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맥 2017.여름 - Vol.30
시산맥사 편집부 지음 / 시산맥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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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맥 2017. 여름호, 시산맥사

 

 

1. 양을 세듯 잠을 센다. 잠은 아무리 세어도 답이 똑 떨어지지 않아 난감하다. 밤이 깊을수록 양이 모인다. 밤을 지샌 양들이 모여 ‘태양(太陽,太羊)’이 된다. 매일 아침 학교로, 직장으로 길을 나서는 우리는 그래서 ‘태양의 후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여전히 양을 세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 이어폰을 끼고 혼잣말을 듣는다. ‘난 살아있지, 살아있구나.’ 학습의 기본은 반복이다. 살아있다고 ‘외워놓지 않으면’ 잊혀지니까. 할 수만 있다면 오랜 불면에서 뛰쳐나와 모두를 위한 잠의 희생양이 되면 좋겠다.

 

 

- 유계영, 잠을 뛰쳐나온 한 마리 양을 대신해, 148-149쪽

 



  그때 아침 태양은/ 당신의 얼굴을 얼마나 자세하게 깨무는지/ 오줌싸개 천사의 발밑에 고인 동전처럼/ 얼마나 자세하게 외로운지// 양을 대신해 깨어나는지// 잠투정의 혀를 세우고 거리로 뛰쳐나온 자들/ 크고 작은 전쟁의 병사들이고/ 가장 먼저 죽는 행운을 빌었지만// 잠을 뛰쳐나온 한 마리 양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아 매매 우는지// 태양이 가장 높도록 깨어나지 않는 나는/ 잠 속에서 애써 혼잣말 중이다/ 난 살아있지, 살아있구나/ 외워놓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 있는지// 이 또한 양을 대신해// 심연이라는 장소가 있다고 들었다/ 당신의 가슴에 손을 뻗어도 손톱 끝인데/ 그 많은 양들은 어디서 모았지?// 젖은 속눈썹같이 예쁘게 자라는 슬픔도 있는지/ 그렇게 빛이 드는 골목도 있는지/ 하루 종일 아침인 양을 대신

 

 


 

- 이대흠, 허공소리꾼 삼정양반, 88-89쪽

죽은 사람 배웅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허공소리꾼이 딱 한 번 상여 소리를 하지 못한 날은 그 자신이 이승에서 해배되는 날이었는데······ 그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던 건 소리를 못해서가 아니라 새에게나 곤충에게나 풀잎에게나 허공에게나 소리하라고 소리를 텅 비워놓은 것이었다는 걸 그가 아조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 박장호, 표피에 덮인 시간의 책 112-115쪽 부분

 


1. 굿바이 미스터 트리

 


가로수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알이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경테가 내 것과 똑같은 표범 무늬였다. 누군가 물었었다. “무인도에 있는 네 방 창가에 그림자가 스친다면 그게 무어라고 생각해?” “나뭇가지.” “너는 전생에 나무였구나.” 안경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중략) “나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헬로우 미스터 트리.” 인사를 받은 나무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속에서 표범이 포효했다. 내 눈동자 속에 뛰어들어 나의 표범을 내몰았다. 길가에 선 나무의 표범과 자리에서 나온 나의 표범. 나의 혼과 나무의 혼이 뒤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는 사람이 된 나무다. (중략) “말 없는 나무 같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나무랄 수 없는 사람인걸요.” (중략) 횟집 밖으로 나온 나는 나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굿바이 미스터 트리.” 곁에 있던 일행이 물었다. “이 나무 잘 아시나 봐요?” “남이랄 수 없는 나무죠.” (중략)

 


2. 굿바이 미스터 피플

 

안경테가 내 것과 똑같은 표범 무늬였다. 기회가 왔다. 성난 맹수로 혼자인 맹수를 몰아내고 사람을 차지했다. 나의 혼과 그의 혼이 뒤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는 나무가 된 사람이다. 눈이 감기니 알겠다. 넌 사람으로 된 나무가 아니라 나무로 변하는 사람이었구나. 안경테만 남았었구나. 헤어지는 게 두려워 너만 사랑한 여자였구나. (중략)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나뭇가지가 왜 흔들렸다고 생각해?”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서.” “너는 멀어지는 것만 사랑하게 될거야.” (중략) 잘 가라 사람아. 너는 나의 전생, 나는 너의 내생. 너에게 남은 사람은 내가 다 사라져 줄게. 나에게 남은 남자는 네가 다 살아 버리렴.

 


3. 굿모닝 미스 스킨

 

로돕신이 분해된다. (중략) 우리는 밤의 이야기 속에서 만났다. 눈을 감고 대화의 앞부분을 생각한다. “기억나지 않는 깊은 꿈을 꾸게 된다면 그곳이 어디일 것 같아?” “무인도.” “무인도에서 살고 싶은 거구나. 하지만 그곳은 꿈속의 섬이 아니야. 네 곁엔 이미 사람이 없거든.” 눈을 떴다. 로돕신이 분해되었다. 그는 없고 촛불이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중략) 촛불과 나눈 이야기를 물고 진피의 세계를 떠나는 새를 본 건 표범의 눈. 사람이 외로운 건 그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무가 사랑에 빠진 건 몸속에 도는 장미 향기 때문이다. 하나이면서 둘인 표범이 자리를 바꾸고 멀어진 표피의 아침. 그 모든 이야기를 덮은 시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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