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5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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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이하 생략)

 

이 거룩하고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문장은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법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드린 <평화의 기도>다. 중세 기독교 영성의 진수라 불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사는 1182년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정규 교육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영위했지만 이후 로마를 순례하는 도중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자신에게 주어질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한채 본격적인 수도사의 삶으로 전향하기에 이른다.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순결, 청빈을 삶의 가장 지고한 목표로 삼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끊임없이 고난과 고행 속에 던졌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행적과 그를 따랐던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제자들의 삶의 흔적들은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문서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 '우골리노'형제가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의 신앙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기록한 책이 바로 본서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이다.

책은 서론을 제외하고 크게 총 6부로 나누어져있다.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첫 제자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주를 이루는 전반부와 프란체스코가 천사로부터 오상을 받는 장면, 주니퍼, 길레스 형제들의 행적 등이 기록된 중반부와 후반부의 구성이다. 자발적 헌신을 통한 믿음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동경했던 이들 수도사들은 청빈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깨끗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자신보다는 이웃의 삶을 염려하며 돌보는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성경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본인들의 삶의 지평 속에 풀어놓았다. 끊임없는 기도와 금욕, 고행은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무이자 신앙의 기쁨으로 드러났고, 이들의 이러한 깨끗하고 투명한 삶의 모습은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들의 삶이 대중들에게 환영받고 숭앙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벌거벗음과 누추함의 모습은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적지 않은 대중들에게 항상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갖은 욕설과 비아냥의 희생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렇게 무지한 대중들에게 받는 손가락질과 업신여김은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하늘의 기쁨이었으며 행복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리뷰의 서두에서 <평화의 기도>를 짤막하게나마 소개한 이유는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세상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리고 싶어서였다. 야만과 광기로 얼룩진 중세 암흑의 시대를 살아내었던 이들에게 반목과 투쟁이 아닌 화합과 상생을 위한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자신들의 삶이 그러한 고귀한 사명을 위해 도구로서 쓰이기를 갈망했다는 것은 세상의 부유함과 안락함을 버릴 수 있었던 이들 삶의 근본적 동기였으며 원천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던 깊은 신앙과 경건 가운데서 샘솟았다.

프란체스코는 당시 문둥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어느 날 문둥 병자 중에서 유독 화를 잘 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수사들을 공격하고 모욕하며 욕지거리를 행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기에 마침내는 프란체스코가 그를 만났다. 그가 갖은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프란체스코가 아랑곳 않고 약초를 넣은 물을 끓여서 이 배은망덕한 문둥 병자의 몸을 조용히 닦아주자 기적이 일어났다. 문둥 병자의 피부는 깨끗해졌으며 자신의 몸이 치유된 것을 확인한 병자는 프란체스코 앞에서 회개와 참회의 눈물을 쏟고 새사람이 되었다. 이렇듯 아무도 돌보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프란체스코 수사는 영혼에 대한 연민을 가진 신자였다.

이외에도 프란체스코 수사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신앙적 미담은 본서에 가득하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기독교의 시대를 살다 갔던 사람이기에 당연히 프란체스코는 카톨릭의 성인으로 시성 된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 또한 개신교보다는 카톨릭적인 색채가 강한 저작이다. 책의 내용 중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옥 교리와 마리아 몽천설, 오상, 자연스러운 카톨릭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 책의 시대적이며 종교적인 배경을 드러내준다. 나는 한 명의 평범한 개신교 신자로서 이 책을 펼쳐들고 읽으며 단순히 개신교와 카톨릭의 종교적 구분이나 교리적 차이가 아닌 프란체스코라는 비범한 역사적 인물과 그를 따랐던 제자들의 신앙의 모습이 보여주는 교훈에 집중했다.

피폐해진 인간성과 고갈된 인간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작금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던져 이웃의 삶을 보듬을 수 있었던 이 위대한 인물들의 삶은 지금을 살아가는 메마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선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개신교와 카톨릭의 구분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현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있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가장 높고 고결한 신앙적 덕목이 아닐 수 없다. 항상 그렇듯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며 육체적 아픔을 견디고 있다. 자기 부인과 겸손, 타자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필요한 시대,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듯 지난하기만 한 지금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이때,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의 삶은 독자들의 영혼의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충분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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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 -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 현대지성 클래식 33
토머스 모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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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새로운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도권 전세난이 심각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셋값에 집 없는 서민들의 애간장이 끓는다. 정부는 맞춤형 공공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공언했지만 널뛰듯 뛰어오르는 집값을 붙잡기에는 역부족 같다. 집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동산 천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쓰디쓴 현실을 뉴스 너머로 접하며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는데 책 제목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유토피아>

나는 우습게도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모어'를 개신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서로 육두문자까지 날리며 설전을 벌였다는 야사(野史)로 먼저 접했다. 15세기 중후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는 당시 중세 유럽의 정치와 경제, 종교, 문화 등을 풍자와 해학으로 고발한 허구적 소설이다. 마치 이후 출간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예고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본서가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적절히 믹스시켜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저자인 모어는 본서에서 극중 화자인 '라파엘'이라는 탐험가를 만나 그를 통해 유토피아라는 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중세 영국과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종교의 일반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매우 독특한 유토피아 나라의 문물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별천지이며 결코 존재하기 어려운 그런 나라의 모습이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모어가 라파엘 씨를 만나서 그와 대화하며 현재 영국과 유럽의 정치와 경제, 사회 시스템이 가진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대해 고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단편적인 예로 당시 소수의 귀족들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소작농의 피땀으로 거둬들인 생산물을 가지고 놀고먹는 유한계급을 형성했다. 이후 양모 값이 폭등하자 귀족들은 농작물을 재배하던 농지를 전부 양을 키우는 목초지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소작농으로서 근근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던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대거 사회의 최빈곤층으로 전락해버리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런 합법적 불의라고 불리는 역설적 단어가 판을 쳤던 시대가 다름 아닌 저자인 모어가 살던 중세 영국과 유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시스템의 붕괴로 부랑자와 거지가 되어버린 수많은 농민들은 이윽고 생사의 코너로 몰리게 되고 급기야는 절도범이 되어 범죄를 저지르다가 붙잡혀서 교수형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모어는 1권에서 이렇게 당시 영국과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사회적 불의에 대해 일갈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토피아에 대해서 서술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얼토당토 할 만큼 파격적이다. 우선적으로 이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유재산의 부정이다. 모든 국민들에게 있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없다. 공동생산 공동분배라는 경제 시스템이 이 나라를 이끄는 근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재산을 갖기 위해서 머리 터져라 싸울 필요도 없고 열심히 일해서 거둬들인 수확은 모든 국민이 동일하게 분배하고 사용하기에 어느 사회에서나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의 격차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정치인들은 시민들 가운데서 선발되는데 정치인들의 기본적 인성이 너무나 고결하고 빼어나 국민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 결코 불의와 부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청렴결백함과 공의와 공정함으로 행한다.

 

 

 

1부와 2부의 내용을 극명하게 대조시킴으로서 현실 정치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공정함, 불의한 모습을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만든 모어의 문학적 탁월함이 엿보인다. 더불어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 집행관 대리라는 그의 직업적 이력이 돋보이는 저작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유토피아'라는 책의 제목이 가지는 어휘의 의미인데 헬라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 자체가 가진 허구성이다. 사유재산 없이 공동분배를 행하며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가족처럼 돌보고 관용과 사랑이 넘쳐나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나라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 같은 나라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 팩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인간 이성에 대한 동경과 무한 신뢰를 바탕으로 모어는 이러한 나라를 꿈꾼 것 같다. 넘쳐나는 부랑자와 거지, 극명하게 갈린 빈부의 격차, 허영심과 오만의 팽배, 극단적인 법의 집행과 국가 권력의 남용 등을 바라보며 이처럼 모든 불의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개혁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모어 자신도 책의 말미에 자신의 바람과 이야기가 결코 현실 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기독교가 가진 성경적 가치를 어느 정도 녹여내려 한 흔적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결국은 유토피아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인간 본성의 타락이라는 원죄의 문제로 귀결된다.

 

책의 내용 중 모어는 작중 화자인 라파엘 씨의 입을 빌려 왜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지에 관한 가장 근본적 이유를 내비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 그중에서도 '과시욕'에 대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를 따지는 소유욕의 문제보다 더 부각되는 것은 바로 남이 나보다 얼마나 덜 가졌느냐를 통한 비교우위로 인한 자기 자랑이라는 극도의 쾌감을 만끽하고자 하는 타락한 본성, 탐욕의 끝판왕 '과시욕', 남과의 무한 비교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그 마성의 본성적 쾌락은 바로 사유 재산이라는 연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며 그렇기에 사유재산 부정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유토피아는 이름 그대로 결코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모어는 유토피아가 자신의 희망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는 자신의 바람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서두에서 꺼낸 가중되는 전세난과 더욱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점점 깊어지는 사회 계층 간의 골, 따뜻한 인정 대신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반목하는 사회 정서 등을 볼 때 나 또한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와 같은 나라가 이 땅 위에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본서가 가진 의의는 플라톤의 <국가>를 뛰어넘는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며 이후 세대에게 있어서 바른 정치와 사회 구조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지향하며 나아가야 할 행복은 중세 기독교적 가치가 가르쳤던 내세에서의 행복과 더불어 이 땅에서의 행복 또한 포함한다. 온전한 이상향, 완벽한 유토피아는 결코 이룰 수 없지만 500여 년 전 절대왕정 시대의 기로에서 최상의 공화국 형태를 꿈꾸며 인간애와 관용, 공정하고 공평한 바른 사회적 공익 실현을 독려한 본서의 가치는 21세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바른 지침이 되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귀하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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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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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남대서양의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이들이 탄 구명보트에는 순무 통조림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선장과 일등 항해사, 일반 선원 그리고 배의 급사로서 잡무를 보던 열일곱 살 소년 한 명으로 구성된 난파자들은 순무 통조림과 운 좋게 잡은 바다거북 한 마리를 가지고 연명하며 구조를 기다렸다. 이후 여드레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잡무를 보던 소년은 주위의 충고를 무시한 채 바닷물을 먹고 병에 걸려 구명보트 한켠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19일의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날 선장은 일등 항해사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후 날카로운 주머니칼로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있는 열일곱 살 소년의 경정맥 급소를 찔렀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의 남자들은 나흘간 소년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난파 24일째 되는 날 드디어 배가 나타났고, 이들 세 명은 모두 구조되었으며 영국으로 송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사 직전에 있었던 세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한 명의 목숨을 빼앗아 인육으로 연명한 이들에 대해서 당신이 판사라면 어떠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위의 이야기는 10년 전 출간되어 우리나라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최대다수의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 챕터에 나오는 실화이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바로 우리가 학창 시절 도덕, 윤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용어인 공리주의를 다룬 일종의 윤리 철학서다. 공리주의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명제가 떠오른다. 이는 보통 행복을 양적으로 평가하고 이해한 '제러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말이다. 개인과 소수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기에는 사실 부족함이 있는 벤담의 공리주의와는 달리 수정된 공리주의로서 질적 공리주의를 표방한 사람이 벤담의 제자이며 이 책 <공리주의>의 저자인 영국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다.

공리주의는 utility(효용, 유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의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는 개인의 쾌락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중요한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행복은 쾌락을 증진시키며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공리주의는 쾌락을 계량할 수 있다고 주장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나뉜다. 양적 공리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소수의 의견이나 권익이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반면 수정된 공리주의로서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밀은 행복을 나만의 행복으로 국한시키지 않았기에 나의 행복과 당신의 행복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고려했다. 그렇기에 밀에게 있어서 스승인 벤담이 주장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도덕 행위자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느낄 수 있는 최대행복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의 행복인 일반 행복이 바로 모든 인간 행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몇 해 전 현대지성에서 밀의 <자유론>이 출간되어 완독한 경험이 있다. 개인의 자유는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영미권 최고의 고전을 접하며 마음속 깊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이 각인되었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밀의 또 다른 대표작 <공리주의>를 읽으며 다시금 밀의 시대를 읽는 혜안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19세기 영국이라는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당시 시대상에 비춰볼 때 개개인의 동등한 행복보다는 산업화로 인해서 부를 획득한 소위 유한계급들만의 행복이 추구되었을 시대에 밀의 공리주의는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다시 말해서 소수의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한 추구를 말 그대로 최대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동등하게 누리는 것만이 진정한 공리이며 고상한 도덕적 규범임을 설파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밀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급진적 성향의 선구자와 같은 인물이었을지도 짐작하게 된다.

밀은 행복과 만족을 구분했고 행복이 만족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속에는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행복과 만족의 상관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더불어 밀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우월하며 고상하다고 말했다. 나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있어서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통한 행복과 만족의 결과는 고작 금요일 심야에 안락한 소파에 반쯤 기대고 누워서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볼 것인가(육체적 쾌락) 아니면 내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아 쌓여 있는 책들을 완독해 갈 것인가(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와 같은 하찮은 것들이다. 그렇기에 밀이 이 책에서 말하는 공리주의는 사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쉽사리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 속에서 지각과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의무를 가진다면 본서는 반드시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는 고전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서평의 서두에서 말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난파된 세 명의 남자가 한 명의 소년을 죽이고 그의 살과 피로 연명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을 논해 보도록 하자! 만약 당신이 판사라면 당신은 어떠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배의 급사로 일한 소년은 고아이다. 그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없으며 그는 당시 바닷물을 마시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선원들은 모두 다 영국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굶어죽게 된다면 많은 가족들이 절망과 슬픔 속에 한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밀은 책에서 사회적 공리와 개인적 공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유론>까지 집필했던 밀은 자유와 공리의 상관관계를 항상 염두에 둔 듯하다. 그는 허용될 수 있는 불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적 공리와 개인적 공리가 충돌할 때 개인이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음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제한과 한계를 전제하며 전체적인 밀의 의도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지향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먼저 알게 된 공리주의를 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한 일주일의 시간이었다. 논란도 많고 반론도 팽배했던 도덕 철학 사상의 알쏭달쏭함이 한 주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찌 되었든 한번 읽고 꽂아두기에는 나의 이해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서가에 안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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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전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2
이솝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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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교훈 가득한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솝 우화' 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솝 우화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재미있는 동화가 아니다. 헬라어 이름으로는 '아이소포스'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작가인 '이솝', 그가 지은 이솝 우화라는 비수가 겨냥하는 것은 아이들의 동심이 아닌 세상 때가 적당히 묻은 인간 군상의 굳을 대로 굳은 심장이다. 좋은 인문고전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선보인 <이솝 우화 전집>은 총 358편의 짤막한 우화가 한 권으로 잘 편집된 책이다. 짧은 단편의 이야기들이 내뿜는 포스는 결코 우화 같지 않다. "유후! 이 책 되게 웃기고 재미있네!"라고 기쁨의 탄성을 연호하며 책장을 넘기지만 이윽고 표정이 진지해지는 나의 모습을 느낀다.

책의 등장인물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인간 외의 존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말 못 하는 미물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한편이 던지는 메시지는 마냥 즐겁게 웃을 수만 있는 내용이 아니다. 매 페이지는 인간 세상에 대한 풍자와 익살, 해학의 장이다. 직설적으로 인간들의 허망한 욕심과 탐욕에 대해 날카롭게 경고하기도 하며 때로는 우회적으로 돌려서 뒤통수를 때리는 비유 문학의 기지를 발휘하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는 삶의 지혜를 배우고, 참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며 더불어 인생의 단맛 쓴맛을 간접 체험하기도 한다. 사형을 앞둔 소크라테스가 탐독했다는 책! 깊은 진국과 같은 단편의 이야기들이 가진 매력은 사형을 앞둔 사람마저도 죽음의 공포를 잊고 탐독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는가?

 

 

 

특별히 책을 읽다가 발견하는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솝 우화의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미 아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동화로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쥐와 시골쥐, 북풍과 해, 여우와 포도송이, 금도끼 은도끼, 나그네들과 곰, 양치기 소년 등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린 시절 동화책 속에서 접했던 단순하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이 사실 이솝 우화가 원작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반가움은 책이 주는 보너스다.

개인적으로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 신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들과 동물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제우스는 동물의 수가 너무 많으니 동물 중 일부를 사람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동물 수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람으로 지음 받지 않았던 것들은 사람의 모양에 동물의 영혼을 갖게 되었다." 두 단락으로 끝나는 이 짤막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 그 자체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판을 치는 작금의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우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야말로 시대적 적실성을 갖는다.

짐승의 영혼을 가진 인간들에 대한 풍자를 통해 저자인 이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 명료하다. 즉 인간답게 살라는 것! 재미와 흥미로운 기대감을 갖고 집어 든 책 한 권을 끝내며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더불어 돈 앞에서 인간의 생명이 슈팅 게임의 표적 정도로 전락되어버린 이 야만과 광기의 시대 속에서 전해 듣는 이솝의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다. 듣고 싶지 않기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끔 만드는 단편 우화들이 가진 그 서늘함이 마치 잘 갈린 푸르스름한 과도의 그것과 같다. 애초에 이솝 우화가 염두에 둔 독자는 아이들이 아니기에 이야기가 가진 껄끄러움은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있어서는 불편함 그 자체다.

그런데 덧붙여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인 이솝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외교 사절로 델포이로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본서의 네 번째 이야기인 <독수리와 쇠똥구리>이야기를 하다가 델포이 사람들을 격노케 함으로서 낭떠러지에서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는 이솝의 최후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약점과 과오가 지적받고 들추임 당하는 것에 대해 진저리 나게 싫어한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팩트임을 보여주며 동시에 인간 본성의 민낯을 정확히 꼬집은 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본서는 진리와 진실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오로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듣고 행하고자 원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끝이 없는 탐욕, 도를 넘어선 오만함에 대하여 시대를 초월한 혜안과 통찰력을 선보인 저자 이솝의 천재성을 엿보게 되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깊어가는 가을... 2500여년 전 당대의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던 이야기책 한 권을 통해 인생의 지혜와 교훈,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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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괴물 백과 - 신화와 전설 속 110가지 괴물 이야기
류싱 지음, 이지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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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세계적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로고를 두고 침 튀어가며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스타벅스를 상징하는 로고의 여인이 여신이다! 요정이다! 등의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사실은 '사이렌'이라고 불리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일종의 괴물이었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문화적 콘텐츠로서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 중 하나가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모습의 괴물과 괴생명체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상업적으로 가장 잘 이용하는 곳이 바로 현대의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 밤마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들었던 다양한 전설 속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도깨비, 구미호, 달걀귀신, 홍콩할매와 같은 존재들을 통해 우리는 이미 괴물에 대해 정서적으로 어느 정도 친숙함(?)을 느끼며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 만난 <세계 괴물 백과>라는 책은 내게 있어서 생소함보다는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 저작 중 한 권이었다.

 

이 책은 동서양을 통틀어 민간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괴물들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다. 고대 근동과 이집트, 그리스와 유럽 신화, 개신교 성경 속에 등장하는 종교 전설까지 110여 종의 전 세계 다양한 괴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로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등장하는 괴물들 가운데 우리에게 그 이름이 매우 익숙한 페가수스, 켄타우로스, 스핑크스, 사이렌, 유니콘, 늑대 인간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개인적으로 개신교 신자로서 구약 성경 욥기서를 통해 읽었던 레비아탄, 베헤못 그리고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스랍, 창세기에 등장하는 거룹(그룹)과 인신 제사의 악독함을 보여주는 몰록까지 역사적 고증을 통해 서술되는이야기들은 사뭇 흥미롭다.

 

저자는 이 책이 괴물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인간의 관념과 인식까지 그대로 비춰 보여주는 거울의 기록이라고 표현했다. 동서양에 걸쳐서 존재하는 공통된 관념은 모두 동일한 시기에 대동소이한 신화와 전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이 동시대와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투영시킨 일종의 메타포다. 그렇기에 어떠한 괴물이 출현했던 특정한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가 가진 고유의 사회적 메시지를 그 괴물체에 투사시켰다. 이렇게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지한 괴물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시대를 읽는 혜안과 더불어 지금의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해석 도구를 얻게 된다.

 

 

재미있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상상 속 존재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의 원형이 가진 진의를 파악하도록 독려하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로움과 동시에 교훈적이다. 특별히 나는 제5장 동방 여러 민족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괴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머리가 없는 종족인 '블레미에스', 식인 종족인 '안드로파기', 외발 종족인 '스키아푸스', 코 없는 사람이며 거대한 아랫입술을 가진 '에이맥티래' 와 같은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든 내용이었다. 사실 이들은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외형적인 모습이나 삶의 방식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평가는 거의 대부분이 유럽을 포함한 서양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문명사회를 이루며 주류 세계라 일컬어졌던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이들은 괴물이고, 비정상이며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정상이고 유럽인들이 괴물이 아니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관점의 차이다. 도대체 누가 괴물이며 누가 정상적인 인간인지에 관한 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와 기준은 어떻게 설정된 것인가 말이다! 마치 조너선 스위프트의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 제4부 후이늠국 이야기 편에서 고매한 존재인 말(馬)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이며 반대로 미개한 존재로 묘사되는 야후(인간)야말로 괴물적 존재로서 비정상적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사실 그 기준은 당시의 사회와 시대를 이끄는 주류 세력에 의한 제한적 해석일 따름이다.

 

마 전 뉴스를 통해 올 12월에 괴물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사회적 이슈로서 떠오른 적이 있다. 여아를 상대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간 후 복역을 끝내고 출소할 범죄자를 사회는 괴물로서 묘사했다. 그렇다! 다리가 하나 없고 아랫입술이 비정상적으로 커서 머리를 덮을 수도 있으며 머리가 없어서 얼굴이 가슴에 붙어있는 기형적 모습을 한 사람들만이 괴물일까?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격을 포기한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괴물이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었으나 내면은 괴물인 존재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바라보며 읽게 된 <세계 괴물 백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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