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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삶이 참으로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 가진 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게 엉망으로 돌아갈 때. 그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많은 청춘들이 이런 시간에 놓여있다. 이런 청춘들에게 많은 걸 가진 사람이 청춘은 원래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죽빵 한 대 날려주고 싶지 않을까? (ㅎㅎㅎ)
그럼 이런 식의 위로는 어떨까. 내 얘기를 들어봐. 나도 너만큼 힘들어. 그런데 그냥 어떻게든 살아.
이 책은 김애란이 20대 중반에 쓴 소설들의 모음집이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20대이며 모두 가난하고 답답한 현실을 살고 있다.
『도도한 생활』은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의 이야기다. 만둣집을 하는 집에서 어머니는 딸을 위해 피아노를 사줬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가세는 기울지만 어떤 이유인지 어머니는 피아노는 팔지 말자고 한다. 딸의 반지하 자취방에 옮겨진 피아노는 집주인의 엄포로 절대 울리는 법 없다.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 빗물이 사정없이 반지하로 스며들고, 설상 가상으로 만취한 언니의 전 남자친구가 집에 찾아와 쓰러진다. 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순간 화자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두드린다. 도저히 도도해질 수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피아노 음정이 체념처럼 도-도-하며 울린다.
『침이 고인다』는 삶에 찌들어 사는 말단 학원 강사의 이야기다. 원룸에서 자취하는 그녀에게 어느 날 후배가 하룻밤만 재워달라며 찾아온다. 하룻밤을 지내보니 당분간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지 싶어 후배에게 일감을 주며 같이 지내게 된다. 피곤한 생활에서 위안이 돼주는 후배였지만 박봉에 때로 모멸감까지 주는 학원에서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후배와의 동거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서로를 조금씩 견디는 일이다. 더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그녀는 후배에게 어색하게 이별을 통보한다. 짐은 천천히 정리하라 말했지만 샤워를 끝내고 나온 순간 이미 후배는 집에 없다. 시간이 얼마 지나 그녀는 후배가 절반을 떼어 준 인삼껌을 발견한다. 그것은 후배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한쪽의 절반이었다. 후배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껌 한 통을 주고 떠났다고, 그래서 껌을 씹으며 어머니를 기다리고 찾았지만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면 입에 침이 고인다고 했다. 후배가 그녀의 집에서 떠나야 했을 때도 침이 고였을까. 한 사람을 받아들일 때 언젠가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걸 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그녀는 후배가 준 인삼껌 반 쪽을 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야기는 이별의 방법과 이별 후 느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성탄 특선』은 가난해서 크리스마에 섹스를 하지 못 했던 커플의 이야기다. 4년 차를 맞는 커플은 한해는 1년 차엔 여자가 가난해서, 2년차엔 남자가 가난해서, 3년 차 땐 잠시 이별했던 때라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해본 적이 없다. 올해는 둘 다 주머니 사정도 풀렸으니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자 다짐하지만 방을 예약하지 않아 밤새 러브호텔 방만 찾아 헤매다 결국 각자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간다. 가난해서 누려본 적이 없었고, 누려본 적이 없으니 누리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도 모를 정도로. 이 커플의 이야기가 해학적이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안타까운 커플이 내년 크리스마스엔 꼭 근사한 러브호텔에서 섹스할 수 있기를 바란다. (ㅎㅎ)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노량진 재수생들의 이야기다. 노량진은 누구나 잠시 지나가는 곳으로만 생각하지 영영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화자는 취직이 안 돼서 보습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잠시 스쳐갈 뿐이라고 생각했던 노량진역을 지나며 왜 여전히 자신은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생각한다. 그리고 7년 전 재수 생활 때 힘이 돼줬던 남자아이를 추억한다. 그때 빽빽하게 늘어선 수강 신청 줄에서 밀려날 때 손을 잡으라던 외침이 문득 떠오른다.
『칼자국』에선 칼 하나로 국수를 끓이며 온 가족을 먹여살린 어머니를 잔잔하게 회고하고, 『기도』에선 취업 준비생과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노동부 직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 절박한 삶 속에서 기도하듯 살고 있음을 말한다.
『네모난 자리들』에선 두 개의 방이 나온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날 키웠던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빈방, 그리고 짝사랑했던 선배 살았던 방. 선배가 휴학을 하고 찾아간 그의 방엔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이 모든 부재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다시 확인한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는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자란 어린아이가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어머니라 생각하는 이야기다. 물론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삼촌의 거짓말 덕이었지만. 어찌 됐든 아이는 철 상자를 정말 어머니처럼 여기며 하지 못 했던 이런 말 저런 말을 한다. 하지만 블랙박스를 조사원들이 수거해야 하므로 어머니 블랙박스와도 또 이별해야 한다. 눈물 흘리며 아이는 "잘 가요. 엄마, 잘 있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훗날 조사단이 블랙박스 안의 녹음물을 해독했을 때 대부분은 잡음뿐이라 해독할 수 없었고 조종사의 마지막 메시지인 듯한 말 한마디를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
모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결핍을 겪고 있다. 쉽사리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단지'라는 웹툰이 있다. 그 웹툰은 자신의 비참했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데 많은 독자의 공감을 통해 지지받는다. 만화든 문학이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건 같은 경험이다. 공감으로 위로한다. 이 단순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명제를 20대의 김애란은 아주 잘 깨닫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시대를 고스란히 미문(美文)에 담은 이 소설집은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읽힐 것이다.
엄마는 장사를 끝낸 뒤 작은방에 누워 피아노를 청했다. 나는엄마의 발 박자에 맞춰 `따오기`나 `오빠 생각`을 연주했다. 허공에서 발 박자를 맞추던 엄마의 양말 앞코는 설거지물에 진하게 젖어 있었다. 그 발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엄마의 젖은 마음 한 조각 같았다. 16p
불규칙한 내신 등급과 달리, 내 브래지어 후크는 꾸준히 한 칸씩 늘어났다. 피아노는 가게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져 갔고,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불을 이고 집을 떠나온 이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 도-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어쩌다 어릴 때 음악 따윌 배워 그 울음의 이름을 알게 됐으니, 조금은 나도 시대의 풍문에 빚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19p
첫 월급을 탔을 때 누구를 만나,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고, 매일 어깨에 의자를 이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기다랗게 자라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손가락만 진화한 인간 타자수가 되어 `다음 중 맞는 답을 고르시오`라는 문장을 끊임없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산더미만 한 문제지를 들고 인쇄소에 찾아가면, 그걸 전부 나더러 풀라는 것이었다. 나는 건포도를 오물거리며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고 안도했다. `8월에는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가야지. 화장은 언니에게 배우고, 아르바이트는 반드시 집 밖에서 하는 걸로 해야겠다.`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올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33p
어쨌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그날 밤, 후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 때문에 후배와 살게 된 건지도 몰랐다.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61p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고요한 도시를 만날 수 있는 날이다. 새벽 1시, 하나 둘 꺼져가던 불빛도 보이지 않고 거리의 사람들이 사라질 때- 서울은 고장 난 멜로 디 카드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사내는 가짜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옆구리에 비빔면을 낀 채 하늘을 바라본다. 낮게 낀 구름 사이로 전신줄이 오선지처럼 뻗어 있다. 사내의 얼굴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며 스륵 녹는다. 악보를 지나 가장 낮은 음을 향해 내려가는 음표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만지면 따뜻할 것 같은 노란 눈이다.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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