은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인데, 소설에서 말하는 두 가지 길이란 불가피한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 같은 게 아니다. 고작, 젊고 아름다운 애인과 지금 옆에 있는 현명한 아내 사이에서 고민하며 하는 생각이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정말로 그렇다. 선택의 순간은 돌아보면 윤리의 갈림길이 아닌 욕망의 갈림길인 경우가 많았다. 고상한 척했지만 제 속을 들여다보면 구질구질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는 그런 갈림길 말이다. 어쨌거나 윤리든 욕망이든 상관없이 인생에선 동시에 갈 수 없는 갈림길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그때 우리의 최선은 선택한 길에 집중하여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줄이는 것뿐이다.

 

소설집의 전체적 기조와는 약간 다른 <사랑스런 리타>는 두 번 읽었다. 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윤리에 대한 소설은 그동안에도 많았지만, 이 단편 소설은 각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레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적으로 탁월한 그의 아내. 빤히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고, 어깨에 닿은 그녀의 머리에 안심이 되었다. 그는 양면성과 욕망으로 저주받았다. 조금 더 용감한 남자였다면, 아니 조금만 더 겁쟁이였다면 간단하게 떠났을 것이다. 더 행복한 남자였다면, 또는 현실에 좀더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머무르며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흥청거렸을 것이다. 마치 낡은 목욕가운처럼 그 익숙함으로 몸을 감싼 채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실망시키고 걱정시키게 될 뿐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메그가 시를 써서 집에 가져온 적이 있었고,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가지 모두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자신의 강력한 힘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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