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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ㅣ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1. 수건을 돌리던 같은 반 친구들이 곡선주로에 앉았다 소년은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 맞은편에서 소녀가 바통을 말아 쥐고 달려온다. 손에 땀이 많은 소년은 혹 바통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소년은 더 키가 크려는지 요즘 무릎이 무척 아프다. 소년은 이어달리기 선수에서 빠질까봐 티를 내지 않았다. 곡선주로를 돌아 직선주로에서 바통을 건네받을 준비를 하던 소년. 그런데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애저녁에 날갯죽지가 아픈 새처럼, 정들기 전에 떠난다는 꽃처럼 그녀는 사라졌다. 저 멀리 바통이 떨어져 있었다.
2. 표제작인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읽는데 이어달리기를 선수인 소년이 떠올랐다. 열심히 달릴 준비가 되었는데도 바통을 건네 줄 소녀가 사라진 소년이 우두커니가 된 것 같은.
이 시집은 묘사보다는 직관에 의한 진술이 도드라진다. ‘슬픈 빙하시대’ 연작, ‘생태 보고서’ 연작, 이국에 있는 화자, 푸른색 등이 이 시집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소녀를 잃은 소년의 그 다음 행동은 어땠을까. 그 자리에서 나무가 되었을까. 밖으로 나갔을까.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17쪽 부분
푸른색. 떄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