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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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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명민은 인간 극장을 즐겨 본다고 한다. 인간 극장은 배우가 나오지 않는 대본 없는 이야기다. 연기와 별 관련 없어 보이는 인간 극장에서 연기를 배운다고 한다. 어째서일까. 극이 아닌 실제 생에선 기쁨과 슬픔은 과장되는 법 없이 담담하다는 게 그 이유다. 드라마에서 크게 당황하거나 슬퍼할 일에도 사람들은 의외로 의연하다. 그리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간다. 김명민은 이런 진짜 삶의 모습을 캐치하고 연기에 응용시킨다는 이야기였다.


소설집 대성당은 인간 극장과도 같은 이야기들의 묶음이다. 『깃털들』에선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 않던 부부가 직장 동료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는다. 그곳에서 직장 동료 부부의 아이를 보는데 끔직이도 못생겼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동료 부부는 어쩐지 불쾌한 외양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아이를 갖고 싶다 생각한다. 행복은 남의 눈으로 재단할 수 없는 온전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일까. 그런데 정말 재밌는 건 이야기가 온전히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아내는 뚱뚱해진다. 부부는 권태에 빠지지만 화자는 두루 평안하다 말한다. 동료 집의 공작새 조이는 날아가 버렸다. 물질도 생각도 영속되는 건 없다.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인생이 가지는 의외성, 불영속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셰프의 집』은 갑작스럽게 셋집을 비워줘야 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집을 비워주고 다른 집을 구해야 하지만 이는 별거하던 부부가 다시 서로를 긍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보존』에선 남편의 실직, 냉장고의 고장이 이어진다. 이래저래 불운하지만 부부는 일단 새 냉장고를 사러 경매장에 가야 할 뿐이다. 


만사형통의 행복한 삶이었는 데 무슨 까닭에선지 그저 맥주만 마시며 알코올 중독이 되고, 필름이 끊기는 게 술을 많이 마신 내 탓이 아니라 술에 물을 안 넣고 얼음을 넣은 탓이라는 괜한 핑계를 대기도 한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이렇듯 본질도 불분명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에서 어차피 해답은 없다. 큰 기쁨, 큰 슬픔, 큰 재미도 없는 인간 극장 같은 소설집 대성당에서 사소한 불행들을 살펴보고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를 확인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보는 법을 알려주는 맹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못생긴 아기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버드와 올리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아마 그들은 못생겼다고 해도 어쨌든 괜찮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아기니까. 지금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것뿐이지. 조만간 다른 시기가 찾아 올거야. 이런 시기도 있고 다른 시기도 있는 것이니까. 결국에는 그러니까 모든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야.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39p

"어쨌거나 뭔가 하긴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해보는 거야.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인생이야. 그렇지 않아?" 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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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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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참으로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 가진 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게 엉망으로 돌아갈 때. 그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많은 청춘들이 이런 시간에 놓여있다. 이런 청춘들에게 많은 걸 가진 사람이 청춘은 원래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죽빵 한 대 날려주고 싶지 않을까? (ㅎㅎㅎ) 


그럼 이런 식의 위로는 어떨까. 내 얘기를 들어봐. 나도 너만큼 힘들어. 그런데 그냥 어떻게든 살아.


이 책은 김애란이 20대 중반에 쓴 소설들의 모음집이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20대이며 모두 가난하고 답답한 현실을 살고 있다. 


『도도한 생활』은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의 이야기다. 만둣집을 하는 집에서 어머니는 딸을 위해 피아노를 사줬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가세는 기울지만 어떤 이유인지 어머니는 피아노는 팔지 말자고 한다. 딸의 반지하 자취방에 옮겨진 피아노는 집주인의 엄포로 절대 울리는 법 없다.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 빗물이 사정없이 반지하로 스며들고, 설상 가상으로 만취한 언니의 전 남자친구가 집에 찾아와 쓰러진다. 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순간 화자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두드린다. 도저히 도도해질 수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피아노 음정이 체념처럼 도-도-하며 울린다. 


『침이 고인다』는 삶에 찌들어 사는 말단 학원 강사의 이야기다. 원룸에서 자취하는 그녀에게 어느 날 후배가 하룻밤만 재워달라며 찾아온다. 하룻밤을 지내보니 당분간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지 싶어 후배에게 일감을 주며 같이 지내게 된다. 피곤한 생활에서 위안이 돼주는 후배였지만 박봉에 때로 모멸감까지 주는 학원에서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후배와의 동거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서로를 조금씩 견디는 일이다. 더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그녀는 후배에게 어색하게 이별을 통보한다. 짐은 천천히 정리하라 말했지만 샤워를 끝내고 나온 순간 이미 후배는 집에 없다. 시간이 얼마 지나 그녀는 후배가 절반을 떼어 준 인삼껌을 발견한다. 그것은 후배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한쪽의 절반이었다. 후배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껌 한 통을 주고 떠났다고, 그래서 껌을 씹으며 어머니를 기다리고 찾았지만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면 입에 침이 고인다고 했다. 후배가 그녀의 집에서 떠나야 했을 때도 침이 고였을까. 한 사람을 받아들일 때 언젠가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걸 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그녀는 후배가 준 인삼껌 반 쪽을 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야기는 이별의 방법과 이별 후 느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성탄 특선』은 가난해서 크리스마에 섹스를 하지 못 했던 커플의 이야기다. 4년 차를 맞는 커플은 한해는 1년 차엔 여자가 가난해서, 2년차엔 남자가 가난해서, 3년 차 땐 잠시 이별했던 때라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해본 적이 없다. 올해는 둘 다 주머니 사정도 풀렸으니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자 다짐하지만 방을 예약하지 않아 밤새 러브호텔 방만 찾아 헤매다 결국 각자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간다. 가난해서 누려본 적이 없었고, 누려본 적이 없으니 누리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도 모를 정도로. 이 커플의 이야기가 해학적이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안타까운 커플이 내년 크리스마스엔 꼭 근사한 러브호텔에서 섹스할 수 있기를 바란다. (ㅎㅎ)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노량진 재수생들의 이야기다. 노량진은 누구나 잠시 지나가는 곳으로만 생각하지 영영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화자는 취직이 안 돼서 보습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잠시 스쳐갈 뿐이라고 생각했던 노량진역을 지나며 왜 여전히 자신은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생각한다. 그리고 7년 전 재수 생활 때 힘이 돼줬던 남자아이를 추억한다. 그때 빽빽하게 늘어선 수강 신청 줄에서 밀려날 때 손을 잡으라던 외침이 문득 떠오른다. 


『칼자국』에선 칼 하나로 국수를 끓이며 온 가족을 먹여살린 어머니를 잔잔하게 회고하고, 『기도』에선 취업 준비생과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노동부 직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 절박한 삶 속에서 기도하듯 살고 있음을 말한다.  


『네모난 자리들』에선 두 개의 방이 나온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날 키웠던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빈방, 그리고 짝사랑했던 선배 살았던 방. 선배가 휴학을 하고 찾아간 그의 방엔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이 모든 부재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다시 확인한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는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자란 어린아이가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어머니라 생각하는 이야기다. 물론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삼촌의 거짓말 덕이었지만. 어찌 됐든 아이는 철 상자를 정말 어머니처럼 여기며 하지 못 했던 이런 말 저런 말을 한다. 하지만 블랙박스를 조사원들이 수거해야 하므로 어머니 블랙박스와도 또 이별해야 한다. 눈물 흘리며 아이는 "잘 가요. 엄마, 잘 있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훗날 조사단이 블랙박스 안의 녹음물을 해독했을 때 대부분은 잡음뿐이라 해독할 수 없었고 조종사의 마지막 메시지인 듯한 말 한마디를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


모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결핍을 겪고 있다. 쉽사리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단지'라는 웹툰이 있다. 그 웹툰은 자신의 비참했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데 많은 독자의 공감을 통해 지지받는다. 만화든 문학이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건 같은 경험이다. 공감으로 위로한다. 이 단순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명제를 20대의 김애란은 아주 잘 깨닫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시대를 고스란히 미문(美文)에 담은 이 소설집은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읽힐 것이다. 

엄마는 장사를 끝낸 뒤 작은방에 누워 피아노를 청했다. 나는엄마의 발 박자에 맞춰 `따오기`나 `오빠 생각`을 연주했다. 허공에서 발 박자를 맞추던 엄마의 양말 앞코는 설거지물에 진하게 젖어 있었다. 그 발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엄마의 젖은 마음 한 조각 같았다. 16p

불규칙한 내신 등급과 달리, 내 브래지어 후크는 꾸준히 한 칸씩 늘어났다. 피아노는 가게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져 갔고,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불을 이고 집을 떠나온 이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 도-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어쩌다 어릴 때 음악 따윌 배워 그 울음의 이름을 알게 됐으니, 조금은 나도 시대의 풍문에 빚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19p

첫 월급을 탔을 때 누구를 만나,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고, 매일 어깨에 의자를 이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기다랗게 자라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손가락만 진화한 인간 타자수가 되어 `다음 중 맞는 답을 고르시오`라는 문장을 끊임없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산더미만 한 문제지를 들고 인쇄소에 찾아가면, 그걸 전부 나더러 풀라는 것이었다. 나는 건포도를 오물거리며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고 안도했다. `8월에는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가야지. 화장은 언니에게 배우고, 아르바이트는 반드시 집 밖에서 하는 걸로 해야겠다.`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올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33p

어쨌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그날 밤, 후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 때문에 후배와 살게 된 건지도 몰랐다.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61p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고요한 도시를 만날 수 있는 날이다. 새벽 1시, 하나 둘 꺼져가던 불빛도 보이지 않고 거리의 사람들이 사라질 때- 서울은 고장 난 멜로 디 카드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사내는 가짜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옆구리에 비빔면을 낀 채 하늘을 바라본다. 낮게 낀 구름 사이로 전신줄이 오선지처럼 뻗어 있다. 사내의 얼굴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며 스륵 녹는다. 악보를 지나 가장 낮은 음을 향해 내려가는 음표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만지면 따뜻할 것 같은 노란 눈이다.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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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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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소설들은 아니다.


표제작 바늘은 문신을 해주는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강인한 문신을 요구한다. 자신의 몸피에 강인한 그림을 새기면 마치 자신도 그처럼 강해질 거라 믿는다. 문신을 시술하는 그녀는 추하다. 그래서 허벅지에 문신을 시술할 때 그녀의 숨결이 사타구니에 닿으면 남자들은 발기할지언정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래전 연락이 끊긴 어머니의 소식을 경찰로부터 듣는다. 미륵암 현파스님을 어머니가 살해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경찰은 자연사 같은데 괜한 얘기를 해서 일을 복잡하게 한다고 한다. 어렸을 적 여자는 간질 발작을 앓아 미륵암에 어머니와 기도를 드리러 가곤 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지내는 고양이들에게 시기심을 느낀다. 고양이들은 아름답고, 신도들이 주는 생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있었다. 여자는 새끼 고양이를 어미에게서 빼앗아 변기 속으로 던져 죽인다. 여자의 간질 발작은 나았지만 어머니는 현파 스님에 대한 연정에 여자를 버리고 미륵암으로 간다. 어머니는 왜 현파 스님을 죽였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마트 육류 코너에서 둥그런 모양의 고깃덩어리를 보고 스님 머리를 연상한다. 그리고 스님 머리통에 문신을 새기는 상상을, 고운 여자가 스님 머리를 잡고 정사하는 장면을 상상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자살 소식도 듣는다.


전쟁 기념관을 찾아간 그녀는 전시된 무기들을 보고 스님을 죽이는 상상을 한다. 한편 그곳에서 가끔 마주치던 같은 라인의 801호 남자를 본다.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러 미륵암에 다녀오고 며칠 지나 801호 남자가 806호로 그녀를 찾아온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801호 남자는 오히려 그 아름다움 때문에 군대에서 고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801호 남자는 강함을 원한다. 그 강함의 표상으로 강력한 무기 문신을 원하고 있었다. 미륵암에서 가져온 어머니의 바늘들은 끝이 전부 잘려 있었다. 예전에 어머니는 그녀에게 바늘 끝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으면 아무런 외상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바늘을 새겨준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 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33p


마치 꼽추와도 같은 추한 여자와는 아무도 섹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녀의 바늘은 생살을 뚫고 피를 내고 그 틈으로 염료를 스며들게 한다. 반대로 어머니는 바늘로 고운 한복에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아름답지 못해 느끼는 열등감은 새끼 고양이를 죽이게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현파 스님에게 갔다. 어머니와 스님에 대한 분노는 차갑다. 상상 속에서 스님을 살해한다. 여자의 욕구는 억압되어 있다. 억압된 욕구의 분출은 단적으로 그녀의 육식 취향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스님 머리를 잡고 정사하는 상상으로 표상화된다. 소설 속 남자들은 모두 강해 보이는 문신을 원하고 있다. 강함에 대한 열망은 반대로 남자들이 결코 강하지 않다는 말이다. 가녀린 바늘은 결국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였다. 그녀는 약한 남자들에게 강한 바늘로 문신을 새긴다. 그리고 남성성을 원하는 남자에게 강한 무기를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바늘을 새겨 넣는다.


천운영의 소설바늘은 추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이야기한다. 이런 기조는 다른 단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월경에서는 성장이 멈춘 여성성이 부족한 여자와 농염한 은하수 계집이 대비된다. 가질 수 없는 여성성에 대한 열등감은 성관계를 관음 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포옹에서는 곱사등이 여자가 매표소 일을 하며 우연히 본 남자를 자신의 약혼자라고 망상을 한다.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가족들에게 허언한다. 또 다른 여자는 기댈 곳이 전혀 없는 화장품 판매원이다. 그녀는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몸을 허락하고 50만 원을 받는다. 그녀는 어렸을 적 싸움소 훈련꾼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후에 그녀를 위로해주는 건 슬픔에 민감한 소 '태풍이'였다. 아버지가 총애하는 강한 싸움소 '돌쇠''태풍이'를 뿔로 받고 괴롭힌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을 '돌쇠'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심한 매질을 당한 다음날 '돌쇠'는 힘 한번 못 쓰고 무기력한 패배를 당한다. 그 패배로 아버지는 싸움소 네 마리를 잃는다. 그날 밤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돌아와 '태풍이'와 그녀에게 채찍질을 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후 '태풍이'를 풀어주고 외양간에 불을 지른 후 집을 나온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폭력은 대물림됨을, 그리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건 역설적으로 다른 폭력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반면 남녀의 성 정체성을 뒤집은 묘사로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작품들도 있다. 에서는 남자의 할머니는 흡사 마녀와 같이 묘사된다. 남자의 할머니는 육식을 즐겨 한다. 결혼하겠다는 남자의 말에 느닷없이 송치를 구해오라 한다. 남자는 늘 할머니를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초식동물 같은 미연을 더욱더 갈구한다. 유령의 집에서는 남편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 더 이상 참지 않고 목발로 남편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행복 고물상에서는 부인이 남편에게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설정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가정 폭력을 미러링 한다. 이렇게 역전된 성 인식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작품을 읽는 어떤 여성들은 일련의 통쾌함 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내 모든 작품에서 사람들은 가난하다. 가진 것이 없어 늘 무언가를 열망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다. 눈보라콘은 부라보콘을 열망하는 이야기다. 늘 자신의 앞에서 놀리듯 부라보콘을 먹는 소녀를 보고 부라보콘을 먹는 상상을 한다. 부라보콘은 가난으로 인해 가지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눌려 있던 사춘기 소년의 성적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는 상상을 하다 팬티에 사정한다.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을 돈이 없어 그나마 가끔 사기 쳐 얻어낸 돈으로 짝퉁인 눈보라콘을 먹을 뿐이었다. 소년의 친구 '하봉'은 그 돈으로 가짜 나이키 스티커를 모으는 데 집착한다. 어느 날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던 소녀를 만난다. 소녀와 이야기해보니 소녀가 먹던 것은 부라보콘이 아니라 눈보라콘이었다. 소녀는 가짜 휘발유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진짜 휘발유였다. 진짜를 향한 열망 그 자체가 삶에선 진짜인 것이다. 부라보콘을 원하지만 먹지 못하고 반값인 눈보라콘만 먹을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소년은 눈보라콘 속에서 늘 행복했다고 소회한다. 영도를 떠나는 날 소년은 그렇게 성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 안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항상 대비되어 있다. 빈곤층과 추한 여자들의 욕구는 억압되어 있다. 육적(肉的) 묘사는 적나라하지만 문장은 건조하다. 이 불편함 들 속에서 삶은 폭력적임을 확인한다.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의 대비와 삶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역설적 기표들이 숨어있는 이 문장들은 충분히 미학적이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
남자가 말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이유들이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추하다는 추상어가 명백히 눈앞에 펼쳐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 13p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마산대표의 `ㅁ`자는 글자라기보다는 작은 액자처럼 보인다. 육체에 새겨진 글귀는 그걸 새겼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노력`이나 `저축`같은 글귀가 그렇다. 한번 열심히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살을 파는 아픔을 이겨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으로 문신에는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를 한마리 그려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넣는다. 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하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넣는다. 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27p

그러나 나는 미연과 함께 살고 싶다. 아이를 낳아 목말 태우고 미연과 함께 숲에 가 나무냄새도 맡고, 미연이 해주는 풋풋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다. 내 욕망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숨쉬며 지내다가 자신의 숨소리를 듣게 될 때 느끼는 부자연스러운 인식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을 때 편안한 숨쉬기 속도에서 어긋나버려 몹시 답답하고 힘들게 숨을 고르는 것처럼. 아무리 자연스럽게 숨을 쉬려 해도 폐활량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 것처럼.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아야만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미연을 원하지 말아야 했는지 모른다. 52p

하지만 나는 눈보라콘을 좋아한다. 눈보라콘 속에는 부라보콘을 향한 욕망과 열망이 들어 있다. 눈보라콘도 나처럼 부라보콘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눈보라콘이 부라보콘의 대용물밖에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보라콘에는 다른 가짜들과는 구분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눈보라콘에게 동지애까지 느낀다. 99p

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심벌즈 소리가 멎었다. 그때까지 나느 현실세계가 아닌 먼 우주 공간을 날고 있었던 것 같다. 교문을 나서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침묵이 슬픔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내 어깨를 잡은 어머니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을 뿐. 어머니는 목도리를 벗어 벽에 걸고 나서야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듯 확실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그 말은 내 심장 깊숙이 와 박혔다. 그것은 내겐 너무 가혹하게 들렸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건지 아니면 몹시 혼이 났을 거라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어머니한테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눈보라콘이나 부라보콘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것은 눈보라콘을 먹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니까. 104p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희망에 가득 찬 순간 어두운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위안이 될 수 있다. 불행에 단련된 사람은 제 앞에 닥친 희망을 낯설어하게 된다. 영감의 죽음은 할멈에게 채워진 족쇄를 열 희망의 열쇠일 뿐이다. 할멈은 양로원에서 편안한 노후를 맞을 것이다. 나는 할멈을 위안하는 척하며 내 가슴을 쓸어내었다. 1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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