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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잘 모르겠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평점 :
심보선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사
1. 강동연 주연의 영화 ‘가려진 시간’은 초등학교 동창인 성민(강동원)과 수린(신은수)과 그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 꺼낸 알이 깨져 수린을 제외한 친구들이 모든 현실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살다가 성민만 제외한 두 친구는 죽게 된다. 성민만 훌쩍 커버린 채 수린 앞에 나타나 벌어지는 아이들의 실종사건을 다룬다.
오랜만에 시집을 낸 심보선 시인의 두꺼운 시집을 읽다가 ‘가려진 시간’을 떠올렸다.
당나귀는 태아 때부터 등에 굳은살이 박여 있다// 당나귀는 벤자민처럼 태어날 때부터 늙은 당나귀다// 당나귀는 벤자민과 달리 계속 늙기만 한다// 당나귀는 자기보다 젊은 늙은 말을 연민한다// 당나귀는 자기보다 젊은 늙은 사람을 신뢰한다//
: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그 ‘벤자민과 달리 계속 늙기만’ 하는 당나귀. 늙어감은 예정된 죽음에 남들보다 일찍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서글픈 상황에서 당나귀는 자기보다는 젊지만 늙은 말과 사람에게 공감한다. 절대 긍정적이라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애써 밝은 척 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당나귀. 훌쩍 커 버린 ‘성민’을 알아보고 어떻게든 성민에게 원래의 삶을 되돌려주려고 애쓰는 수린의 마음을 닮았다.
2. 눈에 들어오는 시 중엔 문학(시)에 대한 시들이 많았다. 사회학자답게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은유하는 시와, 가족 중엔 아버지에 관한 시가 눈에 띈다. 5부의 장시(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도 인상적이다. 시집이 두껍고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시도 많았다.
들어라/ 인적이 드문 밤거리여/ 쨍그랑 병 하나가 깨지면 순식간에/ 모든 집의 불빛이 꺼지는 첨단의 도시여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러저나 당신은······
불을 꺼뜨리는 물이 있다면/ 물을 증발시키는 불도 있다/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뭔가 시작하려는/ 역설, 진동, 이끌림, 자기장의 형성// 중략//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표정을 갖는다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근육의 문제였다/ 자살과 살인, 죽음, 삶,/ 죽음의 죽음, 삶의 삶······/ 그 모든 것이 근육의 문제였다/ 근육 안에 흐르는 전기의 세기와 방향/ 그것들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