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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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배수아 옮김, 산책자, 한겨레출판



1. 민음사에서 나온 작은 크기의 단행본 로베르트 발저의『산책』만 읽었었는데, 배수아 소설가가 번역한 짧은 산문들과 콩트, 중편인《산책》이 담긴 작품집을 읽게 되었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현직 소설가가 번역한 작품이라 확실히 가독성이 높고 문학적으로 번역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삶 전체라고 볼 수 있는 산책과 글쓰기가 테마인데 마지막에 실린《산책》은 다시 읽어도 묘한 소설이다. 아침부터 저녁에 어스름이 깔리기까지의 산책에서 사람과 풍경을 만나고, 작품을 구상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툭 내던지고, 미래의 출판과 독자들을 위해 첨언하는 등 딱 한 가지 장르로 한정지을 수 없는 매력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집이다.




● 주인과 고용인

- 복종하는 것과 명령하는 것은 서로 복합적이다. 훌륭한 문체는 주인이나 고용인 모두를 지배한다. 나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을 고용인의 자세로 내놓으며, 이것을 정독하는 사람을 내 주인으로 간주한다. 나는 그 주인이 내가 제공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만족감을 얻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61쪽

- 그런데 이제 질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뭔가 의무가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리고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민감해졌다. (중략) 질문은 간청한다. 질문은 민감하고, 민감하지 않다. 민감함은 스스로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아마도 아무런 의무가 없는 자야말로 가장 민감한 자일 것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의무였으니까. 간청을 받는 자는 간청하는 자에게 간청하지만, 간청하는 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모든 질문들이 주인인 듯 보이고, 질문에 몰두하는 자가 고용인 같다. 질문은 근심스럽게 응시하지만, 질문은 근심이 없다. (중략) 질문을 받더라도 단 한 순간도 스스로의 균형감을 잃지 않는 자가 질문의 시각으로 볼 째 민감하다. 그런 자는 질문 속의 대답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보이는 대답 그대로를 말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의 이런 특징을 믿지 않는가? 62쪽


● 젬파하 전투


- 당시 1386년에도 일상의 걱정거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삶은 팍팍하고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웅적인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고달픈 노동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삶이 전투가 있던 그날에 못 박혀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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