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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맥 2018.봄 - Vol.33
시산맥사 편집부 지음 / 시산맥사 / 2018년 2월
평점 :
이재연,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46-47쪽, 시산맥 2017 여름호 발표작품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밤의 솜털에 성냥불을 붙인 사람들의 아침/ 조용히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은/ 날개를 접고 주위를 주시한다/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새들도 습관적으로 줄을 지어 날아간다/ 높이가 다른 냉담한 건물들과 함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의 한 구석에서/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거리는 일/ 어디인가 무언인가 아파도 많이 아파도/ 죽지 않는 영혼의 일 지루한 꿈의 일/ 그러니까 결국 새의 입장도/ 밤의 통증처럼 멀리 사라져가는/ 행인의 뒷모습과 같다/ 사랑을 취소하고 사랑을 꿈꾸는/ 새의 소리에는 인과가 없다/ 나를 생각하면 너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낡은 체제에 매달리는 동안/ 불쑥불쑥 밀고 들어오는 꿈도/ 폭력이라는 것을 새는 알지 못한다/ 종일 숲에 매달리다 겨울이 간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간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쉽게/ 네가 지나갈 줄 알았기 때문에/ 내일도 끝까지 허공에 취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저녁, 새에 편입되어 읽던 책을 덮는다
시리아 굶주린 혈(血)의 사막에서 금빛 모래사장 해변의 춘곤증자들에게/ 창백한 시체가 한 조각 잘린 구름으로 떠밀려올 때/ 견고한 일상의 고딕 질서를 덩어리째 뒤집어쓴 도시 사람들은/ 아주 잠깐 경악했다 경쾌한 악당 같던/ 미디어의 충만한 리듬은 조심스레 끝장났고 스무 살 열사병,/ 비릿한 합주를 나눴던 벌거숭이 몽상가들마저/ 순순히 날 선 악곡(樂曲)을 포기하고 거리로 집결했다 관현악단 같은 햄릿들로/ 거대한 복수를 꿈꾸던 어릿광대들과 리어처럼 선명히 울부짖을 미치광이들은/ 이미 쓰레기 가득한 거리에 당도했고 간밤 골목마다 신명나던 두드림,/ 핏물 같은 구토로 조율 당한 오필리아들은 누굴 위해 저리도 침묵하나 지난 계절/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 악공(樂工)이 돼버린 소년소녀들은/ 제일 아름다운 물의 파동으로 우리의 동공을 적셔대는데/ 관(管)같은 고통은 현(絃)의 비명은 끝까지 살아남아/ 살아있는 자들의 금 간 심장을 날카롭게 연주하네 누구도 화음 낸 적 없는데/ 누구나 펼침화음인 사람들 오래전 강을 건넜던 백수 광부의 그림자처럼/ 낯빛들 어둑했다 저 멀리 바닷바람이 붉은 산호처럼 뻗쳐 와도/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 있는 물의 영혼들 가느다란 여음(餘音)에도 휩쓸리지 않으려/ 악공들 모두 기슭을 간신히 부여잡고 온몸을 떨고만 있는데,
이미지의 전개가 활달하고, 원심력을 지닌 시행들이 시적 공간을 자유롭게 열어나간다. 잦은 직유와 산문적 호흡은 시를 약간 산만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닥을 놓치지 않고 독자를 어느 낯선 지점에 정확히 데려다 놓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물의 악공들」역시 시리아의 사막에서 시작해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 있는 물의 영혼들”을 불러낸다.
- 정용화, 붉은 나무들의 새벽, 97-98쪽
외로움은 등이 슬픈 짐승이라서/ 작은 어둠에도 쉽게 들킨다
계절을 짊어지고 나무들이 온다 겨울은 살짝만 기대도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라 오래 켜 둔 슬픔 위로 폭설이 쌓인다 네가 건조한 바람으로 불어올 때 창문은 피폐해진 마음들의 거처, 새벽노을이 드리운 나무들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창 위로 서린 시간의 두께만큼 오늘은 흔들린다
나무들은 어둠에 뿌리내리고 빛을 향해 나간다 바다를 건너서 북쪽으로 향하면 얼금과 죽은 자들의 나라가 있다는데,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은 노을로 물들여진 가슴이 언제나 붉다
고독한 몸이 보내오는 눈빛에서는/ 오래 짓무른 어둠의 냄새가 난다
몸속에 그늘을 새기는 방식으로, 매일 복용해야 하는 일정량의 고독과 슬픔이 있어 나무는 스며든 간밤의 흔적을 나이테로 새겨 놓는다 새벽을 견디고 있는 이름들의 빛으로 나무들은 못다 쓴 계절들을 천천히 옮겨 적는 중이다
- 이해원, 나무들은 다시 출발선에 선다, 235-236쪽 부분
간혹 톱니가 겉돌면 계절이 곤두박질하는 / 나무들의 시계/ 배터리의 절반을 꽃에 사용해도/ 힘이 부칠 땐 적절하게 해거리를 이용한다
봄은 낭비가 심하다/ 버리는데 익숙한 나무들/ 일회용인 꽃이 나무 밑에 수북하다
너는 등대가 아님에도/ 바다의 귀를 지니고 있어/ 어두워지는 무렵의 내 울음을 잘 을을 수 있지/ 너는 날 수 없는 새/ 빈 늑골에다 무채색을 채우는 백상아리 주검/ 나는 그 색채를 생각의 칼로 떠서/ 음미하기를 좋아하는 미식가다/ 그게 아픈 너는 내 생각을/ 달콤한 촛불의 춤으로 바꿔놓으려 하지/ (중략)
- 김건영, 비겁훈련센터, 248-249쪽 부분
식물을 길들이려 시도한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태어난다 비가 오기 전부터 비가 온 후까지
아무런 일이 없어도/ 아이들은 생겨나고/ 물을 댄 논처럼 울 준비가 되어 있다
밤이 오는 동안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은 아이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일기를 쓰지 않는 자의 공포라고 부른다
그림자를 잘 그리는 아이는/ 금세 어른이 된다
아이들은 이유 없이 자라고 있다/ 최초로 화분을 집에 들인 사람은/ 방 안에 쌓인 낙엽에 질식했을 것이다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발성연습을 해보았다/ 목소리에는 신을 키우는 메아리가 있고/ 노래 속에는 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가 종이처럼 구겨지는 것을/ 귀는 몰래 듣고 있었다
여름에서 여름까지. 뛰고 있는 폭죽들./ 오늘은 무얼 거둬왔지?
너는 부푼 자루를 끌러 복도에 늘어놓곤 한다. 쏟아지는 입술과 펜촉이 없는 펜대와 모서리가 지워진 발자국들을. 너는 네가 무겁고 한 번은 쓰러진다. 조용히 굴러가는 폐타이어.
펼쳐지는 혓바닥의 계단을 따라 걸으면 노파가 된 너와 너의 손가락들이 보인다. 부케를 받기 위해 팔을 뻗는 여인과 허공의 부케를 찍고 있는 사진사들이. 사진을 찢고 노는 수도원의 고양이가.
어디를 향해 당겨진 명주실이니. 무릎의 탄성으로 얻은 것들, 숲이 아닌 폭죽들. 우리의 손목이 열리고 닫힌다. 녹슨 문고리와 거기 달라붙은 오른손.
우리는 젖은 끈을 잡아당기고 말았는데. 그때 자루에 남은 것. 횃불이 녹아있는 웅덩이. 너는 숲을 뭉쳐 웅덩이로 굴리기 시작한다. 지속되는 기계음. 돌들이 물속에 잠겨있는 여름이고.
불발하는 손목들. 도대체 무엇을 만진 거니. 붉은 바퀴자국이 우리의 발밑에 새겨지고 꽃다발이 끌리기를 멈춘다. 그대와 내가 동시에 붙잡은 팔. 서로가 서로의 난간이었을 때.
왼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 불이 옮겨 붙거나 물속에 잠기거나./ 그 모든 장면이 나무의 결을 따라 새겨지고 있었다.
- 김민율, 절대 영도에 관한 주머니 실험 295-297쪽 부분
당신과 내가 사랑하여 우는 동안/ 추위에 에는 살의 파편들 흩어지는 동안
충혈된 눈까지 눈금이 올라갔다가/ 점점 낮아지는 울음의 속도
바깥 임계 온도를 초월하고 있다/ 살들은 불확정성 물질이다
미래에 어떤 형태로 변할지/ 스웨터 주머니는 예측불가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 영도 눈금에 가까워지고 있다
순수한 살의 가설이 발생할 수 있을까/ 완벽한 질서가 우리를 행복하게 살게 할까
겨울바람이 분다/ 빈 주머니가 가속 팽창하고 있다
손과 손이 서로의 살에 닿은 기억이 따듯해지면/ 미래의 내 손은 당신의 손과 포개어져 녹는다
우리를 감던 탯줄/ 주머니 속에서 올이 풀린다
손을 꺼내면, 몇 세기 전/ 태항아리에 태(胎)를 묻던 풍습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