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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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



신을 밟아줄 사람이 없어

나는 신을 밟아줄 사람을 찾으러 밖으로 나간다



두 팔로 규칙적인 획을 그으며

왼 앞발과 왼 뒷발을

오른 앞발과 오른 뒷발을

동시에 뻗는 잘 길들여진

말처럼



어지러운 골목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며

신에 창문을 낸다



허정허정 걸어와 코를 밟고

지나가는 바람



얼룩과 얼룩이 오랜만에 만나는 순간

그림자는 뒤꿈치를 깎으러

신을 바짝 뒤쫓는다



그림자야,

신은 자라지 않아 뒤꿈치를 깎을 수 없단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돌아보면 지난 자리마다

신의 발자국이 선명했다



검은 바탕에 흰,



얼룩말의 얼룩은 지문처럼 다 다른데

왜 신을 묶는 매듭은 항상 똑같을까



매듭은 앞으로도 소리없이 풀어질 것이고

밑창에는 끈끈한 어둠이 달라붙겠지



신 앞에서 신을 구기며

한쪽 무릎만 꿇고

질끈, 끈을 묶고 나면



식당에서 바뀐 신을 신고 나온 기분에서

새 신을 만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신을 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을 신에 맞추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그 신이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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