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 모:든시 시인선 3
유정이 지음 / 세상의모든시집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유정이 시집, 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 세상의 모든 시집


시집의 첫 번째 시 「온유한 독서」부터 흥미롭다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이나 에세이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에 나오는 중국·러시아·몽골의 국경지대인 ‘알타이 지방’처럼 들풀이 바위틈에 낮게 피는 초원의 나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 첫인상을 안고 읽어나가니 이란성 쌍둥이 같은 시 「국경 너머의 잠」과 「잠 너머의 국경」이 눈이 들어온다.



또 어둡고, 단절된 ‘골목’의 이미지도 좋다.“아버지의 골목은 검은 도화지처럼 어둡다”(「경비원 아버지」)) “저녁의 방향으로 어깨를 기울이는 골목”(「골목의 이유」) 같은 구절이 맘에 와 닿는다. 그 시들의 화자처럼 나한테도 많은 골목이 생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온유한 독서 13-14쪽

밤새워 읽은 책은// 이본異本이었어요// 밑줄 그어 두었던 문장은 모래화석이 되었죠// 눈으로 읽은 글자는 귀로 모여// 버스 터미널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바퀴를 굴리며 떠나갔어요// 질문 없는 나라에 도착한// 선박이 밤새워 읽은 것은 두꺼운 안개였습니다// 새벽에 깨어나면 우리는 어두운 색깔,// 내가 읽은 페이지는 찢어진,// 아니죠, 찢긴// 너무 더러운 바닥이었어요


- 고독은 골목과 같아서 42-43쪽 부분

검은 커튼을 사방으로 쳐놓고/ 당신은 너무 깜깜하지/ 멀거니 서 있던 가등街燈이 뭐라 뭐라 주억거렸다는 것을 알아/ 그 가녀린 불빛으로/ 어떻게 당신을 속속들이 누빌 수 있겠어

한결같이 당신에게는 골목이 많고/ 우리는 한결같이 어두웠어/ 계속해서 막아서는 양파껍질처럼/ 당신은 벗겨도 벗겨도 골목이라는 것/ 벗어날 수 없는 골목이라는 것

내 생을 골목의 한 때라고 말하지 않겠어/ 골목은 골목이어서 거기 있었고/ 당신이 골목이어서 나는 걸어 들어갔던 것/ 골목이어서 어둡고, 무겁고, 고요한 것/ 당신이 골목이므로/ 더 이상 당신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


- 국경 너머의 잠 22쪽

티벳 북부 상그릴라는 어디를 딛어도 변방이다 수요일을 종일 걸어 수요일에 도착하는 설산 아래, (중략)

바로 앞줄에서 낮이 끊기면 캄캄한 어둠을 이어 붙이고 걸어야 한다 한 발씩 걸으면 한 발씩 어두워지는 길, 앞서간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혀를 대보면 사지로 뻗어오는 시큼한 별빛들 이국의 밤을 맛있게 구워 놓는다 더는 갈 수 없을 때 거기가 정상이다 (중략) 서울에서 잠들면 북안까지가 국경이고 네 옆에 누우면 너 이전이 국경이다 오늘 밤은 너 이후에서 잠든다


- 잠 너머의 국경 23쪽

네 시가 지나면 마른 빨래들이 돌아왔다/ 바람의 기별을 하나씩 개켜 두는 동안/ 구부정한 저녁이 처마 밑으로/ 마른 흙 툭툭 털면 들어선다/ 밤은 낮게 내려깔리고 나는 값을 지불하듯/ 하나씩 세어보던 초록 잎사귀를/ 검은 하늘에 떨어뜨린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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