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사색노트 - 날마다 새로운 하루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최종옥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여름 <톨스토이 고백록>을 통해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자전적 이야기를 접한 기억을 안고 집어든 책이 바로 오늘 리뷰를 남기는 <톨스토이 사색노트>이다. 일반적인 단행본과는 달리 본서가 가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독자 참여형 도서라는 점이다. 책을 펼쳤을 때 한면은 톨스토이가 발췌한 세계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긴 인류 지성들의 촌철살인과 같은 짧막한 경구와 금언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반대 페이지에는 독자가 이렇게 귀한 삶의 교훈과 지혜를 묵상하고 사색하면서 오늘 하루 발견한 자신의 모습과 내일을 위한 오늘의 키워드를 직접 손글씨로 적을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놓았다. 오늘 하루 톨스토이의 손을 빌려 재탄생된 지적 유산들이 내 삶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며 이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매일의 삶의 각축장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와 같은 보편적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삶의 고뇌와 그에 대한 해답을 연필을 쥐고 써 내려갈 때 비로소 독자는 머릿속을 휘감았던 실타래와 같았던 삶의 난제가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아까운 보석같은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들을 전부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상 불가능하기에 리뷰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 몇개의 경구를 나열해본다. "쓸데없이 잡다한 지식으로 머릿 속을 어지럽히지 말라"라는 테마 속 제시된 교훈은 로마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말한 것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거나 쓸데없이 잡다한 지식으로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말라. 진실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 무엇을 얻고 싶다면 좋은 책을 가려 읽어야 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마구잡이식 독서는 오히려 두뇌를 망가뜨릴 뿐이다." 세네카가 말한 조언을 통해 내 자신의 독서 습관을 돌아본다. 하루에도 수십수백권씩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이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지적 허영으로까지 여겨질 잡식 스타일의 독서 습관은 분명 욕심에 기인한 것임을 고대 로마 철학자의 입을 통해 발견한다.

또 한가지 마음을 울리는 격언은 이와 같다.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다. 현재에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인간은 현재 그대가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다. (중략)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들과 사랑하며 화합하는 일이다." 아마 많은 이들은 현재의 어려움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갈등과 아픔에 대해서 일부러라도 회피하고 싶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는 한다. 책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현재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과거는 말할 것도 없고, 다가올 미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이다. 현재의 내가 중요한 것이며 현재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내 주변의 이웃들이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우리 영혼이 가진 현재성의 실체를 직면하도록 이끈다.

마지막으로 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격언은 영국의 사상가 '러스킨'의 말이었다.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이다. 그런 사람에게 말대답을 하면 그 말은 곧 그대에게 되돌아온다.비난을 비난으로 갚는 것은 타오르는 불 속에 장작을 넣는 것과 같다. 자기를 비난하는 자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상대방을 이긴 것이다." 정말 멋진 말임을 실감하며 나의 무릎을 친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어떤 사람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에게 러스킨은 침묵이 가장 효과적인 대처법임을 처방해준다. 그렇다. "침묵은 금이다!" 라는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익숙한 다소 상투적인 격언이 결코 상투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침묵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기에 그렇다.

또한 자기를 비난하는 자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냄으로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은 놀랍기만 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견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격언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비난하는 자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 줄 수 있을까? 그러한 행동을 하려면 그만큼 한 인격의 깊은 성숙함이 전제된다. 즉 자신의 원수에게 온화한 미소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의 인격 속에 참된 인간으로서의 숙성된 인격과 고결한 인품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소를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으로 벌써 그 사람은 순수한 인성의 승리자이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9년의 마지막 달, 한해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나는 본서에서 톨스토이의 손을 빌어 설파된 인류 지성들의 위대한 격언들에 걸맞는 삶을 살았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본서를 통해서 여전히 미운 사람은 밉고, 보기 싫은 사람은 피하고만 싶은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인 나의 연약한 내면의 속살을 마주하게 된다. 그까짓 것 한번 웃어줄 수도 있었을텐데, 먼저 따뜻한 눈빛 한번 건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본서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먼저 낮아짐을 선택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의로움과 잘났음을 자랑하는 말라비틀어진 자존심을 2019년에 남겨둔 채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의 끝장에 남겨진 미국 유니테리언파 목사인 '채닝'의 경구를 남겨본다.

"행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겸허이다. 교만, 권력, 허영이 가득하다면 그 자리를 친절과 겸허로 대신해야 한다. 교만한 인간은 아무런 유익도 취하지 못한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자기 자신이 쓸모없게 여겨진다. 여기에 현명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과정이 있다. 현명해지려면 겸손하라. 그것은 사람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여년 전 개봉한 영화 중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앙의 힘으로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며 평안한 표정을 짓는 살인자의 고백을 듣고 혼란스러움에 빠져 혼절한다. 피해자의 엄마로서 자신이 먼저 살인자를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살인자는 피해자의 용서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인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기에 죄를 사함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은 살인자를 용서한 신(神)을 향해 복수하는 인간의 삶을 살겠다며 무섭게 절규하고, 그녀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만 간다. 영화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보이는 살인자에 대해 용서할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겨 버린 한 인간의 무너져가는 삶의 궤적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절제된 영상의 힘을 보여줌으로서 국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용서받을 자격은 무엇이고, 용서할 권리는 또 누구에게 있는가? 에 관한 딜레마적 질문을 책 한권 전체를 통해 던지는 저작 한권을 만난다. 마치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 <밀양>의 확장판과 같은 느낌의 책. 제 2차 세계대전 유럽 곳곳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믿기지않는 야만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저자 '시몬 비젠탈'은 종전 후 '유대역사기록센터'를 통해 무려 1100여명에 달하는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추격하여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인물이다. 자신의 아내를 제외한 일가친척 89명이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비극적 가정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는 본서를 통해 자신이 렘베르크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들을 담담한 필치로 기록한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나치 군인들에게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기력이 있으면 강제 노동을 위해 짐승과 같이 부려먹었고, 병들거나 기력이 다하면 가차없이 사형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비젠탈 또한 이러한 비극적 운명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자신의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러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수용소 바깥 외부 작업장으로 작업지원을 나가는 근무조에 뽑히게 된 비젠탈과 그의 동료들이 도착한 곳은 군 야전병원으로 개조한 예전 비젠탈이 다니던 모교였다. 그곳에서 어느 간호사에게 호출된 비젠탈은 그녀를 따라 건물 내 격리되어 있는 마치 임종실과 같은 분위기의 방으로 안내받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반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한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조우를 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나치 중에서도 악명 높은 히틀러 친위대인 SS의 대원이었던 카를이라는 군인이다.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SS대원들은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200여명 정도 되는 한무리의 유대인들을 집 한채에 몰아넣고, 집안 가득 석유통을 배치한 후 그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삽시간에 집은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현장 속 건물의 2층에서 어느 젊은 부부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의 눈을 감기고 1층으로 몸을 던진다. 불길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쳐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SS대원들은 미리 설치한 기관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하여 사살하고야 만다. 인간이 인두겁을 쓰고 같은 인간에게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잔혹한 광기의 현장 속에 SS대원 카를 또한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카를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지금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제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제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인지하고, 유대인 한명에게 자신이 SS대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악마적 만행을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려는 마지막 힘겨운 몸짓을 시도한다.

비젠탈의 손을 움켜 쥔 SS대원 카를은 자신이 무자비하게 죽인 유대인들을 대신해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하며 죽어가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간청을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만을 남겨둔 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책의 1부 말미에 저자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결코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매우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것인가?"

이어지는 책의 2부는 심포지엄으로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이 보내 온 비젠탈이 경험한 이 용서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대답으로 구성되어있다. 죽어가는 SS대원의 용서와 참회에 대해 용서했어야 했다는 반응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죄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이런 극명한 반응이 예상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흑백을 가리듯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성격의 주제, 질문이 아니기에 독자는 책의 원저 제목인 1부 해바라기를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야만 하는 윤리적 사고와 철학적 사유의 작업 속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2부 심포지엄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지성인들의 저마다의 의견은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 시몬 비젠탈은 바로 지금 이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는 독자로서 우리의 생각과 대답을 요구한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퍼부어대는 질문 속에 출입구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 미로와 같은 사고 체계의 혼선을 경험한다. 자! 당신 같으면 SS대원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비젠탈은 자신의 일가친척 모두가 나치에 의해 끌려가서 희생을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불행의 원흉은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나치 독일인들이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 민족을 대학살의 지옥 속으로 밀어넣은 이 짐승, 괴물같은 인간 SS대원은 용서의 손을 내민다.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심지어는 그 죄악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렇기에 기독교적 가르침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정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가? 나 또한 한명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서를 읽어내려가는 1주일 이상의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없는 용서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이성이 동의하지 않기에 내 신앙의 진실성 여부까지 의심될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경험한다.

이러한 어지러움 상념 속에서 어서 너의 의견을 피력하라고 말하는 저자 시몬 비젠탈의 종용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면서 나는 책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용서에 관한 바른 관점의 퍼즐 조각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할 권리가 비젠탈에게 있느냐의 문제이다. SS대원 카를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집단을 대표하는 불특정 유대인 한명을 불러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유대인 집단의 대표로 뽑힌(?)비젠탈은 그의 죄악상을 전해듣고 600만 유대인, 아니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기관총을 맞거나 불에 타죽은 200여명의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카를을 용서해야하는 처지에 놓인것이다. 그러나 비젠탈에게는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직접 용서해주는 것이다. 비젠탈은 그의 죄악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죽임 당한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가해자인 카를을 용서할 어떠한 권리도 없으며 오히려 그가 카를를 용서했더라면 그것은 죽임당한 수 많은 동족에 대한 배신이며 교만하고 오만스런 행동이었을 것이다.

서평의 서두에서 꺼낸 영화 <밀양>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신애가 아직 용서하지 않은 그 살인자에 대한 용서의 기회와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긴 채 절규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참회를 할 때 성립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미 죽어 없고, 가해자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2부 심포지엄의 대다수 지성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한 비젠탈의 결정을 지지한다.

초창기 미국의 인디언 대학살,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 세르비아-보스니아 인종청소, 중국의 티벳 대학살, 태평양 전쟁 일본군의 관동 대학살, 난징 대학살, 버마 대학살, 필리핀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 종족 분쟁. 중세 이전 사건들을 제외하고서도 근대 이후에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전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한국은 어떠한가? 수많은 일제의 잔인한 만행들과 6.25 전쟁, 제주 4.3, 광주 5.18까지...

10여년 전 몇개월 간 제주도에서 지낸 적이 있다. 제주도민들에게도 깡촌이라 불리는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 근처에 머무르던 당시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가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고즈넉함의 장소 속 구멍가게에는 어린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각종 불량식품이 가득했다. 추억과 감성 소환을 위해 자주 찾았던 이 구멍가게의 주인은 연세가 지긋한 꼬부랑 할머니셨는데 낯선 젊은이들인 우리 일행을 볼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육지것' 들이라는 볼멘소리를 연거푸 내밷으신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머물렀던 그 지역이 제주 4.3 사건이 벌어진 비극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부모가 어린자식이 친척이 친구가 육지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에게 있어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그 지울 수 없는 증오와 고통스러운 기억이 우리를 부르는 육지것들이라는 호칭 속에 묻어나왔기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죄인이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인은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평생을 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 첫번째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 언급한 수 많은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와 국민들이 아픔을 준 상대 국가와 민족들에 대해서 진심어린 용서와 참회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여전히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에만 급급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도리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인면수심의 모습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 책은 용서의 자격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리고 용서할 권리 또한 아무에게나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한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저자 시몬 비젠탈은 내게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라고 되묻는다. 적어도 내게 용서의 행위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모든 용서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말하고 싶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고통을 안긴 피해자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야 한다. 피해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평생을 참회하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납작 엎드리는 삶을 살아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구하는 용서, 그가 받은 용서는 모두 거짓이며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개신교 신자로서 영혼의 떨림을 맛보게 하는 책 한권으로 1주일여의 시간동안 책장을 넘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분명 생명을 내건 한없는 용서를 말씀하셨건만 아직 나의 신앙과 경건의 깊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없음을 확인하며 쓸쓸히 책장을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크라테스'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이미지가 있다. "악법도 법이다"(물론 본서에는 나오지 않음), 세계 3대 악처로 유명한 그의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의 격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학창 시절 도덕, 윤리 시간 고대 서양철학 단원에서 항상 등장했던 단골 철학자라는 그 이름의 익숙함.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아마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너무나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그가 어떠한 사람이고, 그가 가진 사상과 철학적 사유에 대한 내용을 아는 일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문외한일 것이다. 이번에 인문고전을 꾸준히 출판해주고 있는 출판사 현대지성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생소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4편의 글을 한권으로 엮은 신간을 선보였고, 나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거인의 발자취를 되새겨보기 위해서 본서를 집어든다.

본서의 특징은 4편의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한권으로 묶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본서의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그의 수제자였던 플라톤이며 본서를 이루는 4편의 단편은 그의 저작인 <대화편>에 수록된 이야기들이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 본인이 남긴 저작이 없지만 그의 철학적 사상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서 전해진다. 본서에 수록된 첫번째 책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 사회가 믿는 신이 아닌 이방 잡신들을 믿는다는 이유와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궤변을 가르쳐서 그들을 타락시킨다는 불경죄로 고발된 후 법정에서 자신 스스로를 변론하는 이야기이다. <변명>을 펼쳐 든 독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자인 '멜레토스'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주장을 펼치며 소크라테스의 죄상을 토로한다. 그의 말 자체가 궤변과 억측인 상태에서 어떻게든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엮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멜레토스라는 인물 자체가 가지는 그 없어보임이 가련하기까지 하다.

소크라테스의 철학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어떠한 철학적 논지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형태였다. 그렇게함으로서 질문을 들은 상대방이 그 논지를 철학적으로 깊이 사유함으로서 맞든 틀리든 간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그의 철학함의 방법은 아테네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들 또한 소크라테스와 같이 아테네에서 소위 기득권을 선점하고 있던 지성들에게 이러한 도발을 감행한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쉽지 않은 철학적 논거를 질문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무지가 들통나는 오욕을 감당하면서 자신들의 명예는 물론 사회적 질서가 어지럽혀진다는 판단하에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그 범죄의 원흉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지명하고 급기야는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하게 된 것이다.

두번째 책인 <크리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그의 죽마고우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과 탈옥을 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를 설파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이다. 크리톤은 자신의 친구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며 친구인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구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당할 비난과 잘못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음해한 자들을 도와주는 결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의 가르침과 양육을 받고 자라야 할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임을 주지시키며 탈옥을 강하게 권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성과 논증을 통해 자신이 왜 탈옥할 수 없는지 그리고 급기야는 잘못된 판결이지만 순순히 사형을 당해야하는 당위성에 대해 조목조목 타당한 이유를 들어 반론한다.

세번째 책인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 당일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모여 '영혼불멸'과 '이데아'에 관한 기나긴 철학적 사유를 질문과 대화의 형식으로 논증하고 설파하는 시간을 갖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이다. 세상에는 참되고 궁극적인 소멸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이데아(형상, 원형)이다. 예를들어 현실 세계에서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그 꽃이 시들어버렸을 때 아름다움은 사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원형)는 남아서 다만 그 시들어져버린 꽃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영혼불멸과 연결시켰고, 영혼 또한 사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은 이미 선하고 아름답다라는 지식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것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기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함으로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며 알게 된 선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육체가 쇠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인간의 영혼 또한 육체와 함께 소멸해버리는 것이 아닌 불멸함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네번째 책 <향연>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 연예의 신 '에로스'를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추종자들은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모양의 에로스 신을 이야기하고, 찬미하며 높이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에로스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가진 공통점은 그들 모두 에로스 신을 연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기에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1차원적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관점이자 예찬이었다. 추종자들의 편협한 에로스 예찬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관능적이고 싱싱한 육체를 향한 욕망으로 표현되는 에로스의 단계를 벗어나서 인간의 아름다운 일과 미덕을 갈망하고 찬양하는 그리고 마침내는 아름다움의 원형인 이데아를 직관하고 관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에로스를 아는 것임을 말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의 추종자들이 에로스를 연예의 대상으로만 한정하여 바라본 것과는 달리 에로스를 연예의 주체로서 바라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철학함은 이성과 논증을 통해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라테스 당시 우주와 현실 세계에 대해 상대적인 지식을 규명하고 진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설파했던 지혜자들인 소피스트들에 반해 절대적 진리인 이데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규명하려 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분명 상반된다.

자신보다 탁월한 사람을 결코 가만두지 않는 세상이 내뿜는 시기심의 뜨거운 열기를 <변명>을 통해 체감한다. 모함과 음해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받아마셔야 하는 불의함 속에서도 정의와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철칙하에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운 모습은 <크리톤>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본인이 겪는 고초가 심하든 가볍든 상관없다. 불의를 당했다고 똑같이 불의를 통해서 되갚아주는 불의를 행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명예롭고 정의롭게 사는 길이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기꺼이 독배를 받아마신다.

책을 덮으며 갖은 상념이 머릿속을 맴돌며 울어댄다. 정의보다 불의가 팽배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이 앎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본서를 집어들고 나의 무지를 깨닫고 인간 세상의 무지를 발견한다. 나를 포함한 수 많은 사람들과 이 세상은 무지하기에 오늘도 정의를 실천할 수 없고, 불의를 행한다. 무지하기에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약자들의 눈물과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무지한 자들의 불의가 오늘도 뉴스의 한면을 장식한다.

살기 위해서 불의를 정의라고 왜곡한 사람들과 죽기 위해서 불의를 정의로 받아들인 소크라테스.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정의로 둔갑한 세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2400여년의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바른 정의의 관점을 새롭게 정렬한 위대한 인류 지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온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神)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소크라테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교 입문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사이구사 미쓰요시 지음, 이동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한국영화로서 전국 관객수 각각 1400만과 1200만을 찍은 최고의 흥행작이 있는데 다름아닌 <신과 함께 1, 2>이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망자들 가운데 덕이 있는 삶을 살다가 죽은 이른바 귀인 49명을 지옥 7개의 심판으로부터 무사히 통과할 수도 있도록 도와 환생시키면 본인들도 환생할 수 있는 상급을 받기 위해 저승 삼차사가 벌이는 이야기를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더불어 화려한 볼거리의 CG기법을 동원하여 제작한 토종 환타지 블록버스터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의 내용을 알기에 자세한 스토리를 차치하고, 이 영화의 1편과 2편 모두를 흥미롭게 관람한 후 내가 느낀 단상은 영화의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깊은 불교적 색채를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영화의 주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스토리를 끌고 가는 영화의 사상적 배경이 다름아닌 불교에 기인한 것임을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 49재와 환생, 10대 지옥과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소재 모든 것이 불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불교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함을 느끼며 집어든 책이 바로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책 <불교 입문>이다.

본서는 불교의 시작인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탄생과 시조, 불교의 사상과 분화, 역사적 변천과정과 각 나라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에 대해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사이구사 미쓰요시' 교수가 집필한 저작이다. 불교의 성립은 인도가 아닌 엄밀히 말해 지금의 히말라야 기슭의 네팔 지역에서 시작된다.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29세에 출가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과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됨으로서 불교는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은 넓게보아서 당시 불교의 시발점이 인도 문화권 안에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불교의 시작을 인도로 말하며 인도의 불교를 초, 중, 후기불교로 구분한다. 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는 인도 불교의 역사를 언급하고, 이어서 인도 불교의 사상사를 말하며 마지막에는 각지로 전파된 불교의 분화와 다양한 변천과정을 다룬다.

1부의 인도 불교사 속에서 초기불교는 석존이라 칭하는 붓다(고타마 싯다르타)가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과 함께 재가신자들에게 시주를 받는 검소하고 검약한 생활을 통해 깨달은 바를 발전시키고 계율을 확인하며 가르치는 일련의 일들을 행하는 모습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직 좀 더 체계적인 종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음을 보게된다. 그러나 이후 석존이 입멸하고 다수의 불제자들이 모여 석존의 생전 가르침과 계율을 확인하는 모임을 이룸으로서 중기불교의 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를 부파불교의 시작이라 본다. 중기불교의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그동안 '아가마' 즉 구전으로 전래된 석존의 가르침들을 비형식적 형태에서 벗어나 초기 경전의 형태로 집대성하게 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초기 경전은 바로 팔리5부, 한역4아함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때 대승불교 또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석존의 가르침은 깨달은 바를 통해 수행자 본인의 인격 도양과 수행 완수에 초점을 맞추었던 지극히 편협한 개념의 불교였다면 대승불교는 석존의 가르침을 통해 수행자 본인을 둘러싼 중생에 대한 구제와 긍휼을 우선시하는 불교의 또다른 사상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즉 수행자 본인만이 성불하여 부처가 되기를 추구했던 이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보살로서 무지한 중생을 위해 석존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 속에 적용하기를 독려했고, 이러한 선행을 행하는 모든 중생의 보살들 또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전 전통적 부파불교와는 다른 사상적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러한 대승불교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파되고 이렇게 동북아시아에 전래된 불교는 중생 구제라는 사회적 운동의 이미지를 적지 않게 갖게 된다. 반면 대승불교와는 달리 전통적이고 개인적인 성향 속에서 석존의 가르침을 고수하며 개인의 해탈과 성불을 목표로 삼는 소승불교는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시아로 전파되며 남방불교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책의 중반부에서는 인도 불교의 사상사가 기술된다. 사실 불교를 심도 있게 공부한 사람이나 독실한 불자가 아닌 이상 불교의 사상적 가르침들을 전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 하다. 많은 한문과 생소한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어휘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기에 그렇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집중하게 된 인도 불교 사상사에 관한 내용 중 한가지는 '십이인연' 즉 '연기설'에 관한 내용이다. 현재의 삶 속에서 인간이 만나게 되는 고난과 고통, 선악의 일들은 원인과 여러 조건을 포함하는 많은 연(인연)에 근거한 생기, 즉 관계를 통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일련의 결과는 그 결과를 만드는 필연적 원인과 관계된다는 의미로서 그렇기에 인간사 모든 일들은 독립적이고 독단적으로 형성되고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이 인과 연으로서 얽히고 설켜 서로에게 인과관계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도 이러한 불교적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 <신과 함께> 2편의 부제가 바로 '인과 연'이다. 영화를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2편은 바로 이 원인과 결과로서 얽히고 설킨 인물들의 과거가 공개되며 스토리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또한 카르마로 불리는 '업' 에 관한 내용은 흔히들 어떠한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 닥친 어려움을 빗대어서 "그것이 바로 당신의 업보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기하게 만든다. 즉 업이란 행동, 행위로서 표현되어지며 이것은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업은 원인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결과로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시 행위를 이끄는 윤회적 양상을 보인다. 본서에서 저자는 이러한 업을 행위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며 그것은 죽더라도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불어 사람의 업은 행위에 수반하는 책임이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현생에서의 행위는 사후에 본인이 어떠한 존재로 재생될 것인가에 대한 윤회적 결과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즉 전생의 행위는 사람이 사후 다시 태어날 때 고귀한 계급의 귀인으로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개, 돼지와 같은 축생, 그것도 아니면 아귀와 같은 악마적 존재로 환생할 것인지를 가르는 중요한 준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업의 사상은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간 남전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또한 <신과 함께> 1편의 부제가 바로 '죄와 벌' 이라는 것을 통해서 영화의 전면에 흐르는 주된 메시지의 모티브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차태현이 열연한 극중 소방관 자홍을 귀인으로서 환생시키기 위해 저승 삼차사는 지옥의 7가지 심판을 통과한다. 그런데 이때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지옥 심연의 형벌을 받고 있는 수 많은 망자들의 모습을 리얼한 CG로 재생시킨 장면들은 바로 이 업 사상과 관련된 업보, 즉 자신의 죄된 행위의 결과로서 벌을 받는 인간들의 당연한 귀결 속에 흐르는 불교적 세계관 그 자체이다.

이후 책은 3부를 통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남전불교와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의 북전불교를 구분하고 비교하며 특색있게 토착화 된 각지의 다양한 불교적 가르침과 사상의 한단면을 간략하게 기술한다. 어려운 용어들이 수 없이 등장해서 사실 일독을 통해서는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온전히 섭렵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었을 때 대략 지식의 기본적 골격을 세울 수 있기에는 적당한 저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더 깊이 들어가려면 불교학을 전공해야하겠지만 독자들 대다수가 그렇게까지 할 만한 사람은 없으리라 보기에 본서 한권으로도 불교에 관한 보편적 지식을 얻기에는 무리가 없다. 지난 2주간 본서를 읽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개신교 신자인 나의 책상에 <불교 입문>이라는 책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지인들이 "불교로 개종하게?" 라고 웃음끼 섞인 농을 던진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개신교 신앙에 내 삶을 맡겼는데 무슨 개종을 하겠는가! 단지 타종교를 이해하고 그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그들 입장에서의 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지적 호기심이 본서를 집어들도록 이끌었을 뿐이다.

불교의 형성과 발전, 불교 사상이 가진 깊은 의미를 그들이 볼 때 타종교인이며 이방인인 나의 관점으로 얼마나 더 이해할 수 있겠느냐만서도 한가지 확실히 깨닫는 바는 모든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를 향한 그 끊임없는 갈망과 타는듯한 종교적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라고 말했다. 오직 초월적 존재만이 채울 수 있는 인간의 텅빈 마음은 갈급한 영혼들에게 무엇인가 궁극적 채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학문과 철학, 사상이 될 수도 있고 돈과 명예와 권력, 쾌락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불교의 시작을 알린 석존은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사 모든 영욕의 시간을 내려놓고 보리수 아래에서 고행을 수반한 명상과 깨달음을 통해 해탈과 열반을 추구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널 마킹 - 현대 유럽 축구의 철학과 전술적 진화
마이클 콕스 지음, 이성모 외 옮김, 한준희 감수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 영국의 토트넘과 세르비아의 츠베즈다간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조별 3차전은 축구, 특별히 유럽 클럽 축구를 즐겨보는 한국의 축구팬들을 열광하게 만든 경기였다. 현재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 축구의 주무대인 유럽을 뒤흔들며 차범근과 박지성의 계보를 잇는 '손세이셔널' 손흥민 선수의 유럽 통산 122, 123번째 골이 터졌기에 그렇다. 더욱더 고무적인 사실은 70년대 축구 변방 작은 나라 한국을 유럽에 알린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 감독의 유럽 통산 121골을 갱신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기에 축구팬은 물론이거니와 많은이들을 설레이게 만든 순간이었다. 손흥민 선수가 유럽이라는 축구의 본고장에서 그 날고 긴다는 슈퍼스타급의 선수들과 부대끼며 통산 123번째 골을 통해서 차범근 감독의 기록을 갱신했다는 사실은 수치와 기록이 보여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듯 지금 손흥민 선수가 써내려가고 있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의 기록들은 이제 차범근 감독 이후 새로운 역사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가슴떨리고 흥분되는 마음에 꺼지지 않는 불을 붙일만한 한권의 책을 만난다. 세계적인 축구 전술전문가인 '마이클 콕스'의 축구 전술서인 <조널 마킹>이 그것이다. 현대 유럽 축구의 철학과 전술적 진화라는 부제가 붙은 본서는 현대 유럽 축구를 선도한 7개 나라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영국을 타겟으로 하여 유럽 축구의 전술적 변화와 역사, 그리고 각국의 전술적 핵심으로 자리잡았던 선수들과 그들을 조련한 명장들에 관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책의 특징은 1992년부터 4년 단위로 끊어서 각 시대를 풍미하고,주름잡았던 7개의 나라 중 각 시대를 대표하는 나라의 대표적 전술과 변화, 흐름을 메인 테마로 선정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20세기말 현대 유럽 축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저자의 해박한 축구 지식은 580페이지가 넘는 본서의 분량만큼이나 전문적이고 백과사전과 같은 폭넓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저자는 각국의 대표팀만을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보다는 대표팀과 더불어 각국의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소위 빅클럽의 이야기를 동시에 등장시키기에 축구팬과 독자의 입장에서는 리그 클럽팀과 대표팀의 전술적 변화와 연계를 두루 확인할 수 있는 유익과 재미가 있다. 그렇기에 축구를 사랑하는 축구팬들의 입장에서 본서는 유럽 축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라 아니할 수 없다.

오렌지군단 네덜란드는 토탈사커라는 전술적 특징을 통해 강력한 공격 축구의 진면모를 보인 나라다. 대표적인 클럽은 네덜란드 프로리그인 에레디비지에의 강호 아약스가 있다. 더불어 유럽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보았을법한 네덜란드 축구의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 베르캄푸, 판 할 등의 이름은 네덜란드 축구가 90년대 초중반 유럽을 호령했던 시절 그들의 진가를 발휘한 전설적인 축구 선수들이다. 네덜란드는 개인과 조직의 갈등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두드러졌던 팀이었다. 특별히 선수 개개인의 스타성을 인정하며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려고 했던 크루이프와 달리 조직의 규율과 팀으로서의 정체성에 의미를 두었던 판 할간의 미묘한 차이와 갈등은 90년대 초중반 네덜란드 축구를 이야기하는 특색 중 하나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토탈사커는 이후 카테나치오라 불리는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의 빗장수비 축구에 전술적 우위를 넘긴다. 아니 전술적 우위를 넘겼다기보다는 흐름이 넘어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공격수에 대항하여 항상 수적 우위를 통해 전술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축구를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탈리아의 그 유명한 카테나치오(빗장수비)축구이다. 이탈리아 프로리그 세리에A를 대표하는 클럽은 지금 슈퍼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몸담고 있는 유벤투스, 인테르 밀란, AC밀란, AS로마, 피오렌티나 등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이탈리아의 클럽을 뒤로하고 유로2000에서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한 그 시점을 전문가들은 이탈리아 축구의 전술적 흐름이 프랑스로 넘어갔음에 대한 신호탄으로 여긴다. 프랑스 프로리그 리그1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파리 생제르망, AS모나코, 릴 등의 클럽이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프로리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럽 프로리그에서 리그1의 인지도가 낮기에 본서에서는 리그1의 클럽 이야기보다는 프랑스 대표팀을 아트사커라고 불리도록 헌신한 위대한 선수들의 이야기와 그들과 관련된 전술적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 핵심은 당연히 프랑스 축구의 레전드들인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 트레제게와 같은 선수들이다. 특별히 중원의 사령관 지네딘 지단은 플레이메이커로서의 10번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며 아트사커 프랑스의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함과 스피디한 축구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조세 무리뉴 감독의 포르투갈은 프랑스로부터 전술적 흐름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사실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리그의 유명세가 떨어지는 포르투갈의 프리메이라리가의 대표적 클럽인 포르투는 조세 무리뉴 감독의 지도하에 2004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한다. 상대적으로 엄청난 자금력을 내세운 유럽의 명문 빅클럽들을 제치고 차지한 우승 트로피이기에 그 의미는 FC 포르투 특정 클럽의 영예가 아닌 포르투갈 전체의 영광이었다. 이후 스페인 프로리그 프리메라리가의 엘 클라시코라는 전 세계 최고의 라이벌 클럽 대항전을 통해 독자는 슈퍼스타 군단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불꽃튀는 축구 전쟁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다. '축알못'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기라성같은 축구 선수들이 조세 무리뉴와 펩 과르디올라라는 명장들의 전술적 지휘하에 격돌한 엘 클라시코의 전술적 변화와 그 안에서 벌어진 숨겨진 이야기들은 축구팬과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무적함대 스페인의 축구는 티키타카라는 짧고 빠른 패스 위주의 전술적 특색으로 표현된다. 과르디올라 감독에 의해 바르셀로나에 이식된 티키타카 전술은 볼의 점유율을 극대화시키는 전술이다. 볼의 점유율이 높은 팀이 상대적으로 승리할 공산이 크다는 확정할 수 없는 전술적 특징을 가진 스페인 축구는 이후 게겐프레싱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술적 변화를 들고 나온 독일에 그 흐름을 양보하게 된다. 전차군단 독일의 축구 전술은 위르겐 클롭이라는 탁월한 감독에 의해서 도르트문트라는 독일 프로리그 분데스리가의 명문구단을 통해 이식되어 전파되어진다. 게겐프레싱은 상대에게 공을 빼앗겼을 때 지체함 없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시 공을 빼앗아오기 위한 일종의 압박 전술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게겐프레싱을 통해 역습 상황에서 역습해 들어오는 상대 공격수를 수비수가 뒷걸음질치며 수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전방 압박을 통해 역습의 시간을 늦추고, 가능하면 공을 빼앗아 바로 역역공으로 전환하는 것까지로 보는 게겐프레싱은 클롭 감독에 의해 이후 도르트문트 뿐 아니라 라이벌 클럽인 바이에른 뮌헨까지 게겐프레싱 전술의 수혜를 얻도록 만든다.

이후 우리의 손흥민 선수가 현재 활약하고 있는 영국의 프리미어리그의 이야기가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프리미어리그는 전 세계 축구 선수들과 축구팬들에게는 꿈의 무대라고 불리는 유럽 축구의 대표적 프로리그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저자는 프리미어 리그가 영국인 감독이나 선수들보다는 오히려 외국 감독과 선수들의 영입이 더 활발하기에 전통적인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특색이나 색채는 다소 약함을 지적한다. 그래서 영국을 설명하는 챕터의 소제목 중 하나가 '더 믹서' 가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색깔과 배경을 지닌 감독들과 선수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섞여서 예측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전술적 완성도를 선보이는 리그이다보니 그 경기의 다채로움과 흥미진진함, 스펙타클함은 여느 다른 나라의 프로리그와는 비교불가의 재미가 있다.

책을 덮으며 축구라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거의 600여페이지 가까운 전술서 한권을 탄생시킨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현대 유럽 축구의 역사와 전술적 변화, 철학을 접함으로서 앞으로 유럽 축구를 즐기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만 같다. 감독들이 왜 저렇게 지시하고, 선수 포메이션을 어떤 이유로 구성했으며 왜 특정 선수를 선호하는지와 같은 이유를 아주 작게나마 발견하게 된다. 바둑을 두는 분들은 허구한 날 바둑 기보책을 보며 혼자 바둑 두는 연습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바둑판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수 많은 전략과 전술이 머릿속을 오간다. 축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피치 위에서 뛰는 선수들의 피지컬, 뛰어난 개인 기량과 더불어 선수 11명의 조직적인 팀플레이는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피치 밖 테크니컬 라인에서 22명의 선수들을 응시하며 수 많은 전략과 전술의 퍼즐들을 머릿속에 떠올린 채 선수들의 위치를 지정하고 때로는 수정하면서 경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조율하는 감독들의 지략 싸움은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데 있어 바둑의 수 싸움만큼 중요하며 치열하다.

본서는 이와 같이 현대 유럽 축구 전술의 탄생과 변화, 역사를 통해 지금껏 있어왔고 현재도 진행형인 위대한 축구인들의 행보를 한눈에 살펴보기에 충분한 저작이다. 70년대 차범근이라는 위대한 축구 선수 한명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프리미어리그라는 슈퍼무대에서 차범근의 뒤를 이어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손흥민이라는 걸출한 스타 플레이어의 활약을 흥분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축구팬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손세이셔널 손흥민 선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너무나 행복하여 쉽사리 믿겨지지 않는 사실이 바로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 또한 손세이셔널 손흥민 선수의 리그 4호골을 기대하며 벌써부터 다음주에 있게 될 웨스트햄과의 13라운드가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