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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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집, 책기둥,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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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경계가 확장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시는 이미지를 만드는 문학이다. 서사 문학인 소설과의 차이점이다. 물론 묘사 외에도 진술을 통해 시적 의미를 확장하고 변주해 나가기도 하지만.



문보영 시인의 첫 시집은 일반 독자들이 시(詩)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양팔을 벌린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발견 보다는 발명에 가까운 시집이다. 시인은 ‘도서관, 시를 쓰는 일(앙뚜안, 지말, 스트라인스 같은 시인들의 등장), 신’을 시 속에서 창조해낸다. 근엄함과 엄숙함 보다는 오히려 엉뚱함과 장난스러움, 별 내용이 아는 것 같은 일상성으로 그들의 행동을 서사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수학적 기호나 도형을 활용하고 연극적 요소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은 마치 아웃복싱을 하는 권투선수 같다고 생각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링 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에 로프에 기댔다가 그 반동을 위해서 주먹을 쭉 뻗고 힘들면 상대방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고 잠시 숨을 고르는 선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런 시인의 발랄하지만 처절한 노력이 글자들의 이면에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은 시집이었다.




* 메모

- 오리털파카신 13쪽

신이 거대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다 인간은 오리털 파카에 갇힌 무수한 오리털들, 이라고 시인은 쓴다 이따금 오리털이 삐져나오면 신은 삐져나온 오리털을 무신경하게 뽑아 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죽었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떴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의 숨통이 끊겼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
죽음 이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고 단지 한 가닥의 오리털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다 바닥에 내려앉는다, 고 시인은 썼다




- 지나가는 개가 먹은
두 귀가 본 것 27-33쪽 부분

2. 망원경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분리된 귀는/ 눈을 감았다 떠 보려 시도한다 그러자/ 앞이 보인다/ 낡은 방의 구석/ 천사들이 생선 더미마냥/ 쌓여 있다 그들은 얼굴을/ TV처럼 틀어 놓고 자고 있다/ 어디선가/ 신이 나타나 그들의 얼굴을 꺼준다/ 창가에는 고개를 수그린 오래된 망원경/ 귀는 망원경으로 지구를 관측한다/ 그것은 불 꺼진 도서관 모서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판기에 달린 반환구 모양이다 (후략)



- 역사와 신의 손 60-65쪽 부분

8
신의 손을 놓친/ 남자는,/ 신의 손을 편 채 뒤집어 가방 위에 올려놓았으므로/ 신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모양의 책은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다/ 돌아왔을 때,/ 읽던 부분부터 다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일어선다/ 가로로 긴 검정 가방에 달린/ 두 개의 주머니 중/ 지퍼가 고장 나/ 닫힐 수가 없는/ 왼쪽 주머니에서/ 별 모양 치즈 과자 봉지를 꺼낸 뒤/ 도서관을/ 나서는 것이다


- 정체성 156-157쪽 부분

가진 것이 멍색 고무풍선뿐인 어린이는 할 일이 없어 풍선을 분다 터지기 직전까지만 불고 천천히 바람을 빼고 있다 그 바람을 모아 내가 한숨을 내쉰다 풍선이 터져 버리면 아이는 가지고 놀 장난감이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구분되지 않아서 풍선은 멍색을 유지한다

사람 대신 바위가 우는 책을 읽으며 우리는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한다 우리는 알아요, 풍선을 터뜨리면 더 이상 숨을 참을 필요도, 숨으로 분풀이할 필요도, 사람이 죽어 가는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는 걸요

사내는 책을 탁, 덮는다 방금 누군가 나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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