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08
안미옥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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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미옥 시집, 온, 창비


1. 오랜만에 여백이 많은 시집을 읽었다. 간결한 문체가 낳은 하얀 여백에 내 기억을 환칠했다. 검정에서 빨강과 파랑을 꺼내 마음의 천국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천국’연작과 ‘마음’에 관해 성찰하는 여러 시편들(제1부의 제목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을 읽고 있으면 시인의 말처럼 “끔찍하구나/ 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 생각이 든다. 시인과 시의 주체는 엄밀히 분리되지만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둘을 겹쳐 생각하기 마련이다. 결코 밝지 않은 가족사, 색상표에서 온색보다 한색 계열에 치우쳐진 감정이 느껴진다. 슬플 때는 슬픈 노래를 들으라고 하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 꿈과 현실, 기억과 망각, 밤과 낮이 하나라 갈마드는 것 같은 시집이다. 그게 ‘온’이다.




제1부 –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
제2부 –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제3부 – 무엇이 만들어질지 모를수록 좋았다
제4부 - 부서지고 열리는 어린잎을 만져본다




* 메모


- 시집 94-95쪽 부분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건 정말일까/ 한겨울을 날아가는 벌을 보게 될 때// 투명한 날갯짓일까/ 그렇다면// 끔찍하구나/ 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



- 천국 42-43쪽 부분
같은 곳을 맴돌고 있으면 이곳에 남지 않는 법을 모르게 된다. 숲이 숲을 닫았다. 나무가 열매를 닫았다. 이 집엔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큰불을 기다려. 멀리 있는 사람들도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런 말들을 기다려. 말 속에 숨어 있는 빛나는 눈을 기다려. 가라앉은 채. 부서지는 마음을.// (중략)




- 온(천국 3), 46-47쪽 부분

날지 못하는 새의 이름을/ 녹슨 나사/ 깨진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나는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 무너지고 있는 집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큰비가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창밖을 보지 않기로 했다./ 얼굴이 벗겨질 것 같았다// 죽은 비둘기떼의 펼쳐진 날개/ 뒤집힌 우산들이 쌓여 있는 곳// 나는 하류로 가지 못했다/ 허리까지 차올랐던 물이/ 끌고 내려가는 것들을 생각했다// 뿌리 뽑힌 풀들이 메말라 있어도/ 끊어지지 않는 볕// 나는 이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아있는// 큰비가 온다/ 나는 소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간다




- 램프 50-51쪽 부분

망가진 주술들이 쌓여 있다/ 앞니가 빠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뒤집힌 그물을 다시 뒤집다가/ 정면을 잊는다// 영혼이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건너편의 마음이 된다// 사람들에겐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무수히 많은/ 노란 리듬 때문// 구부러진 앵무새의 코// 안전선은 익숙하게 경고한다/ 살아 있다는 생각 같다// 여름은 요약도 없이/ 자라서 죽는다// (중략)// 구한 적 있는 소원// 뭉친 솜을 풀고 있다



- 생일 편지 80-81쪽 부분

‘목적지를 정하면, 도착할 수 없게 된다.’// (중략)// 시작을 시작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작이 필요했다./ 베란다의 기분. 축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중략)// 발이 더 무거워졌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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