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문학과지성 시인선 450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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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시집, 마치, 문학과지성사
#이수명



1. 이수명 시인의 시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읽는 사람에 따라 같은 문장이 다르게 읽히고 독자의 경험이나 가치관과 뒤섞여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집을 세 권 째(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읽으니 시작(詩作)의 패턴을 조금 알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불명확하다.



이 시집은 교란을 의도하고 있다. 주체의 내면을 통과한 세계는 우울하고 착란적이다. 발코니에서 ‘집이 흔들려도 괜찮아’ ‘발코니에서 뛰어내려도 괜찮아’ ‘발코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발코니에서는 괜찮아」)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면 건물을 떠올리고 ‘공란이 많아서’ 운다(「이 건물에 대하여」)




교란은 주체의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작법(作法)의 등뼈를 이루고 있다. 표제작인 「마치」의 ‘마치’를 부사어가 아니라 행진(March)의 구호로 생각하고 읽어보자. 마치 눈앞에서 잎들이, 어깨들이 행진하며 꿈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지면」도 마찬가지다. 새들이 지면(地面)에 닿을 듯 말 듯한 풍경과 책상 앞 백지(紙面) 앞에서 써나가야 할 글에 대한 착상을 떠올리고 손가락으로 지면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중첩되면서 신비롭다.



다시 읽으면 또 어떤 교란이 나에게 즐거움을 줄까.




2. 메모


- 발코니에서는 괜찮아 21쪽

발코니에서는 괜찮아 집이 흔들려도 괜찮아 흔들릴 때마다 괜찮아 발코니에 서면 건축을 잃어버린다. 건축이 없어서 발코니에서는/ 잠을 잘 수 있다. 발코니에서 겹쳐지는 잠은 인기척이 없다. 몸이 잠을 휘감고 한없이 부풀어가고 몸으로 태어나고 싶어/ 나는 아무것도 일깨우지 않는다. 고개를 저을까 마음이 아플까 돌처럼 빈 들판에 박혀 있어서 꽃들은 몸을 보인다./ 욕이 흘러나온다. 발코니에서 뛰어내려도 괜찮아 두발을 도시에 들고 조금만 더 동시에 태어나는 거야 여기와 거기로 동시에 뛰어내리는 거야/ 바람은 얼마나 단단한가 새들이 날아가 부딪친 바람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새들을 떨어뜨리는 바람은 얼마나 안전한가/ 발코니에서는 괜찮아 한 걸음 더 나아가도 괜찮아 어디선가 사람들이 기우뚱 기울어진다. 나는 어느 모를 곳을 향해 한사코 기울어진다. 건축이 재빨리 지나간 뒤



- 이 건물에 대하여 22-23쪽

건물을 올려다본다. 건물을 드나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건물 안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공란이 많아서 울고 싶었다.// 등 뒤를 떨어뜨린다.// 건물은 무턱대고 치솟는다. 손가락을 모두 열어본다. 층과 층은 명랑하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건물이 완전히 펴지는 순간// 너는 건물을 버려라/ 공중으로 건물을 들어 올리지 말고// 건물을 올려다본다. 건물을 오르내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안에서 밖으로 추락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 공란이 걷기 시작한다.



- 지면 54-55쪽

새들은 언뜻 지면을 스쳐간다.// 뛰어내리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부딪히지 않아서 창문이 흔들리지 않아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흥얼거리고 돌아다녀서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혀이기만 해서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었는데// 나는 하나의 지면을 펼쳐 든다.// 내가 부딪히기 전에 이토록/ 갑작스러운// 지면에 당도하고 싶다.// 지면을 뒤덮도록 머리를 길러야지 온갖 희열을 벗어버리고 외투를 벗어버리고 오늘은 손가락이 있다고 말한다. 손가락으로 두드린다고 말한다. 손가락이 돋아난다고// 지면이 명령을 내리고/ 지면을 사정없이 찍어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곡괭이, 드릴, 불도저가 무조건 지면을 깨뜨리고 말지 어디에서나 연장일 것이며 연장을 빌려드립니다.//
숨을 고르게 펴고 처음 보는 카탈로그를 펴 들고// 나는 주문을 받고/ 돌아다닌다.// 누구의 등인가/ 구부러지며// 지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마치 58-59쪽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마치/ 죽은 잎들이 서 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꿈속에서 처음 보는 접시를 닦고 있구나 접시를 아무리 가지런히 놓아도/ 마치/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그러면 실시간/ 그러면 거리에는/ 마치/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숄들이 늘어서고/ 숄을 걸친 어깨들이/ 마치/ 다른 요일로 건너가고 있구나/ 다른 입김을 내뿜으며 돌아다니고 있구나/ 마치/ 흘러넘치듯이/ 끝없이 부풀어 오르듯이/ 그러면 나는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하얀 양들을 보러 가요/ 양 떼들이 별안간 걸어 나오는 것을 보러 가요/ 마치/ 여기를 묻어버려요/ 여기가 떠내려가요/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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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시인선 24
서대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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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서대경




1.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시집을 덮은 후 폐탄광촌의 이미지가 남는다. 모두가 떠나버린 마을의 담장과 하늘은 잿빛이고 거미줄처럼 공중을 옥죄는 전선들은 바람에 나부낀다. 수많은 구멍과 담장 사이로 쥐들이 돌아다니고 마을 근처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이 놓여 있다.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을 떠났던 사람이 꿈속에서 그곳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아버지, 어머니, 백치, 무당의 딸 등 실물과 헛것의 경계에 서있는 존재들이 가득하다.


시인 맨 앞의 ‘시인의 말(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처럼 주체는 자신이 없는 곳(대체로 꿈 속)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외로움에 몸부림 치는 움직임이라기 보다는 자기결정권을 가진 ‘완전한 고독’으로 빠져드는 주체다.



형식적으로도 대부분의 시가 산문형태이며 한 편마다 짧은 단편을 축약해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침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폐탄광촌을 견학한 듯.




2. 메모



- 차단기 기둥 옆에서 70쪽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소박한 삶 11쪽 부분

아름다운 그녀는 자전거를 탄다 (···) 가끔 소방차도 달린다 선명하게 붉은 사이렌이 그녀의 자전거를 스친다 (···) 텅 빈 도로 끝에서 서정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서정적인 사건들이 신문에 났다 햇빛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은 투명하고 작고 고요했다 솜털이 나 있고 매끄러웠으며 얼음처럼 차가웠다 (···) 목욕탕 굴뚝에서 사는 사내가 그녀에게 인사한다 그녀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올려다본다 사내에게 말한다 화재가 발생했어요! 페달을 밟는 발이 빛난다 하얀 치마 속 종아리가 투명하게 빛난다 사내는 멀어져 가는 자전거에 대고 소리친다 투명하고 작고 고요한 불이에요! 사내는 소리친다,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소리친다 얼음처럼 차가운 불이래요!




-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32-36쪽 부분


2.
상가 건물 오 층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 아이가 창문을 빠져나와 창턱으로 올라선다. (···) 아이의 이마로 전깃줄 그림자가 지난다. 창문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 전깃줄 사이로 열리는 허공이 기차가 지나다니는 잿빛 벌판처럼 보인다. (···) 창문에서 욕설과 함께 한 사내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안테나를 잡고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을 피한다. 아이가 웃는다. 전깃줄이 윙윙거린다. 아이의 몸이 허공 속으로 펄쩍 날아오른다.

6.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가 걸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평소처럼 벌거벗은 채다. (···) 그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전에 썼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소박한 삶」이라는 시는 저 사내에게서 착상을 얻어 쓴 것들이다. 다음번엔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 써봐야지. 목욕탕 문을 열면서 내가 중얼거린다.



7.
목욕탕 굴쭉 아래 사는 사내는 입을 헤벌리고 굴뚝 아래 앉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전깃줄을 바라본다. 사내에게 그것은 서로의 다리를 물고 늘어선 이상야릇한 거미 떼를 연상시켰다. 그것들은 전신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검게 나아가면서 눈발로 가득한 허공을 비밀스럽게 지배했다. 사내는 허공에 번뜩이는 전깃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 사내의 벌거벗은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눈 녹은 검은 물이 굴뚝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져 내린다.



-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66-67쪽 부분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고철 더미가 깔린 바탈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 바람의 거친 궤적이 잿빛 구름을 밀어내면서 거대한 하늘 위로 새파란 대기의 띠가 몇 줄기 좁은 외길처럼 파인다 (···) 그는 더듬더듬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단순한 이름들을, 추위로 가득한 대기의 이름들을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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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의 시 - 나희덕의 현대시 강의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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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접시의 시(나희덕의 현대시 강의), 창비, 2012
#나희덕


그립던 이의 집을 방문 했을 때 그가 깎은 과일을 접시에 놓는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접시위에 사과와 배와 감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다. 피부가 다 벗겨진 몸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을 맞으며 잘려나간 그들의 껍질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둑한 구멍 속으로 사라질 것임을. 그와 내가 꼭꼭 씹어 삼킨 사과와 배와 감처럼 우리도 껍질을 다 벗고 같은 접시 위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희덕 시인이 현대시의 구조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대가들은 쉽게 쓰고 쉬운 듯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의 본질에서부터 착상, 주체, 리듬, 묘사, 서사, 진술 등 시를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2012년에 출간된 책임에도 당시를 기준으로 비교적 근간의 시들을 담고 있어 지금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좋은 시들의 감상은 덤. 목차를 잘 보자.




(목차)
1. 시는 어떻게 오는가(시적 언어와 상상력)

- 어떤 강연에서 사랑과 연민의 차이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청중들이 내놓은 대답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랑이 여명이라면, 연민은 일몰”이라는 비유였어요. 31쪽

- 이슬비 내리는 가을날 오후. 뻔득이 니야까 뒤에다 붙어 가는 초등학교도 못 가는 아이의 찢어진 고무신 사이 흙탕물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는 때의 딱한 마음. (서정주, 「내 시정신에 마지막 남은 것들」) 35쪽 재인용



-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스닥 이제 날개가 없다 (···)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 프린터 아래의 내 무릎 위로/ 쿠폰이 동백 꽃잎처럼 뚝 떨어진다 나는/ 동백 꽃잎을 단 나를 클릭한다 (···)



2. 누구를 통해 말하는가(화자와 퍼소나)



- 한 편의 시를 쓰고 읽는 일이란 다음과 같이 시인과 독자가 세 겹의 목소리를 주고 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함축적 시인→(현상적 화자→현상적 청자)→함축적 독자〕→ 독자


- 고형렬,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부분

머리를 두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 아우는 종이 위로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참고) 백석의 「수라」



3. 소리는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구조와 리듬)



- 허수경, 바다가, 부분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3연)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4연)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4. 대상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묘사와 이미지)

- 김기택, 사무원

“내가 시적인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의 어떤 ‘행동’이에요. 예를 들면 울음이나 웃음, 하품, 앉아 있는 모습 등 얼핏 당연해 보이는 그 움직임 속에 내재해 있는 어떤 ‘본능’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좀 더 정말하게 보려고 하지요. (중략) 「사무원」같은 시도 의자아 앉아 있는 생활을 다리가 여섯 개라고 표현하면서 의자 다리와 사람 다리가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고착화된 상태를 아이러니적으로 보여 주려고 한 것이지요. 본능이 가장 극단적으로 억압된 상황 속에서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제겐 흥미롭게 느껴지곤 해요. 138-139쪽




5. 감추면서 드러낼 수 있는가(은유와 상징)

- 이성복, 극지(極地)에서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6. 시와 이야기는 어떻게 만나는가(서정과 서사)

- 송찬호, 기린

길고 높다란 기린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인 별들이 아아아아 - 노래하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 한번 궤도 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 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리 한 가지 꺾어 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다시 겅중겅중 뛰어가는 저 우스깡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시(詩)의 족장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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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시집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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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눈이 내 얼굴을 - 제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28
안태운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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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운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 민음사
#안태운


1. 현실의 재현보다 현실 너머의 세계와 꿈에 집중하는 시집. 시인은 《초현실주의 선언》을 쓴 앙드레 브르통이나 카프카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보다는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독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주어와 서술어만 있고 목적어가 없는 경우, ‘있다 있었다 했다 하고 있다’ 같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문장들은 시적자아와 화자가 현실 세계의 주체이기 보다는 꿈속이나 현실 바깥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에 관한 시들이 인상 깊다. ‘물’은 안과 밖의 경계, 부피와 깊이, 끈적임과 투명함, 고임과 흐름 등 현실과 비현실의 요소들을 두루 가지고 있는 시적 소재이기에 안태운의 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메모


- 얼굴의 물 13쪽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는 내리고/ 비는 믿음이 가고 모든 맥락을 끊고 있어서 좋다고 그는 되뇌고 있다 그러면서 걸어가므로/ 젖은 얼굴이 보이고 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그는 말하게 되고 그러자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드나들게 된다/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



- 토우 22-23쪽 부분

그들은 크고 오래된 토우를 바라보고 있다. (···) 먼지가 일고 있고 그 둘은 서로 주장한다. 토우를 자신이 빚었다고. (···) 그럴 때 그는 물에 대하여 말한다. (···) 그곳에서 어떻게 물이 살 수 있었는지. (···) 그 물로 어떻게 반죽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섞어 넣었던 체액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또 다른 그는 새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그는 불타는 새의 연기를 토우에 먹였다고 한다. (···) 사람들은 무감하고 주장은 계속된 채로 있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토우에 몸을 꽂는다. 꽂고 있다. 꽂지마. 꽂는다. (···)



- 연안으로 39쪽

연안으로 가 봅시다 연안으로 밀려오는 너를 보러 나는 연안으로 건너가 봅니다 너를 마주한 나를 만나러 연안으로 나를 흘러가 봅니다 네게 잠들기 직전이라고 말해 주러// 그런 내게 너는 물을 밀고 땅을 밀었다고 합니다 밀다가 놓쳤다고 합니다 밀려오는 중에 갈 곳을 잃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네가 사이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멀어져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고 그러니 나를 흘러가라고 말합니다 너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잠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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